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觀七年
에 太宗謂太子左庶子于志寧
注+ 太宗謂太子左庶子于志寧:于志寧, 字仲謐, 京兆人. 貞觀三年爲中書侍郞, 遷左庶子, 上, 俄兼詹事. 晉王爲皇太子, 復拜左庶子.杜正倫曰
卿等輔導太子
하니 常須爲說
注+ 常須爲說:爲, 去聲. 後爲說同.百姓間利害事
하라
朕年十八에 猶在人間하니 百姓艱難을 無不諳練이러니
及居帝位
하여는 每商量處置
注+ 每商量處置:量, 平聲. 處, 上聲.에 或時有乖疎
하면 得人諫諍
하여 方始覺悟
하니
若無忠諫者爲說
이면 何由行得好事
리오 況太子生長深宮
注+ 況太子生長深宮:長, 音掌.하여 百姓艱難
을 都不聞見乎
인저
但出勅云 有諫者卽斬이라하면 必知天下士庶가 無敢更發直言이라
卿等常須以此意
로 共其談說
하고 每見有不是事
어든 宜極言切諫
하여 令有所裨益也
注+ 令有所裨益也:令, 平聲.하라
注
【集論】唐氏仲友曰 太宗誠有知子之明
하고 其敎之亦云篤矣
니 라
注
愚按 太宗君臨天下하여 方勵精之初에 容受直言하고 導人使諫하며
蚤建太子하여 命東宮輔臣하여 極言規正하여 令有所裨益하니
蓋望太子亦如己之從諫이니 其意不亦深切哉아 惜乎라 承乾不足以副君父之意여
정관貞觀 7년(633)에
태종太宗이
태자좌서자太子左庶子 우지녕于志寧과
注+우지녕于志寧은 자字가 중밀仲謐이며, 경조京兆 사람이다. 정관 3년에 중서시랑中書侍郞이 되었다가 태자좌서자太子左庶子로 자리를 옮기고, 《간원諫苑》을 지어 올렸으며, 얼마 후에 첨사詹事를 겸하였다. 진왕晉王이 황태자皇太子가 되자 다시 좌서자左庶子에 임명되었다. 두정륜杜正倫에게 말하였다.
“경들은 태자를 인도하니, 항상 그를 위해
注+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뒤에 나오는 위설爲說도 같다. 백성들의 이로우며 해로운 일을 말해주도록 하시오.
짐은 열여덟에 백성들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고난을 알지 못하는 것이 없소.
제위에 올라서는 일을 헤아려 처리할 때마다
注+양量(헤아리다)은 평성平聲이다. 처處(처하다)는 상성上聲이다. 때로는 어긋나거나
소루疏漏한 것이 있으면 신하들의 간쟁을 듣고서 비로소 깨닫기도 하였소.
만일 충성으로 간하는 자가 없다면 좋은 일을 어떻게 행할 수 있었겠소. 하물며 태자는 깊은 궁궐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注+장長(자라나다)은 음이 장掌이다. 전혀 백성들의 고난을 듣거나 보지 못하였소.
또 군주에게 백성의 안위가 달려 있으니, 교만하고 방종해서는 안 되오.
다만 칙령을 내려 ‘간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참수할 것이다.’라고 한다면, 반드시 천하의 선비나 서민들이 감히 바른말을 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므로 사심을 극복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간쟁을 받아들이는 것이오.
경들은 늘 이러한 뜻으로 태자와 대화를 하도록 하고, 잘못된 일을 볼 때마다 극진한 말로 간하여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오.”
注+영令(하여금)은 평성平聲이다.
注
당중우唐仲友가 말하였다. “태종은 진실로 자신의 아들에 대해 밝게 알았고, 그 가르침 역시 독실하였으니, 이 몇 마디 말은 바로 주공周公이 말한 《서경書經》 〈주서周書 무일無逸〉의 내용이다.
심지어 ‘만일 천하에 조서를 내려 간언하는 자는 참수할 것이라 한다면 다시 바른말을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수 양제隋 煬帝가 앞에서 귀감이 되었기 때문인데, 어찌하여 이승건李承乾은 사람을 죽여 간언을 그치게 하려고 하였던가.
비록 백 명의 두정륜杜正倫이 있다고 하더라도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注
내가 살펴보건대 태종은 천하에 군림하여 힘써 노력을 기울이던 초창기에 직언을 수용하고, 사람을 이끌어 간언하게 하였으며,
일찍 태자를 세워 동궁을 보좌하는 신하들에게 명하여 지극한 말로 바로잡아주게 하여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이는 태자 역시 간언을 따랐던 자기처럼 되기를 바란 것이니, 그 뜻이 또한 깊고 절실하지 않은가. 승건承乾이 군부君父의 뜻에 부합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