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宗
이 每力行不倦
하여 數年間
에 海內康寧
하고 突厥破滅
注+突, 陀沒切. 厥, 九勿切. 突厥, 阿史那氏, 古匈奴北部也, 居金山之陽. 夏曰獫狁, 商曰鬼方, 周曰獫狁. 其別部凡二十八等, 皆世其官, 與中國抗衡, 歷代爲患, 悉臣服於唐.하니 因謂群臣曰
貞觀初에 人皆異論하여 云當今에 必不可行帝道王道라호대 惟魏徵勸我러니
旣從其言하니 不過數載하여 遂得華夏安寧하고 遠戎賓服이라
突厥
이 自古以來
로 常爲中國勍敵
注+勍, 音檠, 强也.이러니 今酋長
注+酋, 慈由切. 長, 音掌, 番國之長也.이 竝帶刀宿衛
하고 部落
이 皆襲衣冠
하니
玉雖有美質
이나 在於石間
하니 不値良工琢磨
하면 與瓦礫不別
注+礫, 音的, 小石也. 別, 彼列切.이요 若遇良工
하면 卽爲萬代之寶
니 朕雖無美質
이나 爲公所切磋
注+七多切. 詩曰 “如切如磋, 如琢如磨.” 言其治之有緖, 而益致其精也.라
勞公約朕以仁義
하고 弘朕以道德
하여 使朕功業至此
하니 公亦足爲良工爾
注+按曰 “帝納其言不疑, 於是天下大治. 蠻夷君長, 襲衣冠, 帶刀宿衛. 東薄海, 南踰嶺. 戶闔不閉, 行旅不齎糧, 取給於道. 帝謂群臣曰 ‘此徵勸我行仁義, 旣效矣. 惜不令封德彛見之.’”라하다
帝王興治道는 在觀時而爲之니 觀時는 在至明하고 至明은 在至公이니
通於理라 故能變天下之弊하고 正其事라 故能立天下之教니 弊變教立하면 其治不勞而成矣라
孔子曰 如有用我者면 期月而已可也니 三年이면 有成이라하니 則聖人之意를 可見矣라
但後之爲天下者는 雖欲興起治道나 多非聖哲之才라 不能通究時弊하여 以道變之하고 務速其功하여 以行一時之事라
觀魏公之論하면 誠得聖人之意어늘 文皇이 能納其言하여 而不惑姦人之論하고 力變時弊하여 以行王道하니 嗚呼明哉로다
大亂之後에 興立教法하여 不急其功하여 致時太平하고 德流於後하니 嗚呼公哉로다
魏徵의 仁義之言也는 欲順天下之理而治之요 封德彛의 刑罰之言也는 欲咈天下之性而治之라
欲治天下하면 則順之而已니 咈之而能治之는 未之聞也라
太宗이 從魏徵而不從德彛하여 行之數年에 遂致太平하니 仁義之效가 如此其速也라
故治道는 在人主所力行耳니 孰不可爲太宗乎리오마는 及其成功하여 復歸美於下는 此前世帝王之所不及也라
德彛가 言三代以還으로 人漸澆訛는 未爲甚失이요 魏徴이 言若果澆訛면 當爲鬼魅는 則非也라
以書契以來觀之하면 三代之時가 固不若唐虞之世하고 周之文勝이 又不若虞夏之質하며
兩漢風俗이 豈敢望周며 而唐室風俗이 又安能及漢耶아
若謂民常淳樸하여 無有澆訛하면 是結繩之治가 可以易約劑하고 土鼓之樂이 可以變絲竹矣라
亂極人少면 則氣厚而人淳하고 治極人多면 則氣漓而人澆니
淳漓一變하면 而天地之氣盈虛消息이니 後世誠不及古遠矣라
若夫人之所以爲人이 出於本心하여 不可泯滅者는 則古猶今耳라
是故可以懐之以仁하고 理之以義하고 先之以敬讓하고 示之以好惡也라
故其效止於斗米數錢과 外戶不閉요 則無以進矣니 固不能使人人有士君子之器也로다
愚按
니 二者
는 皆出於天理之本然
하여 人心之固有也
라
古之聖人은 體之於心하고 行之於身하여 措之於家國天下라
操存於未發之時하고 持守於隱微之地하여 終始如一하여 無須臾之離也요 表裏如一하여 無毫髪之間也라
故能使天地自位
하고 萬物自育
하여 氣無不和
하여 畢至
하니 此豈可以僞而爲之
하고 襲而取之哉
리오
周道旣衰하고 聖學榛塞이라 孟子於戰國之時에 汲汲然以仁義說齊梁之君호대 則見謂迂闊而莫之行也라
自謂本
라하여 不喜書生者
가 有之矣
니 其視仁義
를 不過尊之以美名
하고 待之以虛器而已
라
寥寥千載에 唐太宗이 以英武間世之姿로 當撥亂反正之運하여 獨能黜抑封倫之言하고 力行魏徵之請이라
故能致斗米三錢하고 外戶不閉하며 行旅野宿하고 幾於刑措하니 亦可謂仁義之效矣라
然太宗之於仁義也에 慕其名而不得其實하고 喜其文而不究其本하고 知求之於紀綱政事하되 而不知反之於吾身方寸之間하고 知求之於外廷朝著하되 而不知行之於宮闈隱微之際라
故始以從諫爲美
하되 而終不免
하고 外以
爲名
하되 而内不免
하니 内外扞格
하고 終始衡決
이라
其於聖人之仁義에 蓋外似而内違하고 名同而實乖也라
夫自成康八百餘年하여 而後有漢하고 漢八百餘年하여 而後有太宗하니 天之生賢君이 如此其不數數也라
幸而有力行仁義之君이나 而較之於聖人之道하면 則又若珷玞之於美玉하고 稊稗之於美稼焉하니 豈非聖道不明하여 有君無臣之所致乎아
태종太宗이 늘 힘써 행하고 게을리 하지 않아서 수년 사이에 천하가 편안해지고
돌궐突厥이 격파되니,
注+돌突은 타陀와 몰沒의 반절이요, 궐厥은 구九와 물勿의 반절이다. 돌궐突厥은 아사나씨阿史那氏로, 옛날 흉노匈奴의 북부北部이고, 금산金山의 남쪽에 살았다. 하夏나라에서는 험윤獫狁이라 하였고, 상商나라에서는 귀방鬼方이라 하였고, 주周나라에서는 험윤獫狁이라고 하였다. 그 별부別部(氏族 갈래)는 모두 28등이고 모두 그 관직을 세습하여 중국과 맞서니, 대대로 근심이 되었는데 당唐나라에 모두 신하로 복종하였다. 이로 인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정관貞觀 초년에 사람들이 모두 논의가 달라서 당시에 결코 제도帝道와 왕도王道를 시행할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위징魏徵만이 나에게 권하였소.
그의 말을 따르고 난 뒤 몇 년 지나지 않아 마침내 화하華夏(중국)가 편안함을 얻었고, 먼 곳의 오랑캐들도 복종하였소.
돌궐은 예로부터 늘 중국의 강한 적이었는데
注+경勍은 음은 경檠이니, 강하다는 뜻이다. 지금 추장이
注+추酋(우두머리)는 자慈와 유由의 반절이고, 장長(우두머리)은 음이 장掌이니, 번국의 우두머리이다. 함께 칼을 차고 궁궐에서 호위를 하고,
부락部落들이 모두 의관을 입고 있소.
내가 마침내 여기에 이르게 된 것은 모두 위징의 힘이오.”
“옥이 비록 아름다운 바탕이 있으나 돌 사이에 섞여 있어서 숙련공에게 연마되지 못하면 기와나 자갈과 다름이 없고,
注+역礫은 음이 적的이니, 작은 돌이다. 별別(다르다)은 피彼와 열列의 반절이다. 만약 숙련공을 만나면 곧 만대의 보물이 되는 것이니, 짐은 비록 아름다운 바탕이 없으나 공에게 단련을 받았소.
注+〈차磋(갈다)는〉 칠七과 다多의 반절이다. 《시경詩經》 〈위풍衛風 기오淇奧〉에 “깎고 다듬고 쪼고 간 듯하네.”라고 하니, 다루는데 순서가 있고 정밀함을 더욱 세밀하게 함을 말한 것이다.
공이 수고롭게도 짐을
인의仁義로 단속해주고 짐을
도덕道德으로 넓혀주어 짐의
공업功業이 여기에 이르도록 하였으니, 공은 또한 숙련공이라 하기에 충분하오.”
注+살펴보니 사책史冊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태종太宗이 그 말을 받아들여 의심하지 않았고 이에 천하가 크게 다스려졌다. 만이蠻夷의 군장君長들이 의관을 입고 칼을 차고 호위하였다. 동으로는 바닷가에 이르고 남으로는 오령五嶺을 넘었으며, 문을 열어두어 닫지 않고 여행자들이 양식을 싸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길에서 조달할 수 있었다. 태종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위징魏徵이 일찍이 나에게 인의를 행하라고 권하여 효험이 드러난 것이다. 봉덕이封德彝가 죽어서 보지 못하게 된 것이 애석하구나.’라고 하였다.”
“제왕이 다스리는 도를 일으키는 것은 때를 살펴서 하는 데 달려 있으니, 때를 살피는 것은 지극히 밝음에 있고, 지극히 밝음은 지극히 공평함에 있다.
지극히 밝으면 이치가 통하지 않는 것이 없고, 지극히 공평하면 일이 바르지 않은 것이 없다.
이치에 통하므로 천하의 폐단을 변하게 할 수 있고, 그 일을 바르게 하므로 천하의 가르침을 세울 수 있으니, 폐단이 변하고 가르침이 확립되면 다스림은 수고롭지 않아도 이루어진다.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만일 나를 등용해주는 자가 있다면 1년 만 하더라도 괜찮을 것이고, 3년이면 이루어짐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성인의 뜻을 볼 수 있다.
다만 후세에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비록 다스리는 도를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대부분 성스럽고 명철한 재주를 지닌 이가 아니어서 당시의 폐단을 통틀어 규명하여 도리로 변화시키지 못하고, 힘써 그 공을 서둘러서 한때의 일을 행하였다.
그러므로 하는 일이 뒤섞여 옛날의 치적을 회복한 이가 없었다.
위징의 논의를 보면 진실로 성인의 뜻을 얻었는데, 문황文皇(太宗)이 그의 말을 받아들여 간사한 사람의 논의에 현혹되지 않고 힘써 당시의 폐단을 변화시켜서 왕도를 행하였으니, 아, 명철하도다.
크게 어지러운 시기 뒤에 교화의 법도를 일으켜 세워 그 공을 이루는 것을 조급해하지 않아 태평 시대를 이룩하고 덕택이 후세에 이어지게 하였으니, 아! 공평하도다.”
“태종太宗은 잘 살펴 취사선택을 하였다고 말할 만하다.
위징魏徵이 말한 인의仁義는 천하의 이치를 따라 다스리려 한 것이고, 봉덕이封德彝가 말한 형벌刑罰은 천하의 성정을 어겨서 다스리려고 한 것이다.
백성들 중에는 위태로움을 싫어하여 편안하려 하고 수고로움을 싫어하여 쉬려고 하지 않는 자가 없다.
인의仁義로 다스리면 따르고 형벌刑罰로 다스리면 어긴다.
천하를 다스리려고 하면 〈천하의 이치를〉 따를 뿐이니, 어기면서 잘 다스릴 수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태종이 위징을 따르고 봉덕이를 따르지 않아 몇 년 동안 시행한 뒤에 마침내 태평을 이룩하였으니, 인의仁義의 효과가 이와 같이 빠르다.
그러므로 다스리는 도는 임금이 힘써 행하는 데에 있을 뿐이니, 누구인들 태종이 될 수 없겠는가마는 그가 공을 이루고 나서 다시 아름다움을 아래에 돌려준 것은 이전 시대의 제왕帝王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봉덕이封德彝가 말한 ‘삼대三代 이후로 사람들이 점점 경박하고 속이게 되었다.’라는 것은 심하게 그릇된 말이 아니고, 위징魏徵이 말한 ‘만약 과연 경박하고 속이게 되었다면 당연히 귀신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말은 잘못이다.
문자가 생긴 이래로 살펴보면, 삼대의 시대가 진실로 요순堯舜 시대만 못하고, 주나라가 문식文飾에 치중한 것이 또 순우舜禹의 질박함만 못하다.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의 풍속이 어찌 감히 주周나라를 바라겠으며, 당唐나라의 풍속이 또 어찌 한漢나라에 미칠 수 있겠는가.
만약 백성이 항상 순박하여 경박하고 속임이 없다면, 결승結繩의 정치가 약자約劑(증빙 문서)를 바꿀 수 있고 토고土鼓(흙과 가죽으로 만든 북)의 음악이 사죽絲竹(현악기와 관악기)을 변화시킬 수 있다.
요컨대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어지러워짐은 천지의 큰 운수이다.
혼란이 극도에 이르러 사람이 적어지면 기운이 온후하여 사람이 순박해지고, 다스려짐이 지극하여 사람이 많아지면 기운이 희박해져 사람이 경박해진다.
순박함과 희박함이 한 번 변하면 천지의 기운이 찼다가 비고 사라졌다 불어나니 후세가 진실로 먼 옛날에 미치지 못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이 본심에서 나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다.
이 때문에 인仁으로 품어줄 수 있고 의리로 다스릴 수 있고 공경과 사양으로 솔선할 수 있고 좋아함과 싫어함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위징이 굶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음식되기가 쉽다는 것은 알았으나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 망하지 않은 것은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 효과가 쌀 한 말의 값이 몇 전에 불과하고 사람들이 바깥문을 닫지 않는 정도에 그치고 더 이상 진전이 없었으니, 진실로 사람마다 사군자士君子의 국량을 가지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살펴보건대, 인仁은 마음의 덕이고 사랑의 원리이며, 의義는 마음의 제재이고 일의 마땅함이니, 두 가지는 모두 천리의 본연에서 나와서 사람의 마음에 고유固有한 것이다.
옛날의 성인은 마음에 인의仁義를 체득하고 몸에 인의를 행하여 집안, 국가, 천하에 인의를 두었다.
아직 발현하지 않았을 때에 잡아 보존하고 은미한 데에서 잡아 지켜서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아서 잠시도 떠남이 없고, 겉과 속이 똑같아서 털끝만 한 틈도 없다.
그러므로 천지가 스스로 자리할 수 있게 하고 만물이 스스로 양육될 수 있게 하여 기운이 화합하지 않음이 없어서 사령四靈이 다 이르게 되니, 이것이 어찌 속여서 할 수 있고 엄습하여 취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주周나라의 도가 쇠퇴한 뒤에 성인의 학문이 두절되었는데, 맹자孟子가 전국시대에 급급히 인의仁義를 가지고 제齊나라‧양梁나라의 임금에게 유세하였으나 우활迂闊(사리에 어두움)하다는 평가를 받아 그것을 행하는 자가 없었다.
이 이후로는 임금이 스스로 말하기를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거늘 어찌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일삼으랴.”라고 하는 자가 있었고, 황제黃帝와 노자老子를 숭상하고 유술儒術을 믿지 않는 자가 있었으며,
스스로 말하기를 “본래 왕도와 패도를 섞어서 썼다.”라고 하여 선비를 기뻐하지 않는 자가 있었으니, 인의仁義를 보기를 그럴듯한 이름으로 높이고 유명무실한 빈 그릇으로 여기는 데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아득히 천년 후에 당唐 태종太宗이 영특하고 용맹하여 세상에 드문 자질로 난리를 평정하여 올바름으로 되돌아가는 운세를 당하여 홀로 봉륜封倫(봉덕이)의 말을 물리쳐 억제하고 위징의 요청을 힘써 행하였다.
그러므로 쌀 한 말이 3전錢이고 바깥문을 닫지 않았으며, 여행자들이 들에서 유숙하고 거의 형벌을 버려두고 쓰지 않는 데에 이르렀으니, 또한 인의의 효과라고 말할 만하다.
그러나 태종太宗이 인의에 대해서는 그 이름만 사모하였지 그 실제를 터득하지 못하였으며, 그 글만 기뻐하였지 그 근본을 궁구하지 못하였으며, 기강과 정사에서 구할 줄만 알았지 나의 몸과 마음속에서 돌이켜 구할 줄을 알지 못하였으며, 외정外廷의 조반朝班에서 구할 줄만 알았지 궁중의 은미한 곳에서 행할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처음에 간언을 따르는 것을 아름다운 일로 여겼으나 끝에는 위징魏徵의 비석을 무너뜨리는 실수를 면하지 못하였고, 밖으로는 궁녀를 내보내는 것으로 명분을 삼았으나 안으로는 회영懐嬴의 잘못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내외内外가 서로 막히고 처음과 끝이 서로 맞지 않은 것이다.
그가 성인의 인의에 대해서 외면은 비슷하였으나 내면은 어긋났고 명분은 같았으나 실상은 괴리되었다.
주周나라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으로부터 800여 년 후에 한漢나라가 있었고, 한漢나라로부터 800여 년 후에 태종太宗이 있었으니, 하늘이 어진 임금을 낼 때 이처럼 드물게 했던 것이다.
다행히 인의를 힘써 행한 임금이 있었으나 성인의 도에 비교해보면, 또 마치 무부珷玞(옥 비슷한 돌)를 아름다운 옥에 견주는 것과 같고 제패稊稗를 좋은 벼에 견주는 것과 같으니, 어찌 성인의 도가 밝지 않아 훌륭한 임금만 있고 신하는 없는 데서 온 결과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