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宗
이 手詔曰 省前後諷諭
注+ 省前後諷諭:省, 悉井切.하니 皆切至之意
니 固所望於卿也
로다
朕昔在
엔 尙惟童幼
라 未漸師保之訓
注+ 未漸師保之訓:漸, 音尖.하고 罕聞先達之言
이러니
値隋主分崩
하여 萬邦塗炭
하여 惵惵黔黎
注+ 惵惵黔黎:惵, 音蝶.가 庇身無所
할새
朕이 自二九之年으로 有懷拯溺하여 發憤投袂하여 便提干戈하고
蒙犯霜露하여 東西征伐에 日不暇給하고 居無寧歲로다
降蒼昊之靈하고 稟廟堂之略하니 義旗所指에 觸向平夷라
弱水流沙
注+ 流沙:今屬甘肅.에 竝通輶軒之使
注+ 竝通輶軒之使:使, 去聲. 輶, 輕車也.하고 被髮左衽
注+ 被發左衽:四夷之人也.이 皆爲衣冠之域
하여 正朔所班
에 無遠不屆
라
及恭承
하고 寅奉帝圖
하여 垂拱無爲
하여 氛埃靖息
이 於玆十有餘年
이니
斯盖股肱이 罄帷幄之謀하고 爪牙가 竭熊羆之力하여 協德同心하여 以致於此로다
自惟寡薄이 厚享斯休하니 每以撫大神器하여 憂深責重이라
庶幾明賴하여 一動以鍾石하고 淳風至德이 永傳於竹帛하여 克播鴻名하여 常爲稱首로다
朕以虛薄
으로 多慚往代
어늘 若不任舟楫
이면 豈得濟彼巨川
이며 不藉鹽梅
면 安得調夫五味
注+ 安得調夫五味:商書高宗命傅說曰 “若濟巨川, 用汝作舟楫.” 又曰 “若作和羹, 爾唯鹽梅.”리오하고
注
夫所貴乎聖賢者는 以其見禮知政하여 而前知于未然之先也라
善乎라 魏徵之言曰 閹宦이 雖微나 爲患特深하니 今日之明에 必無此慮나 爲子孫計인댄 不可不杜絶其源이여
厥後에 唐之中葉에 竟以宦者而亂하고 及其末世하여 遂以宦者而亡하니
太宗이 斯時에 正當著之爲令하여 俾後之子孫으로 世世無得使宦者與政可也어늘
徵이 旣言閹宦之禍하고 復上疏數千言하여 極陳當時之失하니
史稱徵諫疏二百餘篇이로되 其見於世者는 則此其最詳者也라
太宗答詔丁寧하고 寵賜優渥하니 君臣相與之際가 何其盛哉아
태종太宗이 손수 쓴 조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후에 걸친 권면의 글을 살펴보니
注+생省(살피다)은 실悉과 정井의 반절이다., 모두 간절하고 극진한 내용으로, 본디 경에게 바랐던 것이오.
짐이 지난날
형문衡門(재야)에 있을 땐 아직 어려서 스승의 가르침에 젖어들지 못하고
注+점漸(스며들다, 받아들이다)은 음이 첨尖이다. 선현의 말씀을 듣는 경우가 드물었소.
수隋나라 군주가 몰락하자 온 나라가 도탄에 빠져 두려움에 떤 백성들이
注+첩惵(두려워하다)은 음音이 접蝶이다. 몸을 보호할 곳도 없었소.
짐이 18세 때부터 도탄에 빠져 있는 이들을 구제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분발하여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창과 칼을 잡고,
서리와 이슬을 뒤집어쓰면서 동쪽과 서쪽을 정벌하느라 날마다 여유가 없고 편안히 지내는 해가 없었소.
하늘의 영령이 내려오시게 되어 묘당廟堂의 책략을 아뢰니, 의로운 깃발이 가리켜 향하는 곳마다 모두 평정하게 되었소.
약수弱水와
유사流沙(사막) 지역도
注+지금 감숙성甘肅省에 속한다. 모두
유헌輶軒(
당唐 황제 수레)의 사신이 왕래하였고
注+사使(사신)는 거성去聲이다. 유輶는 가벼운 수레이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 지역도
注+〈피발좌임被發左衽은〉 사방 오랑캐에 속한 사람들이다. 모두
의관衣冠(문물)을 갖춘 지역이 되어서
정삭正朔을 나타내는 책력의 반포가 닿지 않는 곳이 없었소.
삼가 보력寶曆을 받들고 조심히 제업帝業을 받들며 편안한 무위無爲의 정치를 하며 혼란이 정돈된 지 어느덧 10여 년이 되었으니,
이는 고굉股肱(팔다리 같은 문신文臣)의 신하들이 천막 안에서 계책을 극진히 마련하고, 조아爪牙(짐승 발톱 이빨 같은 무신武臣)의 대신들이 웅비熊羆(맹수)의 힘을 다 바쳐 덕과 마음을 하나로 뭉쳐 이런 결과를 이룩한 것이오.
덕이 부족하고 재능이 빈약한 내가 이런 아름다움을 후하게 누리고 있는데, 매번 위대한 신기神器(제위)를 어루만지며 걱정이 깊고 책임이 무거워서,
만기萬機에 빈틈이 많고 사방의 총명한 말들이 도달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전전긍긍하며 앉아서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공과 경들에게 묻고, 노예들에게도 다가가 진심을 내보였소.
그리하여 밝게 보필자들에게 의뢰해서 하나의 행동거지도 종과 돌에 새겨져 순박한 풍습과 극진한 덕이 죽백竹帛(역사)에 영원히 전해져서, 능히 큰 이름을 전파해서 언제나 으뜸이라고 일컬어지기를 바랐소.
짐이 공허하고 빈약한 재능으로 지난 시대에 견주어 손색이 많은데, 만일 배와 노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 큰 강물을 건널 수 있으며, 소금과 매실을 빌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섯 가지 맛을 조절할 수 있겠소.”
注+《서경書經》 〈상서商書 열명說命 상上〉에서,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에게 명하기를 “만일 큰 강물을 건너게 되면 그대를 배와 노로 삼겠다.”라고 하고, 또 〈열명說命 하下〉에 이르기를 “만일 국의 맛을 조절하게 되면 그대가 소금과 매실이 되어야 한다.”라고 했다.
注
내가 살펴보건대, 춘추春秋시대에 위衛나라가 매우 쇠약했는데
연릉계자延陵季子(계찰季札)는 〈위衛나라가〉 가장 나중에 멸망할 것을 미리 알았고, 제齊나라가 지극히 강력했지만 주공周公은 〈제齊나라에〉 훗날 찬탈과 시해가 많이 벌어질 줄 알았으니,
성현에게 중요시되는 것은 예절을 보고 그 정치를 파악해서 일이 벌어지기 전에 결과를 알아차린다는 점이다.
훌륭하도다, 위징魏徵이 한 말에, ‘환관이 미약한 직책이긴 하나 걱정거리는 매우 크니 오늘날 현명하신 성상에게는 반드시 이러한 우려가 없겠지만 자손을 위한 계책을 세운다면 그 근원을 끊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고 한 말이여!
그 뒤 당唐나라 중엽에 결국 환관 때문에 혼란이 발생하고 말기엔 마침내 환관 때문에 멸망했으니,
위징의 밝은 견해는 주공周公과 계자季子에 견준다 해도 어찌 그 차이가 크겠는가.
태종太宗이 이때 명령으로 확실하게 법령을 만들어, 후대의 자손들에게 대대로 환관이 정치에 참여할 수 없도록 해야 했는데,
외사外使에 충당하는 것을 멈추는 데 지나지 않았으니, 이는 단지 한순간을 위한 계책일 뿐 어찌 먼 후손에게 끼쳐준 도모라 하겠는가.
위징이 환관의 재앙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서 다시 수천 마디 말을 올려 당시의 문제점에 대해 극진하게 진술하였는데,
역사 기록에 위징이 간언한 상소가 200여 편이라 일컬어지지만 세상에 뚜렷이 나타난 것은 이것이 가장 상세하다.
태종이 답한 조칙이 간곡하고 총애로 하사한 것이 넉넉하니, 임금과 신하가 서로 어울린 관계가 어찌 이토록 성대하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