在宗周之積德
하여 乃執契而膺期
하고 賴昌發而作
注+ 賴昌發而作貳:昌, 文王名. 發, 武王名.하여 니이다
逮扶蘇之副秦
하여 非有虧於聞望
注+ 非有虧於聞望:聞, 去聲.이나 以長嫡之隆重
注+ 以長嫡之隆重:長, 音掌.으로 監偏師於亭障
注+ 監偏師於亭障:監, 平聲. 扶蘇, 秦始皇長子也. 始皇欲坑諸生, 扶蘇切諫, 始皇怒, 使北監蒙恬上郡. 始皇崩, 公子胡亥, 詐受遺詔自立, 賜扶蘇死.이니이다
始禍則
注+ 始禍則金以寒離:左傳閔公二年 “晉侯使太子申生伐東山皐落氏, 衣之, 佩之金玦. 狐突歎曰 ‘衣之尨(방)服, 遠其躬也, 佩以金玦, 棄其衷也. 尨凉冬殺, 金寒玦離, 胡可恃也.’” 金, 金環也.하고 厥妖則火不炎上
注+ 厥妖則火不炎上:五行傳曰 “棄法律, 逐功臣, 殺太子, 以妾爲妻, 則火不炎上.” 言火失其性而爲災也.하여 旣樹置之違道
하여 見宗祀之遄喪
이니이다
伊漢氏之長世
는 固明兩之遞作
注+ 固明兩之遞作:易曰 “作離, 大人以, 繼明照于四方.”이나
高惑戚而寵趙
하여 以天下而爲謔
하고 惠結皓而因良
하여 致羽翼於寥廓
注+ 致羽翼於寥廓:竝見敎戒篇註.하며
景有慚於鄧子
하여 하며 終生患於强吳
는 由發怒於爭博
注+ 景有慚於鄧子……由發怒於爭博:漢景帝, 名啓, 文帝太子也. 鄧子, 名通, 文帝佞幸臣也. 强吳, 高祖兄仲之子吳王濞也. 文帝嘗病癰, 鄧通常爲帝吮之. 帝曰 “天下誰最愛我.” 通曰 “宜莫如太子.” 太子入問病, 帝使吮癰, 吮而色難之. 已而聞通嘗爲帝吮, 心慙, 由此怨通. 及卽位, 鄧通免. 太子又嘗與吳太子飮博, 吳太子素驕, 博爭不恭, 太子引博局提吳太子殺之. 吳王, 由是怨望, 稍失藩臣禮.이니이다
故能恢弘祖業
하여 紹三代之遺風
注+ 徹居儲兩……紹三代之遺風:徹, 漢武帝名, , 爲太子時也. 亞夫, 周勃之子, 仕至丞相, 景帝甚重之. 帝欲廢戾太子, 亞夫不可, 帝由是疏之. 帝嘗目之曰 “此鞅鞅, 非少主臣也.”하니이다
據開博望
이나 其名未融
이러니 哀時命之奇舛
하여 遇讒賊於江充
하고 雖備兵以誅亂
이나 竟背義而凶終
注+ 據開博望……竟背義而凶終:背, 音倍. 據, 戾太子名, 漢武帝子也. 帝爲太子立博望苑, 使通賓客. 趙人江充, 與太子有隙, 見帝年老, 恐他日爲所誅, 因言帝 “疾祟在巫蠱.” 帝乃使充入宮治之, 充云 “太子宮, 木人尤多, 又有帛書, 所言不道.” 太子遂捕充斬之. 長安軍亂, 因言太子反, 上怒, 太子自經.하니이다
주周나라가 덕을 쌓아 기회를 잡고 시기에 응하여,
희창姬昌과
희발姬發을 힘입어
이貳(
태자太子,
성왕成王)가 되면서
注+창昌은 문왕文王의 이름이고, 발發은 무왕武王의 이름이다. 700년의 큰 기틀을 열었습니다.
부소扶蘇가
진秦나라의
부副(태자)가 되면서 명성과 기대에 흠결이 없었지만
注+문聞(소문)은 거성去聲이다. 소중한
적자嫡子가
注+장長(웃사람)은 음音이 장掌이다. 정장亭障에서 일부 군사만 감독했습니다.
注+감監(살피다, 감시하다)은 평성平聲이다. 부소扶蘇는 진시황秦始皇의 장자이다. 진시황이 제생諸生들을 땅에 묻으려 할 때 부소扶蘇가 절실하게 간언하자, 진시황이 노하여 북쪽으로 보내 몽념蒙恬을 상군上郡에서 감시하게 했다. 진시황이 서거한 뒤 공자公子 호해胡亥가 속임수로 유조遺詔를 받아 스스로 제위에 오른 뒤 부소에게 죽음을 내렸다.
재앙이 시작되면서
금결金玦의 쓸쓸한 차림으로 떠나게 되고
注+《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민공閔公 2년(B.C.661)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진후晉侯가 태자太子 신생申生에게 동산東山에 사는 고락씨皐落氏를 정벌하게 하면서 편의偏衣를 입고 금결金玦을 차게 했다. 이를 본 호돌狐突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방복尨服(잡색 옷)을 입은 것은 태자 신분을 멀리하는 것이고 금결金玦을 차는 것은 태자의 속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방尨은 냉담함을 보이고 겨울은 죽임을 보이고 금金은 차가움을 보이고 결玦은 결별을 보이니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금결金玦은 황금고리옥이다., 요망한 일이 벌어지면서 불이 위로 타오르지 않는 재앙이 되어
注+《오행전五行傳》에서 “법률法律을 버리고 공신功臣을 내쫓고 태자太子를 죽이고 첩妾을 처妻로 삼는다면 불이 위로 타오르지 않는다.”고 했으니, 불이 본성을 잃어 재난을 만든다는 말이다., 이미 내세운 것이 도를 위배하게 되어 종묘와 제사의 빠른 상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漢나라가 오랜 세대를 끌고 간 것은 본디
명량明兩(태자)이 번갈아 가면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注+《주역周易》 〈이괘離卦 상사象辭〉에서 말하였다. “밝은 것이 둘인 것이 이離가 되는데 대인大人이 이를 본받아 밝음을 계승하여 사방四方에 비춘다.”
고조高祖(
유방劉邦)가
척부인戚夫人에게 현혹되어
조왕趙王(
유여의劉如意)을 총애하면서 천하를 장난거리로 만들었고,
혜제惠帝(
유영劉盈)가
사호四皓와 맺어질 때
장량張良을 힘입어서 세상에
우익羽翼을 만들었습니다.
注+모두 〈교계敎戒〉편 주석에 보인다.
경제景帝(
유계劉啓)가
등자鄧子에게 부끄러움을 느껴
종리從理의 과잉과 학대를 만들어냈으며, 결국 강한
오吳나라에게서 우환이 생긴 것은
박博 놀이 다툼에서 노여움이 발한 탓입니다.
注+한 경제漢 景帝는 이름이 계啓이며 문제文帝의 태자太子이다. 등자鄧子는 이름이 통通이며 문제文帝에게 아양 떨어 사랑받았던 신하이다. 강오强吳는 고조高祖의 형 유중劉仲의 아들인 오왕吳王 유비劉濞이다. 한 문제漢 文帝가 일찍이 등창을 알았는데 등통鄧通이 언제나 종기를 빨아주었다. 문제가 “세상에서 누가 가장 날 사랑하는가?”라고 묻자, 등통이 “태자보다 더한 이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태자가 문병 차 찾아오자 문제가 종기를 빨게 하니 빨면서도 언짢아했고, 그 뒤 등통이 문제를 위해 종기를 입으로 빨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에 부끄러워했고, 이 때문에 등통을 원망했다. 그래서 제위에 오른 뒤 등통이 면직되었다. 태자가 또 일찍이 오태자吳太子와 술을 마시며 박博(바둑 따위) 놀이를 했는데 평소 교만하던 오태자吳太子가 박博 놀이 수를 다투다가 공손하게 행동하지 않자 태자가 박博의 판을 오태자에게 던져서 죽였다. 이 때문에 오왕吳王이 원망하여 번신藩臣의 예절을 점차 잃어갔다.
유철劉徹(한 무제漢 武帝)이 태자였을 때 나이가 아직 어렸지만 방연防年의 의義가 단절된 것을 알아냈고 주아부周亞夫가 공로를 과시하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선조의 사업을 넓혀
삼대三代의 유풍을 계승했습니다.
注+철徹은 한 무제漢 武帝의 이름이며 저량儲兩은 태자太子로 있던 시절이다. 아부亞夫는 주발周勃의 아들인데 승상丞相까지 이르렀으며 한 경제漢 景帝가 매우 중시했다. 경제景帝가 여태자戾太子를 폐위시키려 할 때 아부亞夫가 안 된다고 만류해서, 경제가 그를 소원하게 대했다. 경제가 일찍이 그를 지목하며 말하기를 “이 ‘앙앙鞅鞅(불평쟁이, 아부亞夫를 가리킴)은 소주少主(젊은 군주, 태자)의 신하가 아니다.”라고 했다.
유거劉據는
박망원博望苑을 개설했습니다만 그 명성이 대단치 못했는데, 안타깝게도 운명이 기구하고 엇갈려
강충江充이라는 참소하는 적을 만났고, 병사를 대비해서 난적을 무찔렀지만 결국 도의를 위배하고 흉악하게 생을 마쳤습니다.
注+배背(배반)는 음音이 배倍이다. 거據는 여태자戾太子의 이름으로 한 무제漢 武帝의 아들이다. 무제가 태자를 위해 박망원博望苑을 건립해 빈객들과 소통하게 했다. 조趙나라 사람 강충江充이 태자太子와 사이가 안 좋았는데, 무제가 연로한 것을 보고 훗날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무제에게 “질병의 원인이 무고巫蠱(주술로 남을 저주하는 일)에 있습니다.”라고 했다. 무제가 강충에게 궁에 들어와 이를 다스리게 하자, 강충이 이르기를 “태자궁太子宮엔 나무인형이 특히 많고 또 주문呪文이 담긴 백서帛書가 있는데 내용이 불길합니다.”라고 하자, 태자가 결국 강충을 체포해서 죽였다. 장안長安에 군란軍亂이 일어나고 이어서 ‘태자太子가 반란을 일으킨다.’라고 하자, 무제가 노하였고 태자는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