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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3)

정관정요집론(3)

범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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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집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貞觀初 太宗謂侍臣曰 婦人幽閉深宮하니 情實可愍이라
隋氏末年 求採無已하여 至於離宮別館 非幸御之所 多聚宮人하니 此皆竭人財力이니 朕所不取 且灑掃之餘 更何所用이리오
今將出之하여 任求伉儷注+① 任求伉儷:上, 音抗, 敵也. 下, 音麗, 耦也.하니 非獨以省費 兼以息人이며 亦各得遂其情性이라하다
於是 後宮及掖庭前後所出 三千餘人注+② 貞觀初……三千餘人:按通鑑 “貞觀二年九月, 天少雨, 中書舍人李百藥上言 ‘往年雖出宮人, 竊聞太上皇宮及掖庭宮人無用者尙多, 豈惟虛費衣食, 且陰氣鬱積, 亦足致旱.’ 上曰 ‘云云’ 於是遣尙書左丞戴冑給事中杜正倫, 於掖庭西門簡出之, 前後所出三千餘人.”이러라
【集論】孫氏甫曰 隋煬荒虐 自古無比하니 强取良家女하여 置後宮者 固無其數
하니 此得美事之一節이라 及受禪하여는 安然有其後宮이어든 欲不荒恣 得乎
賴聖子承之하여 立矯其過하고 計出三千之衆하니 使天下聳動하고
尹氏起莘曰 按禮컨대 然未聞千百其數也
昔晉武平吳之後 이러니 遂殞其軀하고 而亡其國이라
今太宗卽位하여 首放宮女三千餘人하니 可謂盛德之事 遂使後人으로 流之歌詠 不一而足也
愚按 仁哉 太宗之心也 玆事不見於武德之初하고 而見於貞觀之初
論者謂聖子承統하여 行父之所未能行하니 誠可謂仁已
然司晉陽之管鑰하여 遂犯分於宮闈하니 有天下之後 安其後宮 猶晉陽之心也
昔漢祖入秦宮室하여 能無所幸識者 知其智不在小하여 奄奠區宇하니 規摹宏遠矣 非唐祖所及也 太宗其殆庶幾乎인저


정관貞觀 초기에 태종太宗근신近臣에게 말하였다. “여인들이 깊은 궁궐에 갇혀 있으니, 정리상 실로 가엾구려.
나라 말년에 미녀들을 찾아서 뽑은 것이 한정이 없어서 이궁離宮이나 별관別館의 행차하지 않는 곳까지 궁인들을 많이 모았소. 이것은 모두 백성들의 재력을 소모시키는 것이니, 은 취하지 않을 것이요. 게다가 궁녀들은 청소를 하는 것 이외에 또한 무슨 소용이 있겠소.
이제 그들을 궁 밖으로 내보내어 배우자를 마음대로 구하게 하려고 하오.注+위의 자는 이니, 대등하다는 뜻이다. 아래의 자는 이니 짝이다. 이것은 비용을 절약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울러 백성을 쉬게 하는 것이며, 또한 각기 그 인정과 본성을 이루게 하는 것이오.”
이에 후궁後宮액정掖庭의 궁녀들 중에 전후로 나간 자가 3,000여 명이었다.注+살펴보면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정관貞觀 2년 9월에 하늘에서 비가 적게 내리자 중서사인中書舍人 이백약李百藥이 글을 올렸다. ‘지난해에 궁인들을 내보냈으나 가만히 들으니 태상황궁太上皇宮액정궁掖庭宮의 소용없는 궁인들이 아직도 많다고 합니다. 어찌 의식만을 허비할 뿐이겠습니까. 장차 음기가 쌓여 또한 가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 이에 상서좌승尙書左丞 대주戴冑급사중給事中 두정륜杜正倫을 보내서 액정궁掖庭宮 서문西門에서 궁녀들을 선별하여 내보내니, 전후로 나간 사람이 3,000여 명이었다.”
손보孫甫가 말하였다. “수 양제隋 煬帝는 포학함이 예부터 비교할 자가 없어서, 강제로 양가良家의 여식을 취하여 후궁에 둔 자가 진실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고조高祖가 처음에 관중關中에 들어가서 이궁離宮의 사람들을 내보내고 친속親屬에게 돌아가게 하였으니, 이것은 아름다운 일의 한 가지이다. 선양을 받아 황제가 되어서는 태연하게 그 후궁들을 소유하였다면 주색에 빠지지 않으려 해도 되겠는가.
다행히 성자聖子(태종太宗)가 황제를 계승하여 즉시 그 과실을 바로잡고 3천 명을 헤아려 내보냈으니, 천하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나라의 성대한 덕을 노래하게 하였다.”
윤기신尹起莘이 말하였다. “《예기禮記》 〈혼의昏義〉를 살펴보면, 천자天子를 세울 적에 진실로 6이 있고 3명의 부인夫人, 9명의 , 27명의 세부世婦, 81명의 어처御妻가 있었는데, 그 숫자가 수천 수백이라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옛날 진 무제晉 武帝나라를 평정한 후에 액정 궁녀가 거의 만 명이나 되었는데, 마침내 그 몸이 죽고 그 나라도 잃었다.
지금 태종太宗이 즉위하여 먼저 궁녀宮女 3,000여 명을 내보냈으니 성덕의 일이라고 말할 만하다. 마침내 뒷사람들이 노래하여 전파하게 한 것이 하나가 아니다.”
내가 살펴보건대, 하도다 태종太宗의 마음이여. 이 일이 무덕武德의 초기에는 보이지 않고 정관貞觀의 초기에 보인다.
논의하는 자는 성자聖子가 정통을 이어받아서 아버지가 미처 행하지 못한 것을 행하였으니, 진실로 하다고 말할 만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연李淵(당 고조唐 高祖)이〉 진양晉陽에서 빗장을 맡아보면서 마침내 궁궐을 범하니, 이는 도모하는 신하가 이를 이용해 압박하여 군사를 일으키게 한 것이다. 천하를 소유한 뒤에 후궁을 편안히 여긴 것은 진양에 있을 때의 마음과 같다.
옛날에 한 고조漢 高祖나라 궁실宮室에 들어가서 여자를 총애하지 않은 것은 그 지혜가 작은 데 있지 않아서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음을 알 수 있으니 규모가 원대하다. 당 고조가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태종은 여기에 가까울 것이다.


역주
역주1 高祖初入關……還親屬 : 이 사실은 《舊唐書》 〈高祖本紀〉에 高祖가 隋나라 궁중에 들어와서 “궁녀들을 풀어주어 친척에게 돌아가게 하였다.[宮女放 還親屬]”라고 한 것에서 확인된다.
역주2 歌詠唐之盛德 : 唐나라의 성대한 덕을 노래한 것에는 元結의 〈大唐中興頌〉 등이 있다.
역주3 天子立后……八十一禦妻矣 : 《禮記》 〈昏義〉에 보인다.
역주4 掖庭殆將萬人 : 晉 武帝는 본디 검소하였으나, 吳나라를 평정하여 삼국을 통일한 뒤에는 掖庭이 거의 1만 명이나 되고 총애하는 자도 매우 많았다. 《晉書 胡貴嬪傳》
역주5 謀臣因以迫之以興師也 : 晉陽宮監으로 있던 李淵의 아들 李世民이 晉陽副宮監 配寂과 공모하여 궁녀에게 이연을 시침하게 하고, 그날 밤에 군사를 정비하여 隋나라에 대항할 준비를 해놓고, 그 이튿날 이연에게 반기를 들지 않을 수 없게 한 일을 말한다.

정관정요집론(3)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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