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見君固執不已하고 疑君蔽此事러니 今論國家不信하면 乃人情不通이라하니
太宗即位之初에 首欲以誠信待物하니 可謂能以湯武爲法者矣라
故魏徵歷陳其目하여 謂原免逋債로되 而秦府不與는 一不信也요
“나는 그대들이 고집하여 물러서지 않는 것을 보고 그대들이 이 일에 어둡다고 의심했는데, 지금 논하기를 ‘국가가 신뢰가 없으면 백성의 마음과 소통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소.
내가 이를 세심히 생각하지 못했으니 과실이 또한 크오.
정무가 이따금 이처럼 잘못되면 어떻게 다스릴 수 있겠소.”
이에 중남中男의 징발을 정지하고, 위징魏徵에게는 금옹金甕 1구口를 하사하고 왕규王珪에게는 비단 50필을 하사했다.
【集論】내가 살펴보건대,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먹을 것을 버리고 병력은 버려도, 백성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면 존립存立하지 못한다.”라고 하였고,
탕湯임금이 천하를 소유하고 나서 〈중훼中虺가〉 가장 먼저 “덕이 드러나서 백성들에게 신뢰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하였고,
무왕武王이 천하를 소유하고 나서 가장 먼저 “신의를 돈독히 하고 의리를 밝히겠다.”라고 하였으니,
삼대三代 시대에 천하를 얻을 때 신의를 우선으로 삼지 않음이 없었다.
태종太宗이 즉위 초기에 우선 진실과 신뢰로 사람을 대하려 하였으니,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을 법으로 삼았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그저 신뢰해야 한다는 것만 알고 신뢰해야 하는 이유는 몰랐다.
그래서 위징魏徵이 그 조항을 낱낱이 거론하여 “포탈한 세금과 빚을 면제했는데 진왕부秦王府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 첫 번째 불신이고,
세금을 나누어주기로 하고 이미 나누어준 것을 다시 징수한 것이 두 번째 불신이고,
장정을 간택하고 점검하는 것을 수령守令에게 맡기지 않은 것이 세 번째 불신이다.”라고 하자,
임금과 신하가 물과 물고기처럼 떨어질 수 없는 것은 실로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니, 결국 정관貞觀의 성대한 정치를 완성한 것은 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