宣嗣好儒하여 大猷行闡하여 嗟被尤於德敎하고 美發言於忠謇하며
始聞道於匡韋
나 終獲戾於恭顯
注+ 宣嗣好儒……終獲戾於恭顯:好, 去聲. 宣嗣, 漢元帝也, 名奭, 好儒術文辭. 用韋玄成匡衡, 相繼爲丞相, 多所嚮納. 復以弘恭石顯相繼擅權用事, 蕭望之京房賈捐之等, 皆以言顯短而死.하니이다
猶見重於通人
하여 當傳芳於前典
注+ 太孫雜藝……當傳芳於前典:漢成帝, 名驁, 字太孫, 元帝太子也. 定陶共王, 元帝庶子也. 成帝博好經書, 爲太子時, 帝急召之, 太子出龍樓門, 不敢絶馳道, 西至直城門, 得絶乃度, 還入作室門. 上遲之, 問其故, 以狀對, 帝悅, 乃詔太子得絶. 其後, 帝以定陶王有材藝, 欲立爲嗣, 賴侍中史丹輔助太子, 得無廢.하니이다
中興上嗣하고 明章濟濟하여 俱達時政하고 咸通經禮하여 極至情於敬愛하고 惇友于於兄弟니이다
是以固東海之遺堂
하고 因西周之繼體
注+ 中興上嗣……因西周之繼體:光武, 爲漢中興之君. 太子莊, 是爲明帝, 號顯宗. 明帝太子炟, 是爲章帝, 號肅宗. 東海王, 明帝之兄, 極相友愛. 史贊 “顯宗丕承, 業業兢兢, 危心恭德, 政察姦勝. 肅宗濟濟, 天性豈弟, 於穆后德, 諒惟淵體.”니이다
五官在魏
하여 無聞德音
이오 하고 且自悅於從禽
하니
雖才高而學富
나 竟取累於荒淫
注+ 五官在魏……竟取累於荒淫:累, 去聲. 魏文帝, 姓曹, 名丕. 初爲五官中郞將, 見袁熙妻甄氏, 美而悅之, 太祖爲之聘焉. 及受漢禪, 嘗出射雉, 謂群臣曰 “射雉樂哉.” 辛毗對曰 “於陛下甚樂, 於群臣甚苦.”이니이다
暨貽厥於明皇
하여 構崇基於三世
하여 得秦帝之奢侈
하고 亞漢武之才藝
하여 遂驅役於群臣
이나 亦無救於凋弊
注+ 暨貽厥於明皇……亦無救於凋弊:明皇, 名叡, 魏文帝太子也. 嗣帝位, 侍中劉曄稱之曰 “秦始皇漢孝武之儔, 才具微不及耳.” 景初元年, 起土山於芳林園, 使公卿群僚, 皆負土栽木於其上, 捕禽驅獸於其中, 群臣皆面目垢黑. 由是, 百姓凋弊, 四海分崩.니이다
中撫寬愛
하고 相表多奇
하여 重桃符而致惑
이나 納巨鹿之明規
하여 하여 擧要荒而見羈
注+ 中撫寬愛……擧要荒而見羈:相, 去聲. 要, 音腰. 晉武帝, 姓司馬, 名炎, 晉王昭之子也, 仕魏爲中撫軍. 桃符, 武帝弟齊王攸之小名也. 初晉王欲以攸爲世子, 何曾裴秀曰 “中撫軍聰明神武, 人望旣茂, 天表如此, 固非人臣之相也.” 晉王, 由是意定, 立炎爲世子, 嗣晉王位, 受魏禪, 國號晉.니이다
惠處東朝
에 察其遺跡
하면 在聖德其如初
하여 實御床之可惜
注+ 惠處東朝……實御床之可惜:處, 上聲. 晉惠帝, 名衷, 武帝第三子. 東朝, 爲太子時也. 是時, 朝野咸知太子昏愚, 不堪爲嗣. 尙書令衛瓘, 欲陳啓, 而未敢發. 會侍宴陵雲臺, 瓘陽醉跪帝前, 欲言而止者三, 因以手撫床曰 “此座可惜.”이니이다
安能奉其粢盛
하여 承此邦家
注+ 悼湣懷之云廢……承此邦家:粢, 音咨. 盛, 音成. 晉愍懷太子, 名遹, 惠帝長子也. 有令譽, 賈后忌之, 使閹官輩媚之爲非, 於是, 慢弛益彰, 賈后遂設計讒譖於帝, 廢爲庶人.리잇가
한 선제漢 宣帝의 후사後嗣(원제元帝 유석劉奭)는 유학儒學을 좋아하여, 위대한 계책이 천명 실행되어서, 덕교德敎에 우월하다는 찬탄을 듣고 충직한 말을 찬미했으며,
처음에
광형匡衡과
위현성韋玄成에게 도를 들었지만 결국
홍공弘恭과
석현石顯에게서 착오가 발생했습니다.
注+호好(좋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선사宣嗣는 한 원제漢 元帝를 가리키는데 이름이 석奭이고 유학儒學과 문장을 좋아했다. 위현성韋玄成과 광형匡衡을 연이어 승상으로 등용하여 그들의 건의를 많이 받아들였다. 뒤이어 홍공弘恭과 석현石顯이 승상을 계승하며 권력을 멋대로 부렸는데, 소망지蕭望之‧경방京房‧가연지賈捐之 등이 모두 석현石顯의 단점을 논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태손太孫(성제成帝 유오劉驁의 자字)은 이런저런 재능이 비록 정도공왕定陶共王과 차이가 있었지만 치도馳道를 가로질러 넘지 않는 것이 그나마 작은 선행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현자들에게 중시를 받아 지난 전적에 훌륭한 명성이 전해옵니다.
注+한 성제漢 成帝는 이름이 오驁이고 자字가 태손太孫이며 원제元帝의 태자太子이다. 정도공왕定陶共王은 원제元帝의 서자庶子이다. 한 성제가 경전을 널리 좋아하였는데 태자太子였을 때 원제元帝가 급히 부르자, 태자太子가 용루문龍樓門을 나서며 감히 치도馳道를 가로지르지 못하고 서쪽 직성문直城門에 이르러서야 가로질러 건너서 다시 작실문作室門으로 들어왔다. 원제元帝가 늦었다고 하며 그 까닭을 묻기에 사실대로 답하자, 원제元帝가 좋아하며, 태자太子에게 치도馳道를 가로질러 걸을 수 있게 했다. 그 뒤에 원제元帝가 정도공왕이 재능과 학예가 있다는 이유로 후계로 삼으려 했으나, 시중侍中 사단史丹이 태자를 잘 보좌한 데 힘입어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게 되었다.
중흥中興(동한東漢 광무제光武帝)이 윗 시대를 계승하고 명제明帝(유장劉庄)와 장제章帝(유달劉炟)가 단정하고 장엄하여 당시의 정사에 모두 통달하고, 경전과 예의를 모두 깨쳐서, 공경과 사랑에 극진한 정을 다 드러내고, 형제에게 돈독한 우애를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동해왕東海王(
유강劉疆)이 남긴 집안을 견고하게 하고
서주西周의
왕위王位 계승 체계를 따랐습니다.
注+광무光武는 한漢나라 중흥中興의 군주이다. 당시의 태자太子 장莊이 명제明帝이며 제호帝號는 현종顯宗이다. 명제明帝의 태자太子 달炟이 장제章帝이며 제호帝號는 숙종肅宗이다. 동해왕東海王은 명제明帝의 형인데 우애가 서로 극진했다. 사서史書에서는 다음과 같이 찬양했다. “현종顯宗이 크게 계승하여, 조심하고 삼가며, 마음을 다잡고 공손한 덕을 갖추고, 한편으로 간사한 무리들을 잘 찾아냈다. 숙종肅宗은 단정하고, 천성天性이 온화했으며, 깊고 화목한 제왕의 덕을 참으로 깊이 체득하였다.”
오관五官(
조비曹丕)이
위魏나라에 있을 때 덕행에 대한 소문은 없었고,
달기妲己 같은 여인을 황후로 삼을까 비난받고, 스스로 사냥 나가는 것을 즐겼습니다.
魏 文帝 曹丕
비록 재능이 높고 학문이 풍부했지만 결국 황폐하고 음탕함에 결점이 있었습니다.
注+누累(얽매이다)는 거성去聲이다. 위 문제魏 文帝는 성姓이 조曹이고 이름이 비丕이다. 애초 오관중랑장五官中郞將이었을 때 원희袁熙의 처妻 견씨甄氏를 보고 아름답게 여겨 좋아했는데 태조太祖가 그를 위해 장가들게 했다. 한漢나라로부터 제위帝位를 물려받고 나서 일찍이 꿩 사냥을 나갔는데, 뭇 신하들에게 “꿩 사냥이 즐겁구나!”라고 하자, 신비辛毗가 대답하기를 “폐하에겐 매우 기쁜 일이시겠지만 신들에겐 대단히 괴롭습니다.”라고 했다.
명제明帝(
조예曹叡)에게 물려주고 나자 큰 건축물을 3
대代에 걸쳐 구축하여,
진 시황秦 始皇의 사치를 갖추고
한 무제漢 武帝보다 나은
재예才藝를 가지고서 결국 뭇 신하들을 휘몰아 부렸지만, 또한 찌든 폐해를 구제할 수 없었습니다.
注+명황明皇은 이름이 예叡이며 위 문제魏 文帝의 태자太子이다. 제위를 물려받고 나서 시중侍中 유엽劉曄이 칭찬하기를 “진시황秦始皇과 한 무제漢 武帝 정도는 그 재능이 모두 적어서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경초景初 원년元年(237)에 방림원芳林園에 토산土山을 만들면서 공경公卿과 뭇 신료들에게 그 위에서 흙을 짊어지고 나무를 심도록 하고 그 안에서 동물을 사냥하고 몰이를 하게 해서 신하들의 얼굴이 모두 검게 변했다. 이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피폐해졌고 세상이 갈기갈기 찢겼다.
중무中撫(
사마염司馬炎)가 관대하고 사랑스러웠으며 겉모습이 기괴해서
도부桃符(
사마유司馬攸)를 중시하면서 의혹을 샀지만
거록巨鹿(
배수裵秀)의 현명한 충고를 받아들여 결국
강표江表(
장강長江 이남의
손오孫吳)의 악한 기운을 말끔히 씻어 외지고 먼 곳까지도 제어를 했습니다.
注+상相(관상, 외형)은 거성去聲이다. 요要(요복要服, 수도로부터 100리 거리에 있는 땅)는 음音이 요腰이다. 진 무제晉 武帝는 성姓이 사마司馬이고 이름이 염炎이다. 진왕晉王 소昭의 아들이다. 위魏나라에 벼슬하여 중무군中撫軍을 역임했다. 도부桃符는 진 무제晉 武帝의 아우 제왕齊王 사마유司馬攸의 아명이다. 애초에 진왕晉王이 사마유司馬攸를 세자世子로 삼으려 하자 하증何曾과 배수裴秀가 말하기를 “중무군中撫軍은 총명과 신묘한 무예를 갖추어 사람들의 기대가 이미 큽니다. 타고난 바탕이 이러하다면 본디 신하의 관상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진왕晉王이 그래서 마음을 정해 사마염司馬炎을 세자世子로 삼았고, 진왕晉王의 지위를 계승하고 나서, 위魏나라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은 뒤 국호를 진晉이라 했다.
혜제惠帝(
사마충司馬衷)가
동궁東宮으로 있을 때 그 자취를 살펴보면, 천자에의 품성이 처음
태자太子 때처럼 어리석어
제위帝位에 나가는 것이 실로 아까웠습니다.
注+처處(처하다, 머무르다)는 상성上聲이다. 진 혜제晉 惠帝는 이름이 충衷이며 무제武帝의 셋째 아들이다. 동조東朝는 태자太子로 있을 때이다. 당시 조정과 재야에서 모두 태자太子가 혼미하고 어리석어 후계감이 못된다고 여겼다. 상서령尙書令 위관衛瓘이 이 내용을 진언하려고 하다가 감히 발언하지 못했는데, 마침 능운대陵雲臺에서 연회가 열리자 관양瓘陽이 술에 취한 체하며 무제武帝의 앞에 무릎 꿇고 말을 하려다 그만두기를 세 번이나 하고 나서 손으로 좌상을 어루만지며, “이 자리가 아깝습니다.”라고 했다.
애달프게도 민회愍懷(사마휼司馬遹)가 폐위되어 강풍이 백사장에 몰아치는 불행을 당했습니다.
가지고 있는 성령性靈을 유희에 모두 쏟았고, 또한 스스로 흉악하고 사악한 데서 망치고 말았으니,
어떻게 그
자성粢盛(
제기祭器,
제물祭物)을 받들어 나라를 맡을 수 있겠습니까?
注+자粢(기장)는 음音이 자咨이며, 성盛(담은 그릇)은 음音이 성成이다. 진晉 민회태자愍懷太子는 이름이 휼遹이며 진 혜제晉 惠帝의 장자이다. 좋은 명성을 가지고 있자, 가후賈后가 그를 시기하여 환관들을 시켜 아첨 부려 비행을 저지르게 했고, 이에 의해 태만한 모습이 갈수록 드러나자, 가후賈后가 결국 계책을 꾸며 혜제惠帝에게 참소해서 서인庶人으로 폐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