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眚은 過誤也요 災는 不幸也라 故肆赦之라 怙는 有恃也요 終은 再犯也라 故賊刑之라 此聖人用法之權衡이요 而忠厚之意를 寓於其間하니 未聞不擇罪之輕重而悉赦之也라
雷動而雨作하여 天澤所施溥矣어늘 而曰 赦過宥罪라하니 過之小者를 赦釋之하고 罪之大者를 寬宥之而已라 亦非謂不擇罪之大小而悉赦之也라
故春秋莊公之世肆大眚을 聖人以爲非常之事라하여 書之於經은 正以其非古也어늘 自是而赦令數矣라
然或者因天下有非常之事와 與夫凶荒流離之後와 盗賊垢汙之餘에 於是有以沛然洗濯於天下하여 不得已而用之는 猶云可也어니와
否則雖足以見仁惠라도 而未免所謂小人之幸이나 而君子之不幸矣라
爲人上者가 操刑賞之柄하여 以勸善懲惡으로 酌古之道하고 揆今之宜하여 必赦過宥罪而不可數이 要爲得中也라
太宗謂絶不放赦나 而四海安寧하니 非常之恩을 彌不可數이라하니 其深有見於治道者哉인저
注
마존馬存이 말하였다. “선왕先王이 가르침으로 백성을 교화하고 형벌로 백성을 금지시켰으나 불행하게도 법망法網에 빠진 자들이 있었다. 성인聖人은 그 실정을 추구하여 과실의 크고 작은 정도를 살펴서 사면을 시켜주었다.
사면은 성인이 이로 인해 과오를 용서해주는 것이다. 시행할 수 있는데 시행하지 않으면 인仁을 손상하고, 시행해서는 안 되는데 시행하면 의義를 그르치게 된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논의하는 자들은 드물게 시행하는 것이 옳고 자주 시행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경우가 있으며, 자주 시행하는 것이 옳고 드물게 시행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하니, 드물게 시행하는 경우는 너무 간략하고, 자주 시행하는 경우는 너무 번잡하다.
다만 마땅히 마땅한지의 여부만 말해야지, 드물거나 자주 하는 정도를 논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주례周禮》 〈추관秋官 사자司刺〉에 삼유三宥와 삼사三赦의 법이 있었다.
〈삼유三宥는〉 모르고 한 것[불식不識], 과실로 저지른 것[과실過失], 잊어버리고 빠뜨린 것[유망遺忘]이니, 용서를 씀은 이와 같은 경우에 그쳐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삼사三赦는〉 8세가 안 된 어린이[유약幼弱], 80세 이상의 늙은이[노모老耄], 어리석은 사람[준우惷愚]이니, 사면을 행함은 이와 같은 경우에 그쳐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이를 말미암아 살펴보건대 용서하는 법은 적절한 때에 시행하면 천하의 이익이 되고 적당하지 않은 때에 사용하면 천하의 해가 된다. 그러므로 노魯나라에서 큰 실수를 범한 자를 풀어준 것을 《춘추春秋》에서 비판하였다.
관중管仲이 또한 말하기를 “용서를 하는 것은 작은 이익이 있으나 해가 크니, 오래도록 시행하면 그 재앙을 이루 다 감당할 수 없고, 용서를 하지 않는 것은 해가 작으나 이익이 크니, 오래도록 시행하면 그 복을 이루 다 감당할 수 없다.” 라고 하였다.
천하의 백성들이 용서가 불러오는 복은 알지만 용서를 하지 않는 것이 복이 되는 줄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니, 이 역시 용서의 논의 중에 대단한 것이라 하겠다.”
注
내가 살펴보건대, 《서경書經》 〈우서虞書 순전舜典〉에 이르기를 “과오와 불행으로 인해 죄를 지은 자는 풀어주고, 믿는 이가 있어 다시 죄를 저지른 자는 사형을 내린다.” 라고 하였다.
생眚은 과오이고, 재災는 불행이므로 풀어주는 것이다. 호怙는 믿는 자가 있는 것이고, 종終은 다시 범법하는 것이므로 사형을 내리는 것이다. 이는 성인이 법을 사용하는 기준이고, 충후忠厚한 뜻을 그 속에 붙인 것이니, 죄의 경중輕重을 가리지 않고 용서해주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주역周易》 해괘解卦 〈상전象傳〉에 이르기를 “우레(☳)와 비(☵)가 해괘解卦(䷧䷧)를 이루니, 군자가 그것을 본받아 과오를 용서하고 죄가 있는 이를 풀어준다.” 라고 하였다.
우레가 치고 비가 내려 하늘의 은택이 넓게 베풀어지거늘 “과오를 용서하고 죄가 있는 이를 풀어준다.” 라고 하였으니 과오가 작은 사람을 풀어주고 죄가 큰 사람을 용서해주는 것일 뿐이므로, 이 역시 죄의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모두 풀어주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에 장공莊公 때에 큰 사면령을 내린 것을 성인이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라 여겨 경문經文에 기록한 것은 바로 옛 법이 아니기 때문인데, 이로부터 사면령이 자주 시행되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천하에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 있을 때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떠돌게 되거나 도적들에 의해 더럽혀지고 나서, 성대하게 천하를 말끔히 새롭게 하기 위해 부득이하여 행하는 것은 오히려 괜찮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어진 은혜를 충분히 보인다고 하더라도 이른바 ‘소인에게는 요행이나 군자에게는 불행이다.’라는 경우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형벌과 상을 집행하는 권력을 쥐고서 권선징악勸善懲惡으로 옛날의 도를 참작하고 현재의 마땅함을 헤아려 과오를 용서하고 죄가 있는 이를 풀어주되, 자주 시행하지 않는 것이 요컨대 중도中道를 얻는 것이 된다.
태종이 말하기를 “절대로 사면을 시행하지 않았으나 천하가 안정되었으니, 특별한 은혜를 더욱 자주 내려서는 안 된다.” 라고 하였으니, 다스림의 도를 매우 잘 알았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