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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1)

정관정요집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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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집론(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武德中 以平蕭銑輔公注+銑, 音跣. 祏, 音石. 蕭, 姓. 銑, 名. 後梁宣帝曾孫也. 隋末, 起兵巴陵, 自稱梁王. 靖陳十策, 高祖命副趙郡王孝恭討之, 遂降. 輔, 姓. 公祏, 名. 爲淮南道行臺僕射. 武德中, 據丹陽反叛, 又詔靖副孝恭討之, 擒獲, 遂平.으로 歷遷揚州大都督府長史注+長, 音掌. 揚州, 見上註. 唐制, 總十州者爲大都督. 長史, 其上佐也.하고
무덕武德(618~626) 연간에 이정李靖소선蕭銑보공석輔公祏을 평정하는 데 세운 공로로注+은 음이 이며, 은 음이 이다. 는 성이며 은 이름이니, 후량後梁 선제宣帝의 증손이다. 나라 말엽에 파릉巴陵에서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양왕梁王이라 칭하였다. 이정李靖이 열 가지 계책을 올리자, 고조高祖조군왕趙郡王 이효공李孝恭부관副官으로 임명하여 소선蕭銑을 토벌하게 하니, 〈소선이〉 마침내 항복하였다.
는 성이며, 공석公祏은 이름이다. 회남도행대복야淮南道行臺僕射가 되었다. 무덕武德(618~626) 연간에 단양丹陽을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또 조서를 내려 이정을 이효공의 부관으로 삼아 보공석輔公祏을 토벌하게 하여, 결국 사로잡아 평정하였다.
여러 번 승진하여 양주대도독부揚州大都督府 장사長史가 되었다.注+(우두머리)은 음이 이다. 양주揚州는 위의 에 보인다. 나라 제도에 의하면 10개의 를 총괄하는 이가 대도독大都督이다. 장사長史는 제일 높은 부관이다.
太宗嗣位 召拜刑部尙書注+唐制, 刑部掌律令刑法徒隷按覆讞禁, 尙書其長也.
태종太宗이 제위를 이어받은 뒤에 불러들여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임명하였다.注+나라 제도에 의하면 형부刑部율령律令형법刑法도예徒隷안복按覆(審理)‧얼금讞禁(심판하여 금지함)을 관장하고, 상서尙書는 그 수장이다.
貞觀二年 以本官으로 檢校中書令하고 三年 轉兵部尙書하고 爲代州行軍總管注+代州, 今仍舊, 隷腹裏. 唐制, 武德初置行軍總管以統軍.하여 進擊突厥定襄城하여 破之注+定襄, 郡名. 今忻州, 隷腹裏.하니 突厥諸部落 俱走磧北注+走, 音奏. 沙土曰磧. 地在塞北.이라
정관貞觀 2년(628)에 본관本官(형부상서)으로 검교중서령檢校中書令이 되었고, 정관 3년(629)에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자리를 옮겼으며, 대주도행군총관代州道行軍總管이 되어注+대주代州는 지금 옛 지명을 그대로 쓰니, 복리腹裏에 속한다. 나라 제도에 의하면 무덕武德 초기에 행군총관行軍總管을 두어 군대를 통솔하였다.돌궐突厥정양성定襄城으로 진격하여 격파하니,注+정양定襄의 이름으로, 지금의 흔주忻州복리腹裏에 속한다.돌궐突厥의 여러 부락이 모두 적북磧北으로 달아났다.注+(향하다)는 음이 이다. 모래흙을 이라고 한다. 지역이 변방 북쪽에 있다.
擒隋齊王暕之子注+暕, 古限切.楊政道及煬帝蕭后하여 送于長安이라
나라 제왕齊王 양간楊暕의 아들注+의 반절이다.양정도楊政道양제煬帝소후蕭后를 사로잡아 장안長安으로 보냈다.
突利可汗 來降注+汗, 音韓, 凡言可汗竝同. 降, 下江切, 後同. 可汗, 蕃王之稱, 猶漢時稱單于, 中國稱天子也. 突利可汗, 始畢可汗之子, 名什鉢苾. 嘗自結於太宗, 請入朝, 太宗禮見良厚, 拜右衛將軍.하고 頡利可汗注+處羅可汗之弟, 名莫賀咄設. 牙直五原北, 太宗因其地置伊西州. 僅以身遁이라
돌리가한突利可汗은 와서 투항하였고,注+은 음이 이다. 가한可汗이라고 말하는 경우는 모두 같다. 의 반절이다. 뒤에도 같다. 가한可汗번왕蕃王의 칭호로, 나라 때 선우單于라 칭하던 것과 같으며, 중국에서는 천자天子라고 칭한다. 돌리가한突利可汗시필가한始畢可汗의 아들이며 이름은 십발필什鉢苾이다. 일찍이 태종太宗과 직접 동맹을 맺어 나라 조정에 입조하기를 청하였는데, 태종太宗이 후하게 예우하여 우위장군右衛將軍에 임명하였다.힐리가한頡利可汗注+처라가한處羅可汗의 아우이며 이름은 막하돌설莫賀咄設이다. 오원五原의 북쪽에 아직牙直(將軍府)을 두자 태종太宗이 그 지역에 이서주伊西州를 설치하였다. 겨우 몸만 피해 달아났다.
太宗謂曰 昔 李陵 提步卒五千하여 不免身降匈奴注+李陵, 字少卿. 漢武帝時爲侍中, 將兵伐匈奴, 無救而敗, 遂降匈奴.로되 尙得名書竹帛이어늘 卿以三千輕騎 深入虜庭하여 剋復定襄하여 威振北狄하니 實古今未有
태종이 말하기를 “옛날 이릉李陵이 보병 5천을 이끌고 싸우다 흉노匈奴에게 투항했는데도注+이릉李陵소경少卿이다. 나라 무제武帝시중侍中이 되어서 병사를 거느리고 흉노匈奴를 정벌했다가 구원병이 없어 패배하였고, 결국 흉노에 항복하였다. 역사에 이름을 남겼거늘, 경은 3천의 경무장한 기병을 이끌고 오랑캐 조정이 있는 곳까지 깊숙이 들어가 정양定襄을 탈환하여 북방 이적夷狄에게 위엄을 떨쳤으니, 실로 고금에 없던 일이오.
足報往年라하고 以功進封代國公이라
이는 과거 위수渭水의 일을 보복한 것이라 하기에 충분하오.”라 하고, 그 공로로 대국공代國公으로 높여서 책봉하였다.
역주
역주1 (袥)[祏] : 저본에는 ‘袥(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舊唐書》 권56 〈輔公祏傳〉에 의거하여 ‘祏(석)’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 [道] : 저본에는 없으나, 謝保成의 《貞觀政要集校》에 의거하여 ‘道’를 보충하였다.
역주3 渭水之役 : 626년 5월 東突厥의 頡利可汗이 玄武門의 변란을 틈타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長安의 渭水로 쳐들어왔는데, 唐 太宗이 겉으로는 군세를 자랑하였으나 실제로는 국고를 탕진하면서 힐리가한과 동맹을 맺은 사건을 말한다. ‘渭水의 치욕’이라고 한다. 《册府元龜 권133 褒功 第2》

정관정요집론(1) 책은 2019.06.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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