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宗自卽位之始
로 霜旱爲災
하여 米穀踊貴
하고 하여 州縣騷然
하니
帝志在憂人하여 銳精爲政하며 崇尙節儉하며 大布恩德이러라
是時
에 自京師
로 及河東
注+古冀州之域, 今河東道.河南
注+古兖州之域, 今河南等處.隴右
注+古梁州之域, 今陝西等處.히 饑饉尤甚
注+饑, 音飢. 饉, 音僅. 穀不熟曰饑, 菜不熟曰饉.하여 一匹絹
에 纔得一斗米
라
至貞觀三年
하여 關中
注+漢書, 關中左殽‧函, 右隴‧蜀. 太宗分天下爲十道, 此爲關西, 唐建都之地也, 今陝西省.豐熟
하여 咸自歸鄕
하여 竟無一人逃散
하니 其得人心
이 如此
요
加以從諫如流
하고 雅好儒術
注+一作學. 好, 去聲.하여 孜孜求士
하여 務在擇官
하고 改革舊弊
하여 興復制度
하니 每因一事
하여 觸類爲善
이러라
初
에 息隱海陵之黨
注+息隱, 高祖長子也, 名建成. 初立爲皇太子. 海陵, 高祖第四子也, 名元吉. 初封齊王. 建成荒色嗜酒, 畋遊無度, 見秦王功高, 與元吉謀害秦王. 秦王知之, 遂殺二人. 旣卽帝位, 乃封建成爲息王, 謚曰隱. 元吉爲海陵王, 謚曰剌.이 同謀害太宗者
가 數百千人
이나 에 復引居左右近侍
어늘 心術豁然
하여 不有疑阻
하니 時論
이 以爲能斷決大事
하여 得帝王之體
러라
深惡官吏貪濁
注+惡, 烏去聲.하여 有枉法受財者
하면 必無赦免
하고 在京
에 有犯贓者
면 皆遣執奏
하여 隨其所犯
하여 置以重法
하니
制馭王公妃主之家
와 大姓豪猾之伍
하니 皆畏威屏跡
注+屏, 音餅.하여 無敢侵欺細人
하고 商旅野次
호되 無復盜賊
하고 囹圄常空
注+囹, 音零. 圄, 音語. 周獄名也.하고 馬牛布野
하며 外戶不閉
요
行旅自京師
로 至于嶺表
注+五嶺之外, 今二廣之地.하며 自山東
으로 至于滄海
注+山東, 古冀州之域, 今濟南等路. 滄海, 東海之名也.히 皆不賚粮
하고 取給於路
하고 入山東村落
하여 行客經過者
注+過, 平聲.는 必厚加供待
注+供, 平聲.하며 或發時有贈遺
注+去聲, 饋送也.하니 此皆古昔未有也
라
其除隋之亂은 比迹湯武요 致治之美는 庶幾成康이로다
至其牽於多愛하여 復立浮屠하고 好大喜功하여 勤兵於遠은 此中材庸主之所常爲라
太宗之爲君也는 屈己從諫하여 仁心愛人하니 可謂有天下之志요
以
任民
하고 以
任兵
하며 以職事任官
하고 以才能任職
하며 以興義任俗
하고 以尊本任衆
이라
賦役有定制하고 兵農有定業하며 官無虛名하고 職無廢事라
人習於善行하고 離於末作하며 使之操於上者는 要而不煩하고 取於下者는 寡而易供이라
民有農之實하여 而兵之備存하고 有兵之名하여 而農之利在라
事之分有歸하여 而祿之出不浮하며 材之品不遺하여 而治之體相承이라
以其法修則安且治하고 廢則危且亂하니 可謂有天下之材요
行之數歲에 粟米之賤이 斗至數錢하니 居者有餘蓄하고 行者有餘貲하여 人人自厚하여 幾於刑措하니 可謂有治天下之效를
有是三者로대 而不得與先王竝者는 法度之行과 禮樂之具와 田疇之制와 庠序之教가 擬之先王하면 未備也일새라
躬親行陣之間하여 戰必勝하고 攻必取하니 天下莫不以爲武나 而非先王之所尙也요 四夷萬古所未及以政者가 莫不服從하여 天下莫不以爲盛이나 而非先王之所務也라
太宗이 文武之才로 高出前古하여 驅策英雄하고 網羅俊乂하며 好用善謀하고 樂聞直諫하여 拯民於水火之中하여 而措之袵席之上하고 使盜賊化爲君子하고 呻吟轉爲謳歌하며 衣食有餘하고 刑措不用하며 突厥之渠가 繫頸闕庭하고 北海之濱이 悉爲州縣하니 蓋三代以還으로 中國之盛이 未之有也라
太宗이 以武撥亂하고 以仁勝殘하니 其材略이 優於漢高나 而規摹不及也요 恭儉이 不若孝文이나 而功烈過之矣라
迹其性本彊悍이나 而能畏義而好賢하고 屈己以從諫하며 刻厲矯揉하고 力於爲善하니 此所以致貞觀之治也라
夫人主之所行은 其善惡是非가 在後世로되 當其時엔 不可得辨也라
老子曰
라하니 人君
이 擇其善者而從之
하면 足以得師
요 其不善者而戒之
하면 足以爲資矣
리라
太宗擧兵五年에 定海内하여 率天下於仁壽富庶之域者하니 亦以天下之才로 爲天下之務而已라
觀其任王珪魏徵於仇讐하고 任褚亮李百藥於降虜하고 起劉洎馬周於疎遠하고 起張玄素孫伏伽於耆舊하여 委之以政하고 責之以功하며 諫無不從하고 謀無不獲하니 且太宗之才는 固非天下之所能及이라
然而不以此驕天下之士
하고 惴惴然常若有所不逮
하니 此其所以能爲
之基也
라
愚按 太宗之爲君은 可以爲賢矣요 貞觀之治는 可以爲盛矣라
今卽其行事觀之하면 内除群雄하고 外定四夷하며 身經百戰호되 未嘗負北하니 後世人君之功이 未有高焉者也라
其君人之大德有三하니 一曰 謙虛納諫이요 二曰 知人善任이요 三曰 恭儉愛民이니
定租庸調하여 以爲取民之制하고 定府兵十六衛하여 以爲養兵之制하며 任官엔 則有職爵勲階之制하고 用刑엔 則有笞杖徒流之制하니 後世制度之美가 莫能加也라
命房杜以爲相
하고 以爲將
하며 王魏之諫爭
과 褒鄂之驍勇
과 虞褚之詞翰
으로 下至孫思邈之醫藥
과 李淳風之曆數
와 袁天綱之相法
히 莫不至精至妙
하여 度越千古
하니 後世人才之盛
이 莫能及也
라
夫功也德也制度也人才也가 其盛如此로되 而卒不得與於二帝三王之盛者는 何哉오
蓋嘗觀之컨대 古先帝王이 雖其天資之美라도 未有不由學問而成者也니
若高宗之
과 成王之
이 泰和盛治
하여 冠冕百王
은 有以也夫
인저
太宗
이 外親
之賢
하고 内立
하여 未嘗不學也
나 特非二帝三王之學耳
라
使其能從事於二帝三王之學인댄 又豈特貞觀之治而已哉리오
태종太宗이 즉위한 초기부터 서리와 가뭄의 재앙이 있어 곡식 값이 뛰고 돌궐突厥이 침략하여 주현이 소란하였다.
태종은 마음이 백성들을 걱정하는 데 있어서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하며, 근검절약을 숭상하고 크게 은덕을 폈다.
이때에 장안으로부터
하동河東注+하동河東은 옛 기주冀州의 지역이니, 지금 하동도河東道이다.‧
하남河南注+하남河南은 옛 연주兖州의 지역이니, 지금 하남河南 등의 지역이다.‧
농우隴右注+농우隴右는 옛 양주梁州의 지역이니, 지금 섬서陝西 등의 지역이다.에 이르기까지 기근이 더욱 심해
注+기饑는 음이 기飢이고, 근饉은 음이 근僅이다. 곡식이 익지 않은 것을 기饑라 하고, 채소가 익지 않은 것을 근饉이라고 한다. 비단 한 필에 겨우 쌀 한 말을 얻을 수 있었다.
백성들이 비록 동서로 먹을 것을 찾아다녔지만 조금도 원망하거나 한탄한 적이 없어 스스로 평안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정관貞觀 3년(629)이 되자
관중關中注+《한서漢書》 권40 〈장진왕주열전張陳王周列傳〉에 “관중의 왼쪽이 효산殽山과 함곡관函谷關이고 오른쪽이 농隴과 촉蜀이다.”라고 하였다. 태종太宗이 천하를 나누어 10도道로 만들었는데, 여기는 관서關西이다. 당唐나라가 도읍을 세운 곳이니 지금의 섬서성陝西省이다. 지역이 풍년이 들어 모두 스스로 고향으로 돌아가고 마침내 한 사람도 도주해 흩어진 자가 없었으니, 태종이 인심을 얻은 것이 이와 같았다.
게다가 마치 물이 흐르듯이 간언을 잘 따르고 평소
유술儒術을 좋아하여
注+〈술術은〉 어떤 본에는 학學으로 되어 있다. 호好(좋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부지런히 선비를 찾아서 관원을 발탁하는 데 힘썼으며 과거의 폐단을 개혁하여 제도를 부흥시키니, 매번 한 가지 일로 인해 유사한 일을 만날 때마다 잘 처리하였다.
애초에
고조高祖의 장자인
식은왕息隱王(이건성)과 넷째 아들인
해릉왕海陵王(이원길)의 무리로서
注+식은息隱은 고조高祖의 장자이니, 이름은 건성建成이다. 처음에 황태자로 세워졌다. 해릉海陵은 고조高祖의 넷째 아들이니, 이름은 원길元吉이다. 처음에 제왕齊王에 봉해졌다. 이건성李建成이 여색에 빠지고 술을 즐기며 사냥을 나가는 것이 한도가 없었다. 진왕秦王(太宗)의 공이 높은 것을 보고 이원길李元吉과 도모하여 진왕을 해치려고 하였는데, 진왕이 이를 알아차리고 마침내 두 사람을 죽였다. 황제에 즉위하고 나서 이건성을 봉하여 식왕息王으로 삼고 시호를 은隱이라고 하였다. 이원길은 해릉왕海陵王으로 삼고 시호를 날剌이라고 하였다.태종太宗을 해치려고 함께 모의한 자가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렀지만 일이 평정되자 다시 데려다 측근에 두고 가까이에서 모시게 하였는데, 태종은 마음이 트여서 의심하거나 멀리하지 않으니, 당시 여론이 그가
대사大事를 잘 결단하여 제왕으로서의 체통을 얻었다고 하였다.
탐관오리貪官汚吏를 매우 싫어하여
注+악惡(미워하다)는 오烏의 거성去聲이다. 법을 악용해 재물을 받은 자가 있으면 반드시 사면하지 않았고, 서울에 있는
유외관流外官 중에 뇌물죄를 범한 자가 있으면 모두 아뢰게 하여 침해한 정도에 따라 엄중한 법을 시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관리들이 대부분 저절로 청렴하고 근신해졌다.
태종이 왕공‧후비‧공주의 집안과
세가世家와 매우 교활한 무리를 통제하니, 모두 위엄을 두려워하여 자취를 감춰
注+병屛(가리다)은 음이 병餠이다. 감히 백성들을 침탈하거나 속이는 경우가 없었고, 상인과 나그네가 들에서 머물더라도 다시 도적이 없었으며, 감옥은 늘 텅 비었고,
注+영囹은 음이 영零이고, 어圄는 음이 어語이다. 〈영어囹圄는〉周나라의 감옥 이름이다. 말과 소는 산과 들에 널려 있었고, 바깥문은 닫지 않았다.
또 자주 풍년이 들어서 쌀 한 말이 3, 4전에 불과하였다.
나그네는 장안에서
영표嶺表,
注+〈영표嶺表는〉五嶺의 밖이니, 지금 이광二廣(廣東과 광서廣西)의 땅이다. 산동에서 동해에 이르기까지
注+산동山東은 옛 기주冀州의 지역이니, 지금 제남로濟南路 등이다. 창해滄海는 동해東海의 이름이다. 모두 양식을 싸가지고 다닐 필요 없이 길에서 조달할 수 있었고 산동의 촌락에 들어가면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注+과過(지나다)는 평성平聲이다.반드시 후하게 대접해주었으며
注+공供(제공하다)은 평성平聲이다. 혹 나그네가 떠날 때는 음식을 주어서 보내니,
注+〈유遺는〉去聲이니, 음식을 주어서 보낸다는 뜻이다. 이는 모두 옛날에 없던 일이다.
수隋나라의 혼란을 제거한 일은 자취가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에 견줄 수 있고, 치적을 이룩한 아름다움은 거의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에 가깝다.
예로부터 공과 덕이 겸하여 높은 것은 한漢나라 이래로 아직 없었다.
태종에 이르러서는 후비后妃를 사랑하는 데 끌리고 또 불교를 일으켰으며, 큰일을 벌이기 좋아하고 큰 공적을 세우기 좋아하여 먼 곳에 용병用兵하여 전쟁을 하였으니, 이는 중간 재질의 어리석은 임금이 항상 하는 짓이다.
그러나 춘추春秋의 필법은 어진 이에게 모든 선善이 갖춰지기를 요구한다.
이 때문에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려는 후세의 군자들이 이 점에 대해 탄식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태종太宗이 임금 노릇을 한 것은 자기를 굽히고 간언을 따라 어진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였으니, 천하를 다스리는 뜻이라 할 만하다.
조용租庸을 백성에게 맡기고 부위府衛를 군대에 맡기며, 직분의 일을 관원에게 맡기고 재능 있는 사람에게 직책을 맡기며, 의리를 일으키는 일을 풍속에 맡기고 농업을 존중함을 대중에게 맡겼다.
조세와 부역에는 정해진 제도가 있고 병사兵事와 농사農事에는 정해진 일이 있으며, 관원은 헛된 명칭이 없고 직책은 폐기된 일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행을 익히고 상공업을 멀리하였으며, 위에서 잡고 있는 것은 요약하여 번거롭지 않게 하고 아래에서 취한 것은 적어서 공급하기 쉽게 하였다.
백성에게 농사의 실적이 있어 병사의 대비가 있게 되었고, 병사에 명분이 있어 농사의 이로움이 있게 되었다.
일의 분장은 귀속함이 있어 녹봉의 지출은 낭비됨이 없었으며, 인재의 품등은 버릴 것이 없어 정치의 체제는 서로 이어졌다.
예의와 염치가 날로 돈독해졌고 전야田野가 날로 개척되었다.
이 때문에 그 법이 닦이면 편안하고 또 다스려지며, 폐기되면 위태롭고 또 혼란하게 되었으니, 태종은 천하를 다스릴 재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를 몇 년 동안 행하자 곡식 값이 싸져서 한 말에 몇 전에 불과하였으며, 거류하는 자는 넉넉한 저축이 있었고 길을 가는 자는 넉넉한 재물이 있어서 사람들이 저절로 온후해져 거의 형벌을 쓰지 않게 되었으니, 천하를 다스리는 효과가 있었다고 말할 만하다.
이 세 가지가 있었으나 선왕들과 나란히 견줄 수 없는 것은 법도를 행하는 것과 예악을 갖추는 것, 토지의 제도와 학교의 가르침을 선왕들과 비교하면 아직 갖추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몸소 친히 행군하는 동안 전쟁하면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취하니, 천하에서 무용이 있다고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선왕이 숭상한 것은 아니고, 사이四夷에 옛날부터 정사가 미치지 못했던 곳까지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는 경우가 없어서 천하에서 성대하다고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선왕이 일삼은 것은 아니다.
태종이 천하에 정사를 한 것이 이와 같았으니, 그 득실을 알 수 있다.”
“태종太宗이 학문과 무예의 재주로 전고前古에 높이 빼어나 영웅들을 부리고 준걸들을 망라하며, 좋은 계책을 쓰는 것을 좋아하고 직간을 듣는 것을 즐겨서, 백성들을 물과 불 같은 고난 속에서 건져서 이부자리 위에다 두고, 도적을 변화시켜서 군자가 되게 하고 신음을 바꾸어 노래하게 하며, 옷과 밥은 넉넉함이 있고 형벌은 버려 사용하지 않으며, 돌궐突厥의 우두머리가 대궐 뜰에서 목에 줄을 묶어 항복하고, 북해北海의 물가가 다 주州와 현縣이 되었으니, 삼대三代 이후로 없던 중국中國의 성대함이다.”
“태종太宗이 무력으로 혼란을 평정하고 인仁으로 잔악한 자를 이겼으니, 그 재주와 책략은 한漢나라 고조高祖보다 우수하였지만 규모는 미치지 못하였고, 공손하고 검소함은 효문제孝文帝만 못하였지만 공열은 그보다 뛰어났다.
그 성품을 살펴보면 본래 강하고 굳세지만 의義에 저촉할까 두려워하고 어진 이를 좋아하였으며, 자기를 굽혀 간언을 따르고 각고의 노력으로 자신을 바로잡았으며 선을 행하는 데에 힘썼으니, 이것이 정관貞觀의 치적을 이루게 된 까닭이다.
임금이 행하는 것은 선악과 시비가 후세에 남지만, 그 당시에는 분별을 하지 못한다.
노자老子가 ‘선인은 불선한 사람의 스승이며, 불선한 사람은 선인의 바탕이 된다.’라고 하였으니, 임금이 선한 자를 택하여 따르면 스승으로 삼기에 충분하고, 불선한 자를 경계하면 바탕으로 삼기에 충분할 것이다.”
“태종太宗이 전쟁을 한 지 5년 만에 해내海內를 평정하여 천하 사람들을 인仁하여 천수天壽를 누리며 부유하고 무리지어 사는 경지로 이끌어갔으니, 또한 천하의 재주로 천하의 일을 했을 뿐이다.
살펴보면 태종은 왕규王珪와 위징魏徵을 원수 중에서 임용하고, 저량褚亮과 이백약李百藥을 항복한 오랑캐 중에서 임용하고, 유계劉洎와 마주馬周를 소원한 사람들 중에서 기용하고, 장현소張玄素와 손복가孫伏伽를 원로 중에서 기용하여, 정사를 그들에게 맡기고 공을 그들에게 구하였으며, 간언은 따르지 않은 것이 없고 계책은 얻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또 태종의 재주는 참으로 세상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로로 천하의 선비들에게 교만하지 않고 두려워하여 항상 부족한 점이 있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이 300년의 기초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살펴보건대 태종太宗이 임금 노릇 한 것은 현명하다고 할 만하고, 정관貞觀의 치적은 성대하다고 할 만하다.
지금 그가 행한 일을 보면, 안으로는 여러 영웅들을 제거하고 밖으로는 사방 오랑캐를 평정하였으며 친히 모든 전쟁을 경략하되 패배한 적이 없었으니, 후세 임금으로 공이 이보다 높은 자는 아직까지 없었다.
그가 임금으로서 위대한 덕이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겸허하게 간언을 받아들인 점, 둘째는 사람을 알아보고 잘 맡긴 점, 셋째는 공손하고 검소하며 백성을 사랑한 점이다.
후세 임금으로 덕이 이보다 뛰어난 자는 아직까지 없었다.
조용조租庸調를 정하여 백성에게 취하는 제도를 만들고, 부병府兵 16위衛를 정하여 병사를 양성하는 제도를 만들며, 관리를 임명할 때는 직책‧작위‧공훈‧계급의 제도를 두었고, 형벌을 사용할 때는 태장笞杖‧도형徒刑‧유형流刑의 제도를 두었으니, 후세 제도의 아름다움이 능가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를 임명하여 재상으로 삼았고, 영공英公(李勣)과 위국공衛國公(李靖)을 장군으로 삼았으며, 왕규王珪와 위징의 간쟁, 포공褒公(段志玄)과 악공鄂公(尉遲敬德)의 용맹, 우세남虞世南과 저량褚亮의 문장, 그리고 아래로 손사막孫思邈의 의약醫藥, 이순풍李淳風의 역수曆數, 원천강袁天綱의 상법相法까지 지극히 정밀하고 지극히 오묘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천고에 탁월하였으니, 인재가 성대한 후세라 하더라도 미칠 수가 없었다.
공功‧덕德‧제도制度‧인재人才의 성대함이 이와 같았으나 마침내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의 성대함에 참여할 수 없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일찍이 살펴보건대 옛날 제왕帝王이 비록 타고난 자질의 아름다움이 있더라도 학문을 말미암지 않고 이룬 자는 없었다.
이제와 삼왕의 일은 오래되었으나 그들이 종사하여 배운 것은 오히려 뚜렷하여 상고할 수 있다.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옛 훈계를 배워서 얻음이 있는 것과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학문을 이어서 빛내 광명한 것이 크게 화합하여 성대하게 다스려서 백왕 중에 으뜸이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태종이 밖으로 영주瀛洲의 현인들과 친하고 안으로 홍문관弘文館을 세워서 배우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다만 이제와 삼왕의 학문이 아니었을 뿐이다.
만일 태종이 이제와 삼왕의 학문에 종사하였다면, 또 어찌 다만 정관貞觀의 치적에 그칠 뿐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