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觀十年
에 太宗謂侍臣曰 帝王之業
은 草創與守成
이 孰難
注+守成, 亦作, 後同.가
尙書左僕射
注+尙, 音常. 射, 音夜. 凡言尙書僕射, 竝同. 僕射, 秦官. 古者重武官, 有主射以督課, 取其領事之號也. 唐制, 尙書省置左‧右僕射, 掌統理, 爲令之貳. 令闕則總省事, 宰相職也.注+詳見任賢篇.對曰
天地草昧
注+易屯卦彖傳曰 “天造草昧.” 草, 雜亂. 昧, 冥晦也.에 群雄競起
하여 攻破乃降
注+下江切.하고 戰勝乃剋
하니 由此言之
인댄 草創爲難
하니이다
帝王之起
는 必承衰亂
이라 覆彼昏狡
하고 百姓樂推
注+樂, 音洛.하여 四海歸命
하니 하여 乃不爲難
하니이다
然旣得之後에 志趣驕逸하니 百姓欲靜而徭役不休하고 百姓凋殘而侈務不息하니이다
國之衰弊
가 恒由此起
注+恒, 胡登切, 常也.하니 以斯而言
인댄 守成則難
하니이다
玄齡은 昔從我定天下하여 備嘗艱苦하고 出萬死而遇一生하니 所以見草創之難也요 魏徵은 與我安天下일새 慮生驕逸之端하여 必踐危亡之地하니 所以見守成之難也라
今草創之難
은 旣已往矣
하니 守成之難者
를 當思與公等愼之
注+按係十二年, 又云 “玄齡等拜曰 ‘陛下及此言, 四海之福也.’”하노라
創業之難은 雖庸人이라도 亦知其然이어니와 守成之難은 雖明者라도 亦有所忽이라
를 不以爲難
이나 而末年
에 를 爲不易
하고 나 而末年
에 하니라
是以
로 文帝之世
에 하고 太宗之世
에 魏徵
이 有失於安逸之戒
하니라
若言守成易인댄 太宗必謂難者를 吾猶身濟之라하여 怠忽生矣라
太宗이 悟二臣之意하고 加謹於守成之難하니 明哉인저
周武漢高는 創業者也나 而不及守成하고 成康文景은 守成者也나 而不及創業이라
惟神禹는 在帝位十年이요 成湯在帝位十三年이니 兼創業守成之事者也라
然以書傳攷之
하면 禹不以
爲難
하고 而以
爲難
하며 湯不以
爲難
하고 而以
爲難
하니 豈創業果易
하고 而守成果難乎
아
蓋創業은 逆境也나 可以進德하고 守成은 順境也나 易以喪德이라
太宗은 身兼創業守成之事하여 不以其已能者自滿하고 而以其未能者爲懼하니 其致貞觀之治也가 宜哉로다
정관貞觀 10년(636)에
태종太宗이 근신에게 말하였다. “
제왕帝王의 사업은
창업創業과
수성守成 중에 어느 것이 더 어렵소?”
注+수성守成은 또한 수문守文(법도를 지킨다)으로 되어 있다. 뒤에도 같다.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注+상尙은 음이 상常이고, 야射는 음이 야夜이니, 상서복야尙書僕射를 말할 때에는 모두 같다. 복야僕射는 진秦나라 관직이다. 옛날에 무관武官을 중시하여 활쏘기를 주로 하여 시험하였으니, 관장하는 일을 취하여 호칭으로 삼은 것이다. 당唐나라 제도에 의하면 상서성尙書省에는 좌복야左僕射‧우복야右僕射를 두어 육관六官을 다스림을 관장하니 상서령尙書令의 다음 지위이다. 상서령이 결원되면 상서성의 일을 총괄하니, 재상宰相의 직책이다.房玄齡이
注+〈방현령房玄齡은〉 본서 제3편 〈논임현論任賢〉에 자세히 보인다. 대답하였다.
“세상이 크게 어지러울 때에는
注+《주역周易》 둔괘屯卦 〈단전彖傳〉에 말하기를 “천운天運이 뒤섞여 어둡다.”라고 하였으니, 초草는 뒤섞여 어지럽다는 뜻이고, 매昧는 어둡다는 뜻이다. 여러 영웅들이 다투어 일어나서 공격해 격파하면 항복하고
注+〈항降(항복하다)은〉 하下와 강江의 반절이다. 싸워 이기면 복종하니, 이것으로 말한다면 창업이 더 어렵습니다.”
“
제왕帝王이 군대를 일으킴은 반드시 쇠퇴하고 혼란한 뒤를 이어받기 때문에 어리석고 흉악한 자들을 멸망시키고 백성들이 즐겁게 추대하여
注+락樂(즐겁다)은 음이 낙洛이다. 온 세상이 귀의하니, 하늘이 주고 백성들이 주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하를 얻고 난 뒤에는 뜻이 교만 방자해지니, 백성들이 조용히 지내고 싶어도 요역徭役이 그치지 않고 백성들이 쇠약해졌는데도 과도한 공사가 그치지 않습니다.
국가의 쇠퇴가 항상 이로 말미암아 비롯되니,
注+항恒은 호胡와 등登의 반절이니, 항상이라는 뜻이다. 이것으로 말한다면
수성守成이 더 어렵습니다.”
“방현령은 과거에 나를 따라 천하를 평정하였으므로 고생을 겪고 누차 죽을 고비를 벗어나 한 번 살 길을 만났으니 창업의 어려움을 아는 까닭이요, 위징魏徵은 나와 함께 천하를 안정시켰으므로 교만 방자의 실마리가 생겨서 반드시 위망의 처지에 이를까 우려하니 수성의 어려움을 아는 까닭이오.
현재 창업의 어려움은 이미 지나갔으니
수성守成의 어려움을 마땅히 공들과 신중히 대응해야 할 것이오.”
注+살펴보면 《자치통감資治通鑑》 정관貞觀 12년(638)에 또 말하였다. “방현령房玄齡 등이 절하면서 ‘폐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은 사해四海의 복입니다.’라고 하였다.”
“예부터 창업創業하여 잘못된 이는 적고 수성守成하여 잘못된 이는 많았다.
주공周公이 말하기를 ‘소인小人을 살펴보면 부모가 농사에 애쓰는데도 아들은 농사의 어려움을 모른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화란禍亂은 안일함에서 나오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나 창업한 임금이 수성守成하는 것이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라 그 후사가 수성守成하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다.”
“창업創業의 어려움은 비록 용렬한 사람이라도 그런 이치를 알지만 수성守成의 어려움은 비록 명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소홀히 여긴다.
주周나라 선왕宣王은 6월에 군사를 출동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았으나 말년에는 뜰에 횃불을 놓아 새벽 일찍 조회를 보는 것을 어렵게 여겼고, 한漢나라 고제高帝(劉邦)는 계획을 좋아하고 듣기를 잘하여 간언을 따르기를 둥근 물건을 굴리듯 쉽게 하였으나 말년에는 태자太子를 바꾸려고 하여 말을 듣는 것을 매우 어렵게 여겼다.
그러므로 한漢나라 문제文帝 시대에는 가의賈誼가 쌓아놓은 나무 밑에 불을 놓아둔 것 같이 위태롭다는 말을 하였고, 태종太宗 시대에는 위징魏徵이 안일함 때문에 잘못된다는 경계를 하였다.”
“태종太宗의 질문은 화복禍福의 기틀이고, 방현령房玄齡‧위징魏徵의 대답은 다시 본말本末이 된다.
만일 창업이 쉽다고 말한다면 태종은 몸소 그 어려움을 겪었으니 이는 속일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수성이 쉽다고 말한다면 태종은 반드시 ‘어려움을 내가 오히려 몸소 구제하였다.’라고 하여 나태한 마음이 홀연히 일어날 것이다.
태종이 두 명 신하의 뜻을 알아차리고 수성의 어려움에 더욱 신중하였으니 명철하구나.”
내가 살펴보건대 예부터 임금 중에 창업創業과 수성守成을 몸소 겸한 이는 적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과 한漢나라 고조高祖는 창업한 사람이지만 수성에는 미치지 못하였고, 주周나라 성왕成王‧강왕康王과 한漢나라 문제文帝‧경제景帝는 수성한 사람이지만 창업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신우神禹(禹의 존칭尊稱)는 재위 기간이 10년이었고, 성탕成湯은 재위 기간이 13년이었으니, 창업과 수성의 일을 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서경書經》 〈하서夏書 우공禹貢〉으로 살펴보면 우禹임금은 물을 다스리며 땅을 구획하는 일을 어려워하지 않고 근본이 견고해야 나라가 편안한 일을 어려워하였으며, 탕湯임금은 이陑로부터 올라가 걸왕桀王을 정벌하는 일을 어려워하지 않고 이에 성실하게 해야 또한 잘 끝맺을 수 있는 일을 어려워하였으니, 어찌 창업이 과연 쉬운 일이며 수성이 과연 어려운 일이겠는가.
창업은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지만 덕德을 진취시킬 수 있고, 수성은 순리를 따르는 일이지만 덕德을 잃기 쉽다.
태종太宗은 자신이 창업과 수성의 일을 겸하여 이미 이룬 것을 스스로 만족해하지 않고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을 두려워하였으니 정관貞觀의 치적을 이룬 것이 마땅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