昔啓人
注+① 昔啓人:本突厥啓民可汗, 避太宗諱改曰人.亡國來奔
이어늘 隋文帝不恡粟帛
하고 大興士衆
하여 營衛安置
하여 乃得存立
이러니
旣而彊富
에 子孫不思念報德
하고 纔至
하여 注+② 卽起兵圍煬帝於鴈門:鴈門, 今爲代州, 隸.이러니
及隋國亂
에 又恃彊深入
하여 遂使昔安立其國家者
로 身及子孫
히 竝爲
破亡
하니 豈非背恩忘義所至也
리오
注
【集論】愚按 三代之待夷狄也에 來者不拒하고 去者不追하니 蓋不以中國之治治之也라
文王之伐玁狁에 止於城彼朔方而已요 宣王之伐淮夷에 止於徐方來庭而已니 曷嘗盡欲郡縣其地而臣妾其人哉아
後世不明華夷之辨하여 務爲懷遠之圖하니 適以自遺患而已矣라
故漢宣扶立
이로되 而建武多北邊之擾
하고 隋文撫存啓民
이로되 而煬帝有鴈門之圍
하니 由不能以三代爲法故也
니 可不戒哉
아
정관貞觀 5년(631)에 태종太宗이 근신近臣들에게 말하였다. “천도天道가 선한 자에게 복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 화를 내리는 것은 그 일이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은 법이오.
옛날에
계민가한啓民可汗이
注+〈계인啓人은〉 본래 돌궐突厥의 계민가한啓民可汗인데, 태종의 휘諱인 〈‘민民’을〉 피하여 ‘인人’으로 고쳤다. 나라가 망하자
수隋나라로 망명하였는데,
수 문제隋 文帝가 곡식과 비단을 아끼지 않고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군영에서 안전하게 지켜주어서 존립할 수 있었소.
그런데 부강해지고 나자 그 자손들은
수隋나라의 은덕에 보답할 생각을 하지 않고, 조금 뒤
시필가한始畢可汗 때에 이르러 병사를 일으켜
수 양제隋 煬帝를
안문鴈門에서 포위하였소.
注+안문鴈門은 지금의 대주代州이니, 복리腹裏에 속한다.
수隋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또 병력의 강성함을 믿고 수隋나라 안으로 깊숙이 쳐들어와서 마침내 과거에 자신의 나라를 안정시켜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당사자와 자손까지 모두 힐리가한頡利可汗에게 패망을 당하게 하였으니, 어찌 은혜와 의리를 저버려서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니겠소.”
그러자 신하들이 모두 “진실로 폐하의 말씀과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注
내가 살펴보건대 삼대시대三代時代에 이적夷狄을 다룰 때에는 귀의하는 자들을 막지 않고, 떠나가는 자들을 쫓지 않았으니, 이는 중원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그들을 다스린 것이 아니다.
문왕文王이 험윤玁狁을 정벌하였을 때에는 저 북방에 성을 쌓는 데 그쳤고, 선왕宣王이 회이淮夷를 정벌했을 때에는 서徐나라가 조공을 바치는 데 그쳤으니, 어찌 모두 그들의 영토에 군현郡縣을 설치하고, 그 사람들을 신첩臣妾으로 만들려고 한 적이 있었던가.
후세에는 중원과 오랑캐의 구분을 명확히 하지 않아, 힘써 먼 나라를 무마하는 계획을 하였으니, 다만 절로 근심거리만 남겼을 뿐이다.
그러므로 한 선제漢 宣帝가 흉노匈奴의 호한야呼韓邪를 도와주었으나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연간(25~26)에 북방에 소란이 많았고, 수 문제隋 文帝는 계민가한啓民可汗을 잘 돌봐주었지만 수 양제隋 煬帝가 안문鴈門에서 포위당하는 일이 있었다. 이는 모두 삼대三代를 본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