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有胎敎世子
注+ 古有胎敎世子:.하되 朕則不暇
라 但近自建立太子
로 遇物
에 必有誨諭
하노니
見其臨食將飯하고 謂曰 汝知飯乎아하여 對曰不知라하니
曰凡稼穡艱難
이 皆出人力
하니 라야 常有此飯
이라하고
見其乘馬
注+ 見其乘馬:乘, 平聲. 後同.하고 又謂曰 汝知馬乎
아하니 對曰不知
라하니
曰能代人勞苦者也니 以時消息하여 不盡其力이면 則可以常有馬也라하고
見其乘舟하고 又謂曰 汝知舟乎아하니 對曰不知라하여
曰舟所以比人君이요 水所以比黎庶니 水能載舟하고 亦能覆舟라 爾方爲人主하니 可不畏懼아하고
見其休於曲木之下하고 又謂曰 汝知此樹乎아하니 對曰不知라하여
曰此木雖曲이나 得繩則正하나니 爲人君에 雖無道나 受諫則聖이라
此傅說所言
注+ 此傅說所言:說, 音悅. 商書傅說告高宗曰 “惟木從繩則正, 后從諫, 則聖.”이니 可以自鑑
이니라
注
【集論】愚按 太宗이 懲承乾之失德하여 望儲君之近德이라
於是에 遇事必誨하니 其愛儲君者가 所以愛百姓也라
將飯而戒면 則知民生之艱難矣요 乘馬而戒면 則知民力之困乏矣요
乘舟而戒면 則知民心之無恒矣요 休曲木而戒면 則知立身之必從正矣리니
迨夫高宗臨御하여는 其於子庶民에 猶知所以保養之意나
惟疎遠老臣하고 失德宮閫하여 竟忘王業之艱難하니 毋乃雖誨諄諄이나 而聽藐藐乎아
정관貞觀 18년(644)에 태종太宗이 근신들에게 말하였다.
“옛날에는 세자에게 태교를 행하였으나
注+문왕文王의 어머니 태임太妊은 성품이 단정하고 한결같으며 성실 장엄하여 오직 덕을 행하였다. 문왕을 임신하고 나서는 눈으로는 나쁜 색을 보지 않았으며, 귀로는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았으며, 입으로는 오만한 말을 하지 않았다. 문왕을 낳자 총명하고 성스러워 태임이 하나를 가르치면 백을 알더니 결국 주周나라의 제일가는 임금이 되었다. 군자들은 ‘태임이 태교를 잘하였다.’고 말하였다. 짐은 그럴 여가가 없었소. 다만 근래 태자를 세운 이래로는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가르쳐 깨우쳐주고 있소.
태자가 밥을 먹으려고 하는 것을 보고 ‘너는 밥에 대해 알고 있느냐?’ 하고 물으니, ‘모릅니다.’라고 대답하였소.
그래서 ‘경작하고 수확하는 어려움은 모두 농민들의 노력에서 나오니, 농사철을 빼앗지 않아야 언제나 이런 밥을 먹을 수 있다.’라고 하였소.
태자가 말을 타는 것을 보고
注+승乘(타다)은 평성平聲이다. 뒤에도 같다. 또 ‘너는 말에 대해 알고 있느냐?’ 하고 물으니, ‘모릅니다.’라고 대답하였소.
그래서 ‘말은 사람의 노고를 대신하니, 때에 따라 말이 쉬도록 하여 그 힘을 소진시키지 않으면 언제나 말을 탈 수 있다.’라고 하였소.
태자가 배를 타는 것을 보고 또 ‘너는 배에 대해 알고 있느냐?’ 하고 물으니, ‘모릅니다.’라고 대답하였소.
그래서 ‘배는 임금에 비유되고, 물은 백성에 비유되는데,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또 전복시킬 수도 있다. 너는 장차 인주人主가 될 것이니, 삼가고 두려워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라고 하였소.
태자가 굽은 나무 아래에서 쉬는 것을 보고는 또 ‘너는 이 나무에 대해 알고 있느냐?’ 하고 물으니, ‘모릅니다.’라고 대답하였소.
그래서 비록 이 나무가 굽었어도 먹줄이 있으면 바르게 할 수 있으니, 임금이 되어 비록 무도하더라도 간언을 받아들이면 성군이 될 수 있다.
이는
부열傅說이 말한 것이니
注+설說(기뻐하다)은 음이 열悅이다. 《서경書經》 〈상서商書 열명說命〉에, 부열傅說이 고종高宗에게 아뢰기를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바르고, 임금은 간언을 따르면 훌륭해집니다.”라고 하였다.,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소.”
太宗이 일에 따라 太子를 가르치다
注
내가 살펴보건대, 태종太宗이 이승건李承乾의 옳지 못한 행동을 징계하여 태자가 덕행德行에 가까워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가르쳤으니, 태자를 사랑하는 것은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밥을 먹을 때 경계하면 민생民生의 고난을 알 것이고, 말을 탈 때 경계하면 민력民力의 고단함을 알 것이며,
배를 탈 때 경계하면 민심民心이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고, 굽은 나무 아래에서 쉴 때 경계하면 몸가짐을 항상 바르게 해야 한다는 점을 알 것이니,
전대前代에서 태자를 교육했던 말을 살펴보건대 이보다 절실한 말은 없었다.
옛날의 《예경禮經》을 고찰해보니 세자를 가르치던 방법 역시 이와 같은 것에 불과했다.
고종高宗이 제위에 오르고 나서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데 있어서는 오히려 보호하고 양육할 뜻을 알았으나,
오직 노신老臣들에 대해서는 소원하게 대하고 궁궐에서는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하여 결국에는 왕업王業의 어려움을 잊어버렸으니, 비록 자상하게 가르쳐주었으나 건성으로 들은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