封德彝
注+名倫, 以字行, 觀州人. 初仕隋爲起居舍人, 佐虞世基以諂承主意. 後與宇文士及降唐, 以秘策干高祖, 爲秦王參謀軍事. 貞觀初, 拜右僕射. 卒謚曰明. 後以邪佞, 等
이 對曰
注+按, 無等字, 作非之曰.
三代以後
注+以, 一作之.에 人漸澆訛
注+上, 古聊切, 薄也. 下, 五禾切, 謬也.라
故秦任法律
注+謂秦之治, 專用刑法律令, 言尙酷也.하고 注+謂漢之治, 以王道霸道雜施之, 言不純也.하여 皆欲理而不能
이니
五帝
注+史記謂黄帝‧顓頊‧帝嚳‧唐堯‧虞舜爲五帝. 孔安國書序, 以少昊‧顓頊‧高辛‧唐‧虞爲五帝. 未詳孰是.三王
注+三王, 夏‧殷‧周創業之主, 禹‧湯‧武王是也.이 不易人而理
注+易, 如字.라
行帝道則帝하고 行王道則王하여 在於當時所理에 化之而已니 考之載籍하면 可得而知니이다
昔黃帝與蚩尤七十餘戰
하여 其亂甚矣
로대 旣勝之後
에 便致太平
注+黄帝, 姓公孫, 名軒轅, 號有熊氏. 蚩尤, 古諸侯之無道者. 蚩尤作亂, 黄帝徵師諸侯, 與戰於涿鹿之野, 遂禽殺之, 而萬國和.하고 九黎亂德
이어늘 顓頊征之
하여 旣克之後
에 不失其理
注+九黎, 蚩尤之屬也. 顓頊, 號高陽氏, 黄帝之孫也. 國語, 楚觀射父曰 “少皥氏之衰也, 九黎亂德, 人神雜糅, 不可方物. 顓帝承之, 乃命南正重, 司天以屬神, 火正黎, 司地以屬人.”하고 桀爲亂虐
이어늘 而湯放之
하여 在湯之代
에 旣致太平
注+桀, 夏王, 名履癸. 湯, 殷主, 名履. 桀不務德, 而賊傷百姓, 湯遂率兵伐之. 桀走鳴條, 遂放而死, 湯乃踐位, 平定四海.하고 紂爲無道
어늘 武王伐之
하여 成王之代
에 亦致太平
注+紂, 殷王, 名受. 武王, 周文王之子, 名發. 紂淫亂日甚, 百姓怨望, 武王遂率諸侯伐之, 紂死於鹿臺. 武王克殷二年, 太子誦立, 是爲成王.하니
若言人漸澆訛
하여 不及純樸
하면 至今應悉爲鬼魅
注+應, 平聲, 當也.리니 寧可復得而教化耶
리잇가
德彝等
이 無以難之
注+難, 去聲, 駁也.나 然咸以爲不可
注+以上文, 按係在四年.러라
봉덕이封德彝注+〈봉덕이封德彝는〉 이름은 윤倫이고, 자字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관주觀州 사람이다. 처음에 수隋나라에 벼슬하여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고, 우세기虞世基를 도와서 임금의 뜻을 아첨하여 받들었다. 후에 우문사급宇文士及과 함께 당唐나라에 항복하였고, 비책秘策으로 고조高祖에게 직위職位를 요구하여 진왕秦王의 참모군사參謀軍事가 되었다. 정관貞觀 초기에 우복야右僕射에 임명되었다. 세상을 떠나자 시호를 명明이라고 하고, 뒤에 간사하다고 하여 시호를 고쳐서 무繆라고 하였다. 등이 대답하였다.
注+살펴보면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등等자가 없고 비지왈非之曰이라고 되어 있다.
“
삼대三代 이후에
注+이以는 어떤 본에는 지之로 되어 있다. 사람들이 점점 경박하고 속이게 되었습니다.
注+위의 요澆는 고古와 요聊의 반절이니 경박하다는 뜻이고, 아래의 와訛는 오五와 화禾의 반절이니 속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진秦나라는 형법과 율령에 의지하고,
注+진秦나라의 다스림이 오로지 형법과 율령을 사용함을 이르니, 혹독함을 숭상하는 것을 말한다.한漢나라는
왕도王道와
패도霸道를 섞어 써서
注+한漢나라의 다스림은 왕도와 패도를 섞어서 시행하였음을 이르니, 순수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모두 다스리고자 하였으나 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위징의 말을 믿으시면
注+〈설說은〉 어떤 본에는 논論으로 되어 있다. 국가가 패망하여 어지러워질까 두렵습니다.”
“
오제五帝注+《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는 황제黄帝‧전욱顓頊‧제곡帝嚳‧당요唐堯‧우순虞舜을 오제五帝라고 하였고, 공안국孔安國의 《상서서尙書序》에는 소호少昊‧전욱顓頊‧고신高辛‧당唐‧우虞를 오제五帝라고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자세하지 않다.와삼왕三王注+삼왕三王은 하夏‧은殷‧주周를 창업創業한 군주이니 우왕禹王‧탕왕湯王‧무왕武王이 이 사람이다.은 백성을 바꾸지 않고 다스렸습니다.
注+역易(바꾸다)은 본래 음의音義대로 독해한다.
오제의 도道를 행하면 제帝가 되고 삼왕의 도道를 행하면 왕王이 되어 당시 다스리는 데 있어서 백성을 교화했을 뿐이니, 옛 전적을 살피면 알 수 있습니다.
옛날
황제黃帝가
치우蚩尤와 70여 번 전투를 하여 혼란이 심했는데 황제가 승리한 후에 곧 태평을 이루었고,
注+황제黄帝는 성姓이 공손公孫이고, 명名이 헌원軒轅이며, 호號는 유웅씨有熊氏이다. 치우蚩尤는 옛날 무도無道한 제후諸侯이다. 치우가 난을 일으키자 황제가 제후의 군대를 불러서 그와 탁록涿鹿의 들판에서 싸워 마침내 사로잡아 죽이니, 모든 나라가 화평하였다.구려九黎가 덕을 어지럽히자
전욱顓頊이 그들을 정벌하여 이긴 후에 다스리는 것을 그르치지 않았으며,
注+구려九黎는 치우蚩尤의 소속이다. 전욱顓頊은 호號가 고양씨高陽氏이니, 황제黄帝의 손자이다. 《국어國語》 〈초어楚語 하下〉에 초楚나라 관사보觀射父가 말하기를 “소호씨少皥氏가 쇠하자, 구려九黎가 덕을 어지럽혀 사람과 신을 맡은 관원의 일이 뒤섞여 명물名物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전욱이 이를 이어받아서 남정南正인 중重에게 명하여 하늘의 중신衆神을 모아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화정火正인 여黎에게 명하여 땅의 민중을 모아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걸왕桀王이 난리와 폭정을 일삼자
탕湯이 그를 내쫓아서
탕왕湯王의 시대에 이미 태평을 이루었고,
注+걸桀은 하夏나라 왕이니, 이름은 이계履癸이다. 탕湯은 은殷나라 군주이니, 이름은 이履이다. 걸왕桀王이 덕에 힘쓰지 않고 백성들을 해치자 탕이 마침내 군대를 거느리고 쳤다. 걸왕이 명조鳴條로 달아나자 마침내 추방하여 죽이고 탕이 임금 자리에 올라 천하를 평정하였다.주왕紂王이 무도하자
무왕武王이 정벌하여
성왕成王의 시대에 또한 천하가 태평성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注+주紂는 은殷나라 왕이니, 이름은 수受이다. 무왕武王은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아들이며, 이름은 발發이다. 주왕紂王의 음란함이 날로 심해져 백성들이 원망하자, 무왕이 마침내 제후를 거느리고 치니 주왕이 녹대鹿臺에서 죽었다. 무왕이 은殷나라를 무너뜨리고 2년 만에 태자 송誦을 세우니, 이 사람이 성왕成王이다.
만약 사람들이 점점 경박하고 속여 순박함에 미치지 못했다면 지금에 와서는 응당 다 귀신이 되었을 것이니,
注+응應은 평성平聲이니, 응당이라는 뜻이다. 어찌 다시 얻어서 교화할 수 있겠습니까.”
봉덕이 등이 더 위징을 논박하지 못하였으나
注+난難은 거성去聲이니, 논박하다는 뜻이다. 모두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注+이상의 글은 살펴보건대 《자치통감資治通鑑》 정관貞觀 4년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