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德中
에 以平蕭銑輔公
功
注+銑, 音跣. 祏, 音石. 蕭, 姓. 銑, 名. 後梁宣帝曾孫也. 隋末, 起兵巴陵, 自稱梁王. 靖陳十策, 高祖命副趙郡王孝恭討之, 遂降. 輔, 姓. 公祏, 名. 爲淮南道行臺僕射. 武德中, 據丹陽反叛, 又詔靖副孝恭討之, 擒獲, 遂平.으로 歷遷揚州大都督府長史
注+長, 音掌. 揚州, 見上註. 唐制, 總十州者爲大都督. 長史, 其上佐也.하고
太宗嗣位
에 召拜刑部尙書
注+唐制, 刑部掌律令刑法徒隷按覆讞禁, 尙書其長也.라
貞觀二年
에 以本官
으로 檢校中書令
하고 三年
에 轉兵部尙書
하고 爲代州
行軍總管
注+代州, 今仍舊, 隷腹裏. 唐制, 武德初置行軍總管以統軍.하여 進擊突厥定襄城
하여 破之
注+定襄, 郡名. 今忻州, 隷腹裏.하니 突厥諸部落
이 俱走磧北
注+走, 音奏. 沙土曰磧. 地在塞北.이라
擒隋齊王暕之子
注+暕, 古限切.楊政道及煬帝蕭后
하여 送于長安
이라
突利可汗
은 來降
注+汗, 音韓, 凡言可汗竝同. 降, 下江切, 後同. 可汗, 蕃王之稱, 猶漢時稱單于, 中國稱天子也. 突利可汗, 始畢可汗之子, 名什鉢苾. 嘗自結於太宗, 請入朝, 太宗禮見良厚, 拜右衛將軍.하고 頡利可汗
注+處羅可汗之弟, 名莫賀咄設. 牙直五原北, 太宗因其地置伊西州.은 僅以身遁
이라
太宗謂曰 昔
에 李陵
이 提步卒五千
하여 不免身降匈奴
注+李陵, 字少卿. 漢武帝時爲侍中, 將兵伐匈奴, 無救而敗, 遂降匈奴.로되 尙得名書竹帛
이어늘 卿以三千輕騎
로 深入虜庭
하여 剋復定襄
하여 威振北狄
하니 實古今未有
니
무덕武德(618~626) 연간에
이정李靖이
소선蕭銑과
보공석輔公祏을 평정하는 데 세운 공로로
注+선銑은 음이 선跣이며, 석祏은 음이 석石이다. 소蕭는 성이며 선銑은 이름이니, 후량後梁 선제宣帝의 증손이다. 수隋나라 말엽에 파릉巴陵에서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양왕梁王이라 칭하였다. 이정李靖이 열 가지 계책을 올리자, 고조高祖가 조군왕趙郡王 이효공李孝恭의 부관副官으로 임명하여 소선蕭銑을 토벌하게 하니, 〈소선이〉 마침내 항복하였다.
보輔는 성이며, 공석公祏은 이름이다. 회남도행대복야淮南道行臺僕射가 되었다. 무덕武德(618~626) 연간에 단양丹陽을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또 조서를 내려 이정을 이효공의 부관으로 삼아 보공석輔公祏을 토벌하게 하여, 결국 사로잡아 평정하였다. 여러 번 승진하여
양주대도독부揚州大都督府 장사長史가 되었다.
注+장長(우두머리)은 음이 장掌이다. 양주揚州는 위의 주註에 보인다. 당唐나라 제도에 의하면 10개의 주州를 총괄하는 이가 대도독大都督이다. 장사長史는 제일 높은 부관이다.
태종太宗이 제위를 이어받은 뒤에 불러들여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임명하였다.
注+당唐나라 제도에 의하면 형부刑部는 율령律令‧형법刑法‧도예徒隷‧안복按覆(審理)‧얼금讞禁(심판하여 금지함)을 관장하고, 상서尙書는 그 수장이다.
정관貞觀 2년(628)에
본관本官(형부상서)으로
검교중서령檢校中書令이 되었고, 정관 3년(629)에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자리를 옮겼으며,
대주도행군총관代州道行軍總管이 되어
注+대주代州는 지금 옛 지명을 그대로 쓰니, 복리腹裏에 속한다. 당唐나라 제도에 의하면 무덕武德 초기에 행군총관行軍總管을 두어 군대를 통솔하였다.돌궐突厥의
정양성定襄城으로 진격하여 격파하니,
注+정양定襄은 군郡의 이름으로, 지금의 흔주忻州니 복리腹裏에 속한다.돌궐突厥의 여러 부락이 모두
적북磧北으로 달아났다.
注+주走(향하다)는 음이 주奏이다. 모래흙을 적磧이라고 한다. 지역이 변방 북쪽에 있다.
수隋나라
제왕齊王 양간楊暕의 아들
注+간暕은 고古와 한限의 반절이다.양정도楊政道와
양제煬帝의
소후蕭后를 사로잡아
장안長安으로 보냈다.
돌리가한突利可汗은 와서 투항하였고,
注+한汗은 음이 한韓이다. 가한可汗이라고 말하는 경우는 모두 같다. 강降은 하下와 강江의 반절이다. 뒤에도 같다. 가한可汗은 번왕蕃王의 칭호로, 한漢나라 때 선우單于라 칭하던 것과 같으며, 중국에서는 천자天子라고 칭한다. 돌리가한突利可汗은 시필가한始畢可汗의 아들이며 이름은 십발필什鉢苾이다. 일찍이 태종太宗과 직접 동맹을 맺어 당唐나라 조정에 입조하기를 청하였는데, 태종太宗이 후하게 예우하여 우위장군右衛將軍에 임명하였다.힐리가한頡利可汗注+처라가한處羅可汗의 아우이며 이름은 막하돌설莫賀咄設이다. 오원五原의 북쪽에 아직牙直(將軍府)을 두자 태종太宗이 그 지역에 이서주伊西州를 설치하였다.은 겨우 몸만 피해 달아났다.
태종이 말하기를 “옛날
이릉李陵이 보병 5천을 이끌고 싸우다
흉노匈奴에게 투항했는데도
注+이릉李陵은 자字가 소경少卿이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시중侍中이 되어서 병사를 거느리고 흉노匈奴를 정벌했다가 구원병이 없어 패배하였고, 결국 흉노에 항복하였다. 역사에 이름을 남겼거늘, 경은 3천의 경무장한 기병을 이끌고 오랑캐 조정이 있는 곳까지 깊숙이 들어가
정양定襄을 탈환하여 북방
이적夷狄에게 위엄을 떨쳤으니, 실로 고금에 없던 일이오.
이는 과거 위수渭水의 일을 보복한 것이라 하기에 충분하오.”라 하고, 그 공로로 대국공代國公으로 높여서 책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