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觀十九年
에 太宗
이 攻遼東安市城
注+ 太宗 攻遼東安市城:今爲安市州, 隷鎭東.할새 高麗人衆
이 皆死戰
이어늘
詔令耨薩延屬惠眞等降
注+ 詔令耨薩延屬惠眞等降:降, 音杭. 耨薩高延壽北部, 耨薩高惠眞南部.하고
每見帝幡旗
하면 必乘城鼓譟
注+ 必乘城鼓譟:乘, 平聲.하니
帝怒甚
하여 詔江夏王道宗
注+ 詔江夏王道宗:道宗, 高祖從兄弟, 字承範. 年十七, 從秦王, 討賊有功. 初封任城, 後封江夏郡. 道宗, 好學, 接士不倨于貴, 爲宗室最賢.하여 築土山
하여 以攻其城
하되 竟不能剋
이라
太宗
이 將旋師
할새 嘉安市城主堅守臣節
하여 賜絹三百匹
하여 以勸勵事君者
注+ 貞觀十九年……以勸勵事君者:舊本, 此章, 與第十二章, 合爲一章, 今按通鑑標年, 附入于此. 又按通鑑, 太宗, 親征遼東, 令李勣攻安市, 安市人望見旗盖, 輒乘城鼓譟, 上怒, 勣請克城之日, 男子皆阬之. 安市人聞之, 益堅守久不下. 江夏王道宗, 築土山於城東, 浸逼其城, 城中亦增高其城以拒之. 又衝車礮石, 壞其城堞, 城中隨立木柵以塞之. 築山晝夜不息凡六旬, 用功五十萬, 山頹壓城崩, 城中數百人出戰, 遂奪據土山而守之, 諸將攻三日不克. 上以天寒糧盡, 先拔遼盖二州戶口渡遼, 乃耀兵城下而旋. 城中皆屛跡不出, 城主登城拜辭, 上嘉其固守, 賜縑百匹.하다
注
夫以太宗之英武로 戡定禍亂於群雄競起之日엔 天戈所指에 夷貊이 不能嬰其鋒이나
退而嘉安市城主堅守之節하여 賞賜以旌之하여 以勵事君者하니 斯意固美矣나
정관貞觀 19년(645)에
태종太宗이
요동遼東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했는데
注+안시성安市城은 지금의 안시주安市州이며 진동鎭東에 속한다. 고려高麗 사람들이 모두 목숨을 걸고 싸웠다.
태종이
누살耨薩(관직 이름)
고연속高延屬과
누살耨薩 고혜진高惠眞 등에게 투항하라고 하고
注+강降(항복)은 음音이 항杭이다. 누살耨薩 고연수高延壽는 북부北部이고, 누살耨薩 고혜진高惠眞은 남부南部이다.,
많은 당唐나라 군사들이 성 아래까지 가서 멈추어 그들을 불러댔지만 성 안에서 견고하게 지킨 채 동요하지 않았으며,
당 태종의 깃발을 볼 때마다 반드시 성곽 위로 올라가 북을 치며 욕을 했다.
注+승乘(오르다)은 평성平聲이다.
태종이 매우 노하여
강하왕江夏王 이도종李道宗에게 명하여
注+이도종李道宗은 고조高祖의 종형제從兄弟로 자字는 승범承範이다. 17세 때 진왕秦王을 따라 적을 토벌하는 데 공功을 세웠다. 처음엔 임성任城에 책봉되었고 뒤이어 강하군江夏郡에 책봉되었다. 이도종李道宗은 배우기를 좋아했고, 학자들을 접할 때 귀한 지위로 거만하지 않았으니 종실宗室 가운데 가장 현자였다. 토산土山을 쌓아 성을 공격하게 했지만 끝내 이기지 못했다.
태종이 군사들을 이끌고 되돌아가려는 즈음에
안시성安市城 성주城主가 신하의 절의를 굳건히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비단 300필을 하사하여 임금을 섬긴 자들을 권장하고 격려했다.
注+구본舊本엔 이 장章이 제第12장章과 한 장章으로 되어 있었는데 지금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정관貞觀 19년의 연대표기에 의거하여 여기에 편집해 넣었다. 또 살펴보건대,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태종太宗이 직접 요동遼東 정벌에 나서 이적李勣에게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도록 했는데 안시성 사람들이 태종의 깃발과 수레덮개를 보고 바로 성 위로 올라가 북을 치며 야유했다. 태종太宗이 노여워하자, 이적이 성을 정복하는 날 남자들을 모두 땅에 묻을 것을 요청했다. 안시성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더 견고하게 지켜 오랫동안 함락되지 않았다. 강하왕江夏王 이도종李道宗이 성 동쪽에 토산土山을 쌓아 성곽을 점차 압박해 들어가자 성 안에서도 성곽을 더욱 높이 쌓아 막았다. 또 충거衝車와 대포大砲, 돌 탄환으로 성가퀴를 파괴하자 성 안에서는 목책木柵을 세워 막았다. 토산土山을 쌓기를 밤낮 쉬지 않고 60일에 걸쳐 50만을 동원하였는데, 토산이 무너지며 성곽이 눌려 붕괴되자, 성 안에 있는 수백 명이 나와 싸워서 결국 토산土山을 점령하여 지켰고, 장수들이 3일에 걸쳐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했다. 태종이 날씨가 추워지고 양식이 다 떨어지자 요주遼州와 개주盖州 두 곳에 호구戶口들을 먼저 징발해 요하遼河를 건너가게 한 뒤, 바로 성 아래에서 병사의 위세를 떨치며 회군했다. 성 안에서 모두 자취를 감춘 채 나오지 않았고, 성주城主가 성 위로 올라와 인사를 하자 태종이 굳건히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비단 100필匹을 하사했다.”
注
내가 살펴보건대, 요동遼東의 정벌征伐은 이전의 의병義兵과 차이가 있다.
태종이 뛰어난 무예로 군웅들이 앞다퉈 일어나는 때 난리를 평정하는 데에는 태종의 창날이 가리키는 곳에 오랑캐들이 그 예봉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만년엔 온 정성과 힘을 다했음에도 외진 나라 하나를 굴복시키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물러나며 안시성安市城 성주城主의 굳건히 지킨 절의를 가상히 여겨 상을 내려 표창해서 임금을 섬기는 자들을 격려했으니 이 뜻은 본디 훌륭한 것이다.
하지만 무武를 함부로 쓰지 않을 때의 온전한 아름다움만 못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