然則得失成敗各有由焉이어늘 而著述之家가 多守常轍하여 莫不情忘今古하고 理蔽澆淳하여
欲以百王之季
로 行三代之法
하며 天下五服之內
에 盡封諸侯
注+ 天下五服之內 盡封諸侯:五服者, 甸侯綏要荒也. 虞夏制, 王城之外, 四面各五百里, 曰甸服, 甸服外又各五百里, 曰侯服. 侯服外又各五百里, 曰綏服. 綏服外又各五百里, 曰要服. 要服外又各五百里, 曰荒服. 周制乃分其五服爲九, 見周禮.하고 王畿千里之間
을 俱爲采地
注+ 王畿千里之間 俱爲采地:周制, 天子畿內之地, 方千里. 詩曰, 邦畿千里, 是也. 采地者, 天子之卿大夫邑地也.하니이다
是則以結繩之化
로 行虞夏之朝
注+ 是則以結繩之化 行虞夏之朝:易大傳曰 “上古結繩而治, 後世聖人易之以書契.” 此言雖虞夏之時, 已不可行上古之法也.며 用
之典
하여 治劉曹之末
注+ 用象刑之典 治劉曹之末:虞書曰 “象以典刑.” 象如天之垂象以示人, 而典者常也. 劉, 漢之姓, 曹, 魏之姓, 言漢魏之時, 又豈可以帝世之法而爲治也.이니
鍥船求劍
은 未見其可
注+ 鍥船求劍 未見其可:鍥, 音刻. 呂氏春秋曰 “楚人有涉江, 其劍自舟中墜於水, 遂刻其舟曰 ‘是吾劍所從水也.’ 舟已行, 而劍不行, 若此求劍, 而不其惑乎.”요 膠柱成文
은 彌多所惑
注+ 膠柱成文 彌多所惑:揚子曰 “以往聖之法治將來, 譬猶膠柱而調瑟.”이라
徒知問鼎請
에 有懼霸王之師
注+ 徒知問鼎請隧 有懼霸王之師:左傳宣公三年, 楚子觀兵于周疆, 定王使王孫滿勞之. 楚子問鼎之大小輕重, 對曰 “在德不在鼎.” 僖公二十五年, 晉侯朝王, 王享之, 請隧, 弗許曰 “王章也, 未有代德而有二王, 亦叔父之所惡也.”하고 白馬素車
에 無復藩維之援
注+ 白馬素車 無復藩維之援:漢高祖初至霸上, 使人約降, 秦王子嬰繫頸以組, 白馬素車, 奉天子璽符詣軹道旁而降.이오
不悟望夷之釁
注+ 不悟望夷之釁:秦相趙高弑二世望夷宮.하고 未堪羿浞之災
注+ 未堪羿浞之災:羿, 音刈. 浞, 音捉. 夏帝相旣立, 后羿有窮氏篡位, 帝相徙商丘, 羿耽于畋獵, 信用寒浞, 浞後殺羿自立, 因羿之室生子奡(오), 奡弑帝相. 夏之貴臣殺浞後滅奡, 立帝相子, 是爲少康.하니
旣罹高貴之殃
注+ 旣罹高貴之殃:罹, 音離. 魏高貴鄕公, 名髦, 文帝之孫, 嗣明帝位六年, 司馬昭擅政, 遂勒兵誅昭而敗, 爲昭黨所弑.이 寧異申繒之酷
注+ 寧異申繒之酷:周幽王嬖褒姒而廢申后, 立褒姒之子伯服而黜太子, 申侯怒, 與繒及犬戎殺王驪山下.이리오
此乃欽明昏亂이 自革安危요 固非守宰公侯가 以成興廢라
且數世之後
에 王室浸微
하면 始自藩屛
注+ 始自藩屛:屛, 音餅. 詩曰 “价人維藩, 大邦爲屛.”으로 化爲仇敵
하니
家殊俗하고 國異政하며 强陵弱하고 衆暴寡하여 疆場彼此에 干戈侵伐이라
狐駘之役
에 女子盡髽
注+ 女子盡髽:髽, 莊華切. 髽, 麻髮合結也. 左傳襄公四年, 邾人莒人伐鄫, 臧紇救鄫侵邾, 敗于狐駘, 國人逆喪者皆髽, 魯於是乎髽. 禮記曰 “魯婦人髽而弔.”하고 崤陵之師
에 隻輪不反
注+ 崤陵之師 隻輪不反:公羊傳僖公二十二年 “晉人及姜戎敗秦師于殽, 匹馬隻輪無反者.”하니
斯蓋略擧一隅
요 其餘不可勝數
注+ 其餘不可勝數:勝, 平聲. 數, 上聲.라
陸士衡
注+ 陸士衡:名機, 晉吳郡人. 以聖王經國, 義在封建, 著五等諸侯論.이 方規規然云 嗣王
이 委其九鼎
하고 凶族
이 據其天邑
注+ 嗣王委其九鼎 凶族據其天邑嗣王:嗣王, 謂周惠王襄王悼王也. 委九鼎, 謂三王棄國出奔也. 凶族, 謂王子頹王子帶王子朝也. 據天邑, 謂三子據國僭位也.이나 天下晏然
하여 以治待亂
이라하니 何斯言之謬也
오
而設官分職
하고 任賢使能
하여 以循良之才
로 하니 이 何世無人
注+ 刺擧分竹 何世無人:漢文帝初與郡守爲, 當發兵, 遣使者至郡, 合符乃聽受之, 以代古之圭璋, 分竹亦其義也.이리오
至使地或呈祥
하고 天不愛寶
注+ 至使地或呈祥 天不愛寶:前漢黃霸爲潁川太守, 政化大行, 嘉禾生, 鳳凰集. 後漢秦彭爲潁川太守, 有甘露嘉禾鳳麟之瑞.하며 民稱父母
注+ 民稱父母:父母, 讀曰甫牡. 前漢邵信臣爲河南太守, 視民如子, 號曰邵父. 後漢杜詩爲南陽太守, 爲政淸平, 民爲之語曰 “前有邵父, 後有杜母.”하고 政比神明
注+ 政比神明:後漢孟嘗爲合浦太守, 郡産珠, 先守多貪珠, 徙交趾, 人物無資. 嘗至, 革前弊, 去珠復還, 百姓反業, 謂爲神明.하리이다
曹元首
注+ 曹元首:魏人, 上六代論, 感悟曹爽.方區區然稱
호대 與人共其樂者注+ 方區區然稱 與人共其樂者:樂, 音洛. 後同.는 人必憂其憂
하고 與人同其安者
는 人必拯其危
라하니
豈容以爲侯伯인댄 則同其安危하며 任之牧宰인댄 則殊其憂樂고 何斯言之妄也오
그렇다면 득실과 성패에는 각기 원인이 있는 법인데, 저술을 하는 자들이 대부분 옛 법만을 고집하여 마음에 옛날과 지금의 정황을 잊어버리고 도리에 경박함과 순박함을 혼동하지 않는 이가 없어,
모든 왕조의 말기에
삼대三代의 법을 시행하고 천하의
오복五服 내에는 모두 제후들을 봉해주고
注+오복五服은 전복甸服‧후복侯服‧수복綏服‧요복要服‧황복荒服이다. 우虞‧하夏의 제도는 왕성王城의 외곽에 사방으로 각 500리가 전복甸服이고, 전복甸服 외곽에 또 각 500리가 후복侯服이며, 후복侯服 외곽에 또 각 500리가 수복綏服이며, 수복綏服 외곽에 또 각 500리가 요복要服이며, 요복要服 외곽에 또 각 500리가 황복荒服이다. 주周나라 제도는 오복五服을 나누어 구복九服으로 하였으니, 《주례周禮》에 보인다. 왕기王畿 천 리 지역을
경대부卿大夫의 식읍으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注+주周나라 제도는 천자天子의 기내畿內 영역이 사방 천 리이니, 《시경詩經》 〈상송商頌 현조玄鳥〉에 “방기천리邦畿千里”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채지采地는 천자天子의 경대부卿大夫가 소유한 읍지邑地이다.
이는 노끈의 매듭에 의한 정치의 교화를
우禹 왕조와
하夏 왕조에 시행하려는 것이며
注+《역대전易大傳》 〈계사전繫辭傳 하下〉에 이르기를 “상고시대에는 결승結繩으로 다스렸는데, 후세에 성인이 서계書契로 바꾸었다.”라고 하였다. 이는 비록 우虞‧하夏의 때라 하더라도 이미 상고시대의 법을 시행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상형象刑에 의한 법을 써서
한漢나라와
위魏나라 말기를 다스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注+《서경書經》 〈우서虞書 순전舜典〉에 “떳떳한 형벌을 보였다.”라고 하였으니, 상象은 하늘이 상象을 드리워 사람에게 보이는 것과 같고, 전典은 일정함이다. 유劉는 한漢나라의 성姓이고, 조曹는 위魏나라의 성姓이니, 한漢‧위魏의 시대에 또 어찌 순제舜帝 시대의 법을 가지고 다스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한다면 기강이 느슨해지고 문란해질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으니,
배에 새겨놓은 표식으로 물에 빠뜨린 검을 찾으면 일을 이룰 수 없고
注+계鍥(새기다)은 음이 각刻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찰금察今〉에 이르기를 “초인楚人 중에 장강長江을 건너는 사람이 있었는데, 자신의 검이 배에서 물속으로 떨어지자, 드디어 그 배에 표시를 하며 말하기를, ‘여기는 내 검이 물에 빠진 지점이다.’라고 하였다. 배는 이동을 하고 검은 움직이지 않았으니, 이와 같이 하여 검을 찾는다면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거문고 기러기발에 아교풀을 발라 고정시켜 놓고 음악을 연주하면 더욱 미혹되는 것이 많아지는 법입니다.
注+양자揚子(양웅揚雄)가 말하기를 “지나간 성인의 법으로 장래를 다스리는 것은 비유하자면 아교로 기러기발을 고정시키고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다만
초 장왕楚 莊王이 솥의 무게를 묻고
진 문공晉 文公이
수도隧道를 청한 데에서
패왕霸王의 군대를 두려워했고
注+《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선공宣公 3년에, 초자楚子(초 장왕楚 莊王)가 주周나라의 경계 지역에서 관병식觀兵式을 하였는데, 정왕定王이 왕손 만王孫 滿을 보내어 노고를 치하하도록 하였다. 초자楚子가 구정九鼎의 크기와 무게에 대하여 묻자 대답하기를 “천자가 되는 것은 덕에 있는 것이지 구정九鼎에 있지 않다.”라고 하였다. 희공僖公 25년에 진후晉侯(진 문공晉 文公)가 왕王에게 조회를 하자 왕이 연회를 베풀었는데, 수隧를 청하였다. 그러자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천자의 법도이니 덕을 대신함이 있지 않고서 두 명의 왕이 있는 것은 역시 숙부叔父(동성同姓 제후諸侯인 진 문공)도 싫어하는 일일 것이오.”라고 하였다., 흰 말과 흰 수레로 투항한 데에서 제후의 구원이 없었음을 알 뿐
注+한 고조漢 高祖가 처음 패상霸上에 이르러 사람들에게 투항하도록 약속하니, 진왕秦王 자영子嬰이 인끈을 목에 매고 흰 말과 흰 수레로 천자의 옥새와 부절을 받들고 지도軹道 곁에 이르러 항복하였다.,
이세황제二世皇帝가
망이궁望夷宮에서 죽은 일을 깨닫지 못하고
注+진秦나라 승상 조고趙高가 이세황제二世皇帝를 망이궁望夷宮에서 시해하였다. 예羿와
착浞의 재앙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注+예羿(사람 이름)는 음이 예刈이다. 착浞(젖다)은 음이 착捉이다. 하夏나라의 제상帝相이 왕위에 오르고 난 뒤 유궁씨有窮氏 후예后羿가 왕위를 찬탈하자 제상帝相은 상구商丘로 달아났다. 예羿가 사냥에 빠져 한착寒浞을 믿자 한착寒浞은 예羿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며, 예羿의 아내를 맞아들여 아들 오奡를 낳았는데, 오奡가 제상帝相을 시해하였다. 하夏의 귀척대신들이 한착寒浞을 죽인 뒤에 오奡를 제거하고 제상帝相의 아들을 세우니 바로 소강少康이다.
이미
고귀향공高貴鄕公의 재앙을 만난 것이
注+이罹(만나다)는 음이 이離이다. 위魏나라 고귀향공高貴鄕公은 이름이 모髦이니, 문제文帝의 손자이다. 명제明帝를 이어 6년 동안 제위에 있었는데, 사마소司馬昭가 정권을 독단하였다. 결국 군사를 일으켜 사마소司馬昭를 주살하려고 하다가 패하여 사마소司馬昭의 부하에게 죽임을 당했다. 어찌
신후申侯와
증후繒侯가
유왕幽王을 죽인 잔혹한 일과 다르겠습니까.
注+주 유왕周 幽王이 포사褒姒를 총애하여 신후申后를 폐위시키고, 포사褒姒의 아들인 백복伯服을 총애하여 태자太子를 내쫓자 신후申侯가 노하여 증繒‧견융犬戎과 함께 여산驪山 아래에서 유왕幽王을 죽였다.
이는 바로 명철한 군주이건 혼란한 군주이건 스스로 안위安危를 변화시키는 것이지 진실로 수재守宰와 공후公侯가 흥망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또 몇 세대가 지난 후에 왕실이 쇠퇴해지면 비로소 제후국에서
注+병屛(가리다)는 음이 병餅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판板〉에 이르기를 “갑옷 입은 병사는 나라의 울타리가 되고, 제후들은 나라의 수호자가 된다.”라고 하였다. 원수의 나라로 바뀌게 됩니다.
집집마다 각기 풍속이 다르고 나라마다 정치가 다르며, 강대한 자가 약소한 자를 침범하고, 수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가 적은 자에게 해를 끼치며 국경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일어납니다.
호태狐駘의 전쟁 패배로 여자들은 모두 복머리를 하였으며
注+좌髽(복머리)는 장莊과 화華의 반절이다. 좌髽는 삼실로 머리카락을 묶는 것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4년에, 주邾나라와 거莒나라가 증鄫나라를 정벌하였는데, 노魯나라의 장흘臧紇이 증鄫나라를 구원하려고 주邾나라를 침입했지만 호태狐駘에서 패배하였다. 전사자의 시체를 맞아들이는 노나라 사람들은 복머리를 하였다. 노나라에서는 이때에 비로소 상례에 복머리를 하게 되었다. 《예기禮記》 〈단궁檀弓 상上〉에 이르기를 “노魯나라 부인이 복머리를 하고 조문하였다.”라고 하였다.,
효릉崤陵의 전쟁에서
진秦나라 군대는 수레 한 대도 되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注+《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희공僖公 22년에 “진晉나라와 강융姜戎이 효殽에서 진秦나라 군사를 물리쳤는데, 말 한 필, 수레 한 대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이는 한 부분을 들어 대략 말하는 것이고, 그 나머지는 다 셀 수 없습니다.
注+승勝(견디다)은 평성平聲이고, 수數(헤아리다)는 상성上聲이다.
육사형陸士衡은
注+이름은 기機이며, 진晉나라 오군吳郡 사람이다. 성왕聖王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뜻은 봉건封建에 있었다. 《오등제후론五等諸侯論》을 저술하였다. 천박하게 말하기를, ‘계승한 왕(
혜왕惠王,
양왕襄王,
도왕悼王)이
구정九鼎을 버리고
흉족凶族(
왕자王子 퇴頹,
왕자王子 대帶,
왕자王子 조朝)이 도읍을 점거하였으나
注+사왕嗣王은 주周나라의 혜왕惠王, 양왕襄王, 도왕悼王을 말한다. 구정九鼎을 버렸다는 것은 삼왕三王이 나라를 버리고 망명한 것을 말한다. 흉족凶族은 왕자王子 퇴頹, 왕자王子 대帶, 왕자王子 조朝를 말한다. 천읍天邑을 점거했다는 것은 삼자三子가 국도國都를 점유하고 왕위를 범한 것을 말한다. 천하는 안정되어
치세治世로
난세亂世를 대비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 얼마나 잘못된 말입니까.
관청을 설치하여 직책을 나누고 현인과 능력 있는 사람을 임용하여 어진 인재로 임금과 함께 다스릴 지방관으로 삼아야 하니
자사刺史와
군수郡守가 될 만한 인물이 어느 시대인들 없겠습니까.
注+한 문제漢 文帝는 처음에 군수郡守와 동호부銅虎符를 만들어 출병할 때가 되면 사자를 군으로 보내어 부절을 맞추어보고서야 명을 받게 하였다. 옛날의 규장圭璋을 대신한 것이니, 분죽分竹 역시 같은 의미이다.
땅이 때로 상서로움을 보이고 하늘은 보물을 아끼지 않고 내려주며
注+전한前漢의 황패黃霸가 영천태수潁川太守가 되었을 때 정치의 교화가 크게 펴졌는데, 큰 벼이삭이 생산되고 봉황이 모였다. 후한後漢의 진팽秦彭이 영천태수潁川太守가 되었을 때 감로수甘露水와 큰 벼이삭과 봉황과 기린의 상서로움이 있었다. 백성들이 태수를 부모라 칭하고
注+부모父母는 보모甫牡라고 읽는다. 전한前漢의 소신신邵信臣이 하남태수河南太守가 되었을 때, 백성들을 자식처럼 보살피자 소부邵父라고 하였다. 후한後漢의 두시杜詩가 남양태수南陽太守가 되었을 때 정치를 깨끗하고 공평하게 하자 백성들이 말하기를 “이전에는 소부邵父가 있었는데, 뒤에는 두모杜母가 있구나.”라고 하였다. 정치는
신명神明에 비하게 될 것입니다.
注+후한後漢의 맹상孟嘗이 합포태수合浦太守가 되었을 때, 군에서 진주가 생산되었는데, 전임 태수들이 대부분 진주를 탐내자 진주 생산이 교지交趾로 옮겨 가서 백성들이 살지 못하게 되었다. 맹상孟嘗이 이르러 이전의 폐단을 바로잡으니, 생산되지 않던 구슬이 다시 나기 시작했다. 백성들이 다시 생업에 돌아오게 되어 신명神明하다고 말했다.
조원수曹元首는
注+조원수曹元首는 위魏나라 사람으로 〈육대론六代論〉을 올려서, 조상曹爽이 느껴 깨닫게 하였다. 잗달게 말하기를 ‘타인과 더불어 즐거움을 함께하는 자는
注+낙樂(즐겁다)은 음이 낙洛이다. 뒤에도 같다. 반드시 그 근심을 근심하고 타인과 더불어 편안함을 함께하는 자는 반드시 그 위험을 도와서 구해준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후백侯伯(제후)으로 삼아주면 그 편안함과 위태로움을 같이할 것이며, 목재牧宰(군현의 장)로 임용하면 그 근심과 즐거움을 달리하겠습니까. 이 얼마나 경망한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