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宗有一駿馬하여 特愛之하여 恒於宮中養飼러니 無病而暴死어늘 太宗怒하여 養馬宮人을 將殺之한대
昔
에 齊景公이 以馬死殺人注+齊景公, 名杵臼.커늘 晏子
가 請數其罪云
注+數, 上聲. 晏子, 名嬰, 字平仲, 齊大夫. 爾養馬而死
하니 爾罪一也
요 使公以馬殺人
을 百姓聞之
하면 必怨吾君
하리니 爾罪二也
요 諸侯聞之
하면 必輕吾國
하리니 爾罪三也
라하니 公乃釋罪
니이다
【集論】愚按 晏子諫齊景公에 有三罪之說은 其意가 美矣라
今觀太宗欲殺宮人之事하면 蓋亦有三失焉하니 何也오
不寶賢而寶駿馬는 則寶非其寶矣요 不任牧人而牧宮人은 則任非其任矣요 以馬死而欲殺人은 則刑非其刑矣니
則天이 時爲宮人하여 進而言曰 妾有三物하여 能御之하니
夫太宗使宮人養馬는 不過一時溺於嗜好而已어늘 孰知宮人之中에 有善御馬如則天者가 已潛擬於其後乎아
陛下高居
하사 寧濟蒼生
인댄 應須以欲從人
注+應, 平聲.이요 不可以人從欲
이니이다
然則離宮遊幸
은 此秦皇漢武之事
注+始皇, 姓嬴, 名政, 國號秦. 武帝, 姓劉, 名徹, 國號漢.라 故非堯舜禹湯之所爲也
니이다하고
夫漢元은 庸君이요 則天은 女主로되 尙能改過不吝이온 況如太宗之素號納諫者乎아
思廉九成之諫은 非不切也로되 太宗氣疾之喩는 亦近於飾非矣라
是人君之過가 可以賄賂而免이요 人臣之直諫이 可以賄賂而移也니 太宗之賜와 思廉之受는 胥失之矣라
貞觀三年
에 李大亮
注+京兆人, 有文武才. 高祖入關, 自歸, 授土門令, 撃盗皆降, 擢金州司馬. 貞觀初, 授太府卿, 復出爲涼州都督, 俄爲西北道安撫大使, 以綏諸部降者. 八年, 討吐谷渾有功, 進爵爲公, 拜右衛將軍. 臨終, 表請罷遼東役.이 爲涼州都督
注+涼州, 今西涼州, 隷甘肅.할새 嘗有
至州境
注+使, 去聲, 後同.하여 見有名鷹
하고 諷大亮獻之
러니 大亮密表曰
陛下久絶畋獵이어시늘 而使者求鷹하니 若是陛下之意인댄 深乖昔旨요 如其自擅인댄 便是使非其人이니이다
태종太宗에게 한 필의 준마駿馬가 있어서 특별히 사랑한 나머지 언제나 궁궐 안에서 먹여 길렀는데도 병이 없이 갑자기 죽자, 태종이 노하여 말을 기르는 궁인宮人을 죽이려 하였다.
황후皇后가
注+〈황후皇后는〉 장손씨長孫氏이다. 간언하였다.
“옛날
제齊나라
경공景公이 말 때문에 사람을 죽이려 하자,
注+제齊 경공景公은 이름이 저구杵臼이다.안자晏子가 말을 기른 사람의
죄罪를 나열하여 꾸짖기를
注+수數(죄를 세어가며 꾸짖다)는 상성上聲이다. 안자晏子는 이름이 영嬰이고 자字가 평중平仲이며 제齊나라 대부大夫이다. ‘네가 말을 기르다 죽게 하였으니 너의 죄가 하나이고, 임금이 말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백성들이 듣게 되면 반드시 우리 임금을 원망할 터이니 너의 죄가 둘이고, 제후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우리나라를 경시할 터이니 너의 죄가 셋이다.’라고 하자, 경공이 바로 풀어주었습니다.
폐하께서 일찍이 글을 읽으시며 이 내용을 보셨을 터인데 어찌 잊으셨겠습니까.”
태종이 이내 노여움을 풀고 나서 방현령房玄齡에게 말하였다.
“황후가 많은 일들에 대해 마음을 열어 바로잡아주어 매우 보탬이 된다.”
【集論】내가 살펴보건대, 안자晏子가 제齊 경공景公에게 간언할 적에 세 가지 죄목의 말을 남긴 것은 그 뜻이 훌륭하다.
지금 태종太宗이 궁인宮人을 죽이고자 한 내용을 살펴보면 또한 세 가지 잘못이 있으니, 무엇인가.
현자를 보물로 여기지 않고 준마駿馬를 보물로 여긴 것은 제대로 된 보물이 아니고, 말을 목부牧夫에게 맡기지 않고 궁인宮人에게 기르게 한 것은 맡긴 것이 제대로 맡긴 것이 아니며, 말이 죽었는데 사람을 죽이려 한 것은 형벌하는 것이 제대로 된 형벌이 아니다.
만일 문덕황후文德皇后의 간언이 아니었다면 어찌 성대한 덕德에 누가 되지 않았겠는가.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태종에게 힘이 센 말이 있었는데 제어하지 못했다.
당시 궁인宮人이었던 측천則天(則天武后)이 나서서 말하기를 “첩妾에게 세 가지 물건이 있어 능히 말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철편鐵鞭(쇠 채찍)이니 그 등을 채찍질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철과鐵檛(쇠 채찍의 일종)니 그 머리를 채찍질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비수匕首니 그 목을 끊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태종이 장하게 여겼다.
태종이 궁인宮人에게 말을 기르도록 한 것은 한때 기호嗜好에 탐닉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궁인宮人 가운데 말을 잘 다룰 줄 아는 측천則天 같은 자가 이미 그 뒤에서 조용히 계획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정관貞觀 7년(633)에
태종太宗이
구성궁九成宮으로 행차하려
注+수인수궁야隋仁壽宮也. 하자,
산기상시散騎常侍 요사렴姚思廉이 간언을 올렸다.
“폐하께서 궁중에 높이 앉아 편안히 백성을 구제하시려면 응당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뭇사람들의 뜻을 따라야 하고,
注+응應(응당)은 평성平聲이다. 뭇사람들의 뜻을 자신의 욕심에 따르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황궁을 떠나 유람하시는 것은
진秦 시황始皇과
한漢 무제武帝의 일이므로,
注+시황始皇은 성姓이 영嬴이고 이름이 정政이니, 국호를 진秦이라고 하였다. 무제武帝는 성姓이 유劉이고 이름이 철徹이니, 국호國號를 한漢이라고 하였다. 요제堯帝‧
순제舜帝‧
우왕禹王‧
탕왕湯王이 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이 매우 절실하자, 다음과 같이 태종이 유시하였다.
“짐은 기질氣疾(호흡기와 관련된 병)이 있어서 날씨가 더우면 갑자기 심해지오.
그러므로 나의 본심이 놀기를 좋아해서 행차하는 것은 아니오.
注+호好(좋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하지만 경卿의 생각을 매우 가상하게 여기오.”
【集論】내가 살펴보건대, 한漢 원제元帝가 누선樓船을 타려 하다가 설광덕薛廣德의 간언 때문에 멈추었고,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사리舍利를 구경하려 하다가 적인걸狄仁傑의 간언 때문에 멈추었다.
한 원제는 용렬한 임금이고 측천무후는 여자 군주임에도 오히려 잘못을 바로잡는 데에 인색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평소 간언을 잘 받아들인다는 말을 듣는 태종太宗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요사렴姚思廉의 구성궁九成宮에 대한 간언은 절실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태종의 기질氣疾 때문이라는 유시는 또한 잘못을 얼버무리려는 데에 가깝다.
그리고 그 말을 따르지 않고 다시 비단까지 많이 하사하였다.
이는 임금의 과오가 뇌물로 인해 모면될 수 있고 신하의 직간直諫이 뇌물로 인해 바뀔 수 있는 것이니, 태종이 하사한 것과 요사렴이 받은 것은 서로 잘못된 것이다.
정관貞觀 3년(629)에
이대량李大亮注+〈이대량李大亮은〉京兆 사람이니, 문무文武를 겸비하였다. 고조高祖가 관중關中으로 들어오자 스스로 귀순하여 토문령土門令에 임명되었고, 도적들을 공격해 모두 항복시키자, 금주사마金州司馬로 발탁되었다. 정관貞觀 초기에 태부경太府卿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양주도독涼州都督으로 나가고, 얼마 뒤 서북도안무대사西北道安撫大使가 되어 제부諸部에서 항복한 자들을 안무按撫하였다. 정관貞觀 8년(634)에 토욕혼吐谷渾을 정벌하여 공을 세워 작호가 공公으로 승진되고 우위장군右衛將軍에 임명되었다. 세상을 떠날 무렵에 표문表文을 올려 요동遼東전쟁에서 철수할 것을 건의했다.이양주도독涼州都督으로 있었을 때
注+양주涼州는 지금의 서량주西涼州이니, 감숙甘肅에 속한다., 일찍이
대사臺使가
양주涼州의 경내에 와서
注+사使(사신)는 거성去聲이다. 뒤에도 같다. 유명한 매를 보고 이대량에게 임금께 헌상할 것을 넌지시 권유하자, 이대량이 비밀
표문表文을 올려 말하였다.
“폐하께서 오랫동안 사냥을 단절하셨는데 사자使者가 매를 요구하니, 이것이 만일 폐하의 뜻이라면 〈사냥을 하지 않으려는〉 원래의 뜻에 크게 위배된 것이며, 사자가 자기 마음대로 한 일이라면 이는 사자가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