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觀元年
에 太宗
이 嘗從容
注+ 嘗從容:從, 卽容切.言及隋亡之事
하고 慨然歎曰
不懼兵刃
하여 以明大節
하니 求諸古人
이라도 亦何以加也
리오
思廉
이 時在洛陽
이러니 因寄物三百段
하고 竝遺其書曰
注+ 竝遺其書曰:遺, 去聲.想卿忠節之風
이라 故有斯贈
이라하다
初
에 大業末
에 思廉
이 爲隋代王侑侍讀
注+ 爲隋代王侑侍讀:代王侑, 隋元德太子之子. 煬帝十三年, 南巡以侑留守長安, 高祖克長安, 立侑爲帝.이러니 及義旗剋京城時
에 代王府僚多駭散
이로되
惟思廉
이 侍王
하여 不離其側
注+ 不離其側:離, 去聲.이라
兵士將升殿
이어늘 思廉
이 厲聲謂曰 唐公
注+ 厲聲謂曰 唐公:高祖, 初封唐公.이 擧義兵
은 本匡王室
이어든 卿等
이 不宜無禮於王
이라한대
須臾에 高祖至하여 聞而義之하고 許其扶代王侑至順陽閤下하니 思廉이 泣拜而去러라
注
【集論】張氏九成曰 君子以仁存誠하고 以義爲勇하여 白刃在前不能懼하고 凶暴之氣不能懾은
思廉이 以微軀奮不顧하고 以全君親之生으로 卽甲兵之衆하니 顧輕於一言哉아
易曰 能止健
하니 大正也
라하니 惜乎
라 나 懍懍風義
가 激懦夫之志爾
로다
정관貞觀 원년(627)에
태종太宗이 일찍이
注+종從(조용히)은 즉卽과 용容의 반절이다. 수隋나라가 멸망한 일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한 뒤 탄식하며 말하였다.
“요사렴姚思廉이 칼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큰 절의를 밝혔으니 옛사람에게서 그 예를 찾아본다 해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당시 요사렴이
낙양洛陽에 있었는데 300단의 비단을 하사하고 함께 보낸 글에서
注+유遺(보내다)는 거성去聲이다. “
경卿의
충절忠節의 기풍이 떠올라 이를 주는 것이다.” 라고 했다.
일찍이
대업大業(
수 양제隋 煬帝 연호) 말엽에 요사렴이
수隋나라
대왕代王 양유楊侑의
시독侍讀으로 있었는데
注+대왕代王 양유楊侑는 수隋 원덕태자元德太子의 아들이다. 수 양제隋 煬帝가 대업大業 13년(617)에 남쪽을 순행할 때 대왕代王 양유에게 장안長安을 지키게 했는데, 당 고조唐 高祖가 장안을 함락시킨 뒤 양유를 황제로 옹립했다. 의기義旗(
당 고조唐 高祖 이연李淵의 의병)가
경성京城을 무너뜨릴 때
대왕부代王府의 관료들이 대부분 놀라 흩어졌지만
요사렴만이 대왕을 시봉하여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注+이離(자리를 뜨다)는 거성去聲이다.
병사들이
전각殿閣 위로 올라오려 하자 요사렴이 매섭게 소리치며 말하기를 “
당공唐公이
注+당 고조唐 高祖는 애초에 당공唐公에 책봉되었다. 의병義兵을 일으킨 것이 본디
왕실王室을 바로잡으려는 것이었다면
경卿들은 대왕에게 무례해선 안 된다.” 라고 하니,
모두 그 말에 승복하여 뒤로 물러서 계단 아래에 나열했다.
잠시 뒤 도착한 고조高祖가 이 이야기를 듣고 그를 의롭게 여겨, 대왕 양유를 부축하여 순양합문順陽閤門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니, 요사렴이 울며 절을 하고 떠났다.
이를 목격한 이들이 모두 감탄하며 말하기를 “충렬忠烈의 인물이니, 인자仁者가 용기 있다는 것은 이를 두고 말한 것일 것이다.” 라고 했다.
注
장구성張九成이 말하였다. “군자는 인으로 진실[성誠]을 보존하고 의리로 용기를 삼아서 시퍼런 칼날이 눈앞에 닥쳐도 겁주지 못하고 흉포한 기운으로도 벌벌 떨게 하지 못하니
이는 세찬 완력에 의하지 않고 충성과 의리의 장엄함에 연유하기 때문이다.
수隋나라가 망한 것을 살펴보면, 난병亂兵이 서울로 쳐들어와 시봉하는 신하들이 깜짝 놀라 뿔뿔이 흩어졌음에도
요사렴姚思廉은 미약한 몸을 떨쳐서 무엇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임금의 생존을 온전히 함으로 많은 병사들 앞에 나아갔는데, 한마디 말이라도 가벼이 할 수 있겠는가.
《주역周易》 대축괘大畜卦에 이르기를, ‘굳건함을 능히 머물게 하니 크게 바른 것이다.’라고 했으니, 애석하다, 큰 집이 무너질 때 나무 하나로 지탱하진 못하였지만, 늠름한 의기는 나약한 자의 의지를 격려시킨다.”
注
당중우唐仲友가 말하였다. “요사렴姚思廉은 절의와 학문을 갖춘 인물이니,
맹자孟子가 ‘사람됨이 욕심이 적으면 비록 본심을 갖고 있지 못한 경우가 있다고 해도 그런 경우는 적다.’라고 했는데, 요사렴을 말할 것이다.
학문은 욕심이 적어야 정밀할 수 있고 절의는 욕심이 적어야 확립할 수 있다.”
注
내가 살펴보건대 “이와 관련된 내용은 제4장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