夫以銅爲鏡하면 可以正衣冠하고 以古爲鏡하면 可以知興替하고 以人爲鏡하면 可以明得失이라
朕常保此三鏡하여 以防己過러니 今魏徵殂逝하여 遂亡一鏡矣라하다
昔惟魏徵이 每顯予過어늘 自其逝也에 雖過나 莫彰하니 朕豈獨有非於往時하고 而皆是於玆日이리오
言而不用은 朕所甘心이어니와 用而不言은 誰之責也오
自斯已後
로 各悉乃誠
하여 若有是非
면 直言無隱
注+按, 徵疾甚, 藥膳賜遺無筭, 上親問疾, 語終日. 後復與太子至, 徵, 上悲懣拊之, 將以衡山公主降其子叔玉. 時公主從, 上曰 “公强視新婦.” 徵不能謝. 及旦, 薨. 帝臨哭, 罷朝五日. 太子擧哀西華堂, 詔内外百官朝集皆赴喪, 晉王奉詔致祭, 陪葬昭陵. 上登苑西樓, 望哭盡哀.하라하다
魏公與文皇討論政術에 往復應對가 凡數十萬言이니 其匡過弼違하고 能近取譬하며 博約達類는 皆前代爭臣所不至者라
其實身正而心勁하여 上不負時主하고 中不阿權倖하며 内不侈親族하고 外不爲朋黨하며 不以逢時改節하고 不以圖位賣忠은 前代爭臣에 一人而已라
始徵之諫에 至君子小人하여 未嘗不反覆言之나 以邪佞之亂忠也를 久猶不免이라
故曰 皓皓者는 易汚하고 嶢嶢者는 難全이라하니 自古所歎云이라
太宗이 屈己以從群臣之議하니 而魏公之徒가 喜遭其時하고 感知己之遇하여 事之大小를 無不諫諍하니
或謂三代遺直者라하니 言其以至公爲心하고 而不以事形迹爲美하며 以後言爲戒하고 而不以卽應爲嫌하며 任强直之責하되 而不顧擅權之議하며 爲忠讜之論하되 而不畏誹謗之譏하니
此太宗貞觀之治를 獨歸於徵勸行仁義之效者는 其以此歟인저
責難於君을 謂之恭이요 陳善閉邪를 謂之敬이요 吾君不能을 謂之賊이라하니 此孟子之諫爭이니 徵有之矣라
魏公始終以規諫爲己任하여 唐史以爲前代爭臣에 一人而已라하니 豈不信哉아
文中子世家謂魏徵嘗從其學하여 受王佐之道라하니 先儒疑之나 觀其勸太宗行仁義면 則必有所本이라
然嘗論之컨대 有仁義之體하고 有仁義之用하여 正其心하고 修其身하여 而達之於國家天下면 無往而非仁義니 此二帝三王之所行에 兼體用之全者也라
心未必正
하고 身未必修
하여 假仁義以行之
면 而不免於利欲之雜
이라 然其愛人利物之功
과 禁暴止亂之政
이 亦有補於世教
하니 此
之所行
이라
觀魏公之所論諫컨대 卽事而言者多나 卽心而論者少하며 正救於已形者多나 而變化於未形者少하니 君臣之間에 相與策勵者는 黽勉於仁義之用而已라
故貞觀之治가 雖有志於三王이나 迄未能大異於五伯라
魏公正君之功
이 雖秦漢以下所難及
이나 而揆之
하면 則猶可憾焉
이라
蓋戰國策士는 多邪諂之言이나 而魏公所陳은 皆正大之論이니 是豈可同日語哉아
叔玠以王魏竝稱이나 考觀本末하면 蓋亦其流亞云이라
然嘗聞之컨대 孟子曰 人不足與適也며 政不足與間也니 惟大人이라야 爲能格君心之非라하니
蓋更一弊政하면 是一弊政而已요 去一小人하면 是一小人而已니
今觀魏公之諫疏컨대 大槪能裨益於政事나 而不能匡正於本原하고 能規諫於臨時나 而不能涵養於平昔하니 律以孟子之言하면 殆所謂過讁用人之非요 非間行政之失而已니 無乃於格心之道에 猶有所未至乎아
眞氏謂其卽事而言者多나 卽心而論者少하고 正救於已形者多나 變化於未形者少라하니 其知言哉인저
“구리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을 단정하게 할 수 있고, 옛일을 거울로 삼으면 흥망성쇠를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자기의 득실을 명확히 할 수 있소.
짐은 평소 이 세 종류의 거울을 구비해 나의 과실을 예방하였는데, 지금 위징魏徵이 세상을 떠나 마침내 거울 하나를 잃었소.”
이어서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다가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거 위징만이 항상 나의 허물을 드러내었는데, 그가 죽은 이후로는 내게 잘못이 있어도 드러내는 사람이 없으니, 짐이 어찌 과거에만 잘못을 저지르고 오늘날에는 전부 옳은 행동만 할 리가 있겠소.
그 이유는 또한 많은 관료들이 구차히 순종하기만 하고 용의 역린逆鱗을 거스르는 것을 어려워하기 때문일 것이오.
그래서 자신을 비우고 외면에서 구하여 의혹을 떨쳐버리고 내면으로 반성하려는 것이오.
注+〈성省(살피다)은〉 실悉과 정井의 반절이다.
간언을 했는데도 쓰지 않는다면 나는 그 책임을 달게 받겠지만 쓰려고 해도 간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겠소.
이 이후로 각자 그대들의 충성을 다하여 만일 옳고 그른 일이 있으면 직언하고 숨기지 마시오.”
注+사전史傳을 살펴보건대, 위징이 병이 심해지자 하사한 약물과 음식을 이루 셀 수가 없었고, 태종太宗이 직접 병문안을 가서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후에 다시 태자와 함께 방문하자 위징이 조복을 몸에 덮고 옷 위에 띠를 얹어놓고 있었다. 태종太宗이 슬퍼 안타까워하면서 그를 어루만지며 형산공주衡山公主를 그의 아들 숙옥叔玉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하였다. 그때 공주가 함께 갔는데, 태종이 “공은 억지로라도 신부를 보시오.”라고 하니, 위징이 사양하지 못했다. 아침이 되어 세상을 떠났는데, 태종이 찾아가서 곡을 하고 5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다. 태자太子는 서화당西華堂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내외의 모든 관리들에게 조서를 내려 조정에 모여 모두 상가에 조문을 가게 하였는데, 진왕晉王(李治, 후일 고종高宗)이 조서를 받들고 가서 제사를 지내고, 소릉昭陵에 배장陪葬(묘역에 딸려 장사 지냄)하였다. 태종이 원서루苑西樓에 올라 바라보며 곡을 하고 몹시 슬퍼하였다.
“위징魏徵이 태종太宗과 정술政術을 토론함에 말을 주고받으며 응대한 것이 모두 수십만 마디인데, 임금의 과오를 바로잡고 가까운 데서 취하여 비유하며 널리 학문을 닦고 예禮로써 요약하여 여러 부류에 통달한 것은 모두 이전 시대에 간언하는 신하들이 미치지 못한 점이다.
그 실제는 몸이 바르고 마음이 굳세어 위로는 당시의 군주를 저버리지 않고, 중간으로는 총애를 받는 권신權臣에게 아부하지 않으며, 안으로는 친족을 사치하게 하지 않고, 밖으로는 붕당朋黨을 짓지 않으며, 때에 따라 절조를 바꾸지 않고, 지위를 탐내어 충성을 팔지 않은 것은 이전 시대에 간언하는 신하 중에 위징 한 사람뿐이다.”
위징 같은 충신과 태종太宗 같은 성군聖君 사이에도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심과 참소가 갑자기 일어났다.
처음에 위징이 간언할 적에 군자와 소인에 대하여 되풀이하여 말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사특하고 아첨하는 이들이 충신을 비방하는 일을 오래도록 오히려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므로 ‘깨끗한 사람은 더럽혀지기 쉽고, 강직한 사람은 온전하기가 어렵다.’라고 하였으니, 옛날부터 탄식하던 말이다.”
“태종太宗이 자신을 낮추어 여러 신하들의 논의를 따르자 위징의 무리는 좋은 때를 만난 것을 기뻐하고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만난 것에 감동하여 크고 작은 일을 간언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비록 그들의 충성과 정직함이 저절로 오게 한 것이지만 또한 훌륭한 임금을 만나서 그렇게 된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삼대三代의 곧은 유풍遺風을 지닌 사람[三代遺直]’이라고 하였으니, 지극히 공정함을 마음속에 지니고 일의 자취를 아름답게 여기지 않으며, 뒷말하는 것을 경계하고 즉시 응대하는 것을 꺼리지 않으며, 강직하게 간언하는 책임을 맡되 정권을 좌지우지하는 자들의 의론을 돌아보지 않으며, 충성스럽고 곧은 논의를 펴되 남이 비방할까 두려워하지 않음을 말한다.
태종太宗의 정관지치貞觀之治를 다만 위징이 인의仁義를 실천하라고 권면한 효과로 귀결시키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임금에게 하기 어려운 일을 하도록 요구하는 것을 공손하다고 하고, 선도善道를 개진하여 임금의 사심邪心을 막는 것을 공경한다고 하고, 우리 임금은 그렇게 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해친다고 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맹자孟子》 〈이루離婁 상上〉에서 말한 간언의 방법인데, 위징魏徵이 이러한 점을 지니고 있었다.”
“위징魏徵이 시종일관 규간規諫(바른말로 간언)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서, 당사唐史(《舊唐書》 권71 〈위징열전魏徴列傳〉)에서 ‘이전 시대에 간언하는 신하 중에 한 사람뿐이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 학문의 연원을 고찰해보면 거의 찾을 수가 없다.
《중설中說》 권10 〈문중자세가文中子世家〉에 ‘위징이 일찍이 학문에 종사하여 왕자王者를 보좌하는 도리를 배웠다.’라고 하였는데, 선유先儒들이 의심하였으나 태종太宗에게 인의仁義를 실천하라고 권면한 사실을 보면 반드시 학문에 근원이 있다.
그러나 일찍이 논하건대 인의仁義의 체體가 있고 인의仁義의 용用이 있어서 마음을 바로잡고 몸을 닦아 국가와 천하에 미치게 하면 무엇을 하든 인의仁義가 아님이 없을 것이니, 이는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의 행동에 체용體用의 완전함까지 겸비한 것이다.
마음이 아직 반드시 바르지는 않고, 몸이 아직 반드시 닦이지는 않아서 인의仁義를 빌려 실천하면 이익과 욕심이 그 사이에 뒤섞이는 것을 면하지 못하나 사람을 사랑하고 사물을 유익하게 해주는 공로와 포악한 행동을 금지하고 난리를 그치게 하는 정치가 또한 세교世教에 보탬이 있으니, 이는 제齊 환공桓公과 진晉 문공文公이 행한 것이다.
이는 인의仁義의 쓰임을 흉내 내었지만 그 본체는 순수하지 못하다.
태종은 수隋나라의 혼란을 평정하여 몸소 태평성대를 이루었으니, 위대하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마음에서 말미암아 몸에 이르고, 몸에서 말미암아 집안에 이르게 하는 데 있어서는 참덕慙德(부끄러운 마음)이 있었다.
위징의 논의와 간언을 보건대 일에 대해 말한 것은 많으나 마음에 대해 논한 것은 적으며, 이미 드러난 데에서 바로잡은 것은 많으나 드러나기 전에 변화시킨 것은 적었으니, 군신 사이에 서로 함께 독려한 것은 인의仁義의 용用을 힘써 권면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정관貞觀의 정치가 비록 삼왕三王에 뜻을 두기는 했지만 결국 오패五伯와 크게 다르지 못하였다.
위징이 임금을 바로잡은 공은 비록 진秦‧한漢 이래로 미치기 어려운 것이지만 이윤伊尹‧부열傅說‧주공周公‧소공召公과 비교해보면 오히려 유감이 있다.
혹자는 종횡가縱橫家의 학문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또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전국戰國시대 책사策士들은 사특하고 아첨하는 말들을 많이 했지만 위징이 간언한 것은 모두 정대正大한 논의이니, 어찌 동일시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숙개叔玠(王珪의 자)가 왕위王魏(王珪와 위징魏徵)로서 나란히 일컬어지지만 본말本末을 고찰해보면 또한 그 아류亞流이다.”
내가 살펴보건대 위정공魏鄭公처럼 간언을 한 사람은 양한兩漢 이래로 한 사람뿐이다.
사서史書에 칭하기를 ‘삼대三代의 곧은 유풍遺風을 지닌 사람[三代遺直]’이라고 하였으니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일찍이 듣건대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등용한 인물에 대해 임금과 더불어 일일이 다 허물할 수 없으며, 잘못된 정사를 임금과 더불어 일일이 다 흠잡을 수 없으니, 오직 대인이라야 임금의 그릇된 마음을 바로잡을 수가 있다.’라고 하였다.
한 번 잘못된 정치를 바꾸면 이는 한 번 잘못된 정치일 뿐이며, 한 명의 소인을 제거하면 이는 한 명의 소인일 뿐이다.
그릇된 마음이 남아 있다면 나는 소인을 이루 다 제거하지 못하고 잘못된 정치를 이루 다 바꾸지 못할까 염려된다.
지금 위징魏徵의 간언과 상소를 보건대 대개 정치에 도움이 되고 유익하지만 본원本原을 바로잡지는 못하였고, 때에 맞춰 규간規諫했지만 평소에 함양하지는 못했으니, 맹자의 말로 단언해보자면 이른바 사람을 잘못 등용한 것을 일일이 허물하고 잘못된 정사를 일일이 흠잡는 것에 가까우니,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도道에 오히려 미진한 점이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정자程子(程頤)는 말하기를 ‘임금을 바로잡을 수는 있으나 덕을 함양하게 하지는 못한다.’라 하였고,
진씨眞氏(眞德秀)는 말하기를 ‘일에 대해 말한 것은 많으나 마음에 대해 논한 것은 적고, 이미 드러난 뒤에 바로잡은 것은 많으나 드러나기 전에 변화시킨 것은 적다.’라고 하였으니, 아마도 말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