貞觀十七年
에 太子右庶子高季輔
注+名馮, 以字行, 德州人, 以孝聞. 貞觀初, 拜監察御史, 不避權要, 累轉中書舍人, 列上五事. 後除是職, 遷吏部侍郞. 及卒, 謚曰憲.가 上疏陳得失
이어늘 特賜鍾乳一劑
注+鍾乳, 産於石, 食之, 使人通氣生胃.하고 謂曰 卿進藥石之言
注+謂其言有益於國, 猶藥石有益於病也.이라 故以藥石相報
注+“季輔後爲吏部侍郞, 善銓敍人物, 帝賜金背鏡一, 以況其淸鑑焉.”로다하다
書曰 德懋懋官이요 功懋懋賞이라하니 人主勉進臣下之功德하여 欲其不怠如此라
太宗이 兩賜季輔는 得懋賞之意나 然以季輔文武正直으로도 不至宰輔는 未爲盡其才也라
愚按 藥石은 所以愈膏肓之疾이요 金鏡은 可以別媸姸之形이라
太宗이 嘉人臣之進言하여 比之爲藥石하고 望人臣之淸鑑하여 比之於金鏡은 可爲君臣相與之盛事也라
정관貞觀 17년(643)에
태자우서자太子右庶子 고계보高季輔注+〈고계보高季輔는〉 이름이 풍馮이지만 자字로 통용됐고, 덕주德州 사람이며 효자로 소문났다. 정관貞觀 초기에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임명되어 권력과 요로에 있는 사람을 회피하지 않았고, 여러 번 자리를 옮겨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된 뒤, 다섯 가지 사항을 나열하여 건의했다. 뒤에 이 관직에 임명되고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자리를 옮겼다. 세상을 떠나자 시호諡號를 헌憲이라 했다.가 상소하여 잘잘못을 진언하자, 특별히
종유석鍾乳石 1
자劑를 하사하고
注+종유鍾乳는 돌에서 생산되며, 복용하면 기운을 소통시키고 위장의 기능을 돕는다. 이르기를 “경이
약석藥石 같은 말을 올렸기
注+〈약석지언藥石之言은〉 그의 말이 국가에 유익한 것이 마치 약석藥石이 병에 유익한 것과 같다는 말이다. 때문에 약석으로 보답하는 것이오.”라고 했다.
注+사전史傳을 살펴보면 “고계보高季輔가 뒤에 이부시랑吏部侍郞이 되어 인물 선발을 잘하자, 태종太宗이 금배경金背鏡 하나를 하사하여 그의 맑은 감식에 견주었다.”라고 하였다.
“《서경書經》 〈상서商書 중훼지고仲虺之誥〉에 이르기를 ‘덕德이 크면 관직을 크게 주어 권장하고, 공로가 크면 상을 크게 주어 권장한다.’고 했으니, 임금이 신하들의 공덕 쌓기를 권장하여 게을리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러했던 것이다.
태종太宗이 고계보高季輔에게 종유석과 금배경金背鏡 두 가지를 하사한 것은 상을 크게 주어 권장하는 본지를 터득한 것이지만, 고계보가 문무文武와 정직正直한 자질을 갖췄음에도 재상에까지 이르지 못한 것은 그 재능을 다 활용하지 못한 것이다.”
내가 살펴보건대, 약석藥石은 고황膏肓의 병을 치유하는 것이고 금경金鏡은 잘생기고 못생긴 얼굴을 감별해주는 것이다.
태종太宗이 신하들의 진언을 가상히 여겨서 약석에 견주고 신하들이 분명하게 살펴줄 것을 기대하여 금경에 비유한 것은 임금과 신하가 잘 어울린 성대한 일이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