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觀七年
에 蜀王
注+名愔, 太宗第六子也.妃父楊譽
가 在省競婢
어늘 都官郞中
注+唐制, 刑部官, 掌配役徒隷, 簿錄俘囚, 以給衣糧藥料, 以理訴競雪寃. 凡公私良賤, 必周知之, 凡反逆相坐, 沒其家爲官奴婢.薛仁方
이 留身勘問
하여 未及予奪
注+予, 音與.한대
其子爲千牛
注+後魏官名. 隋有千牛刀, 人主防身刀也. 其職本掌御刀, 蓋取莊子“庖丁爲惠文君解牛, 十九年所割者數千牛, 而刀刃若新發硎石.” 言此刀可以備身, 因以名官. 唐制, 左‧右千牛衛將軍, 掌宮殿侍衛及供御儀仗左右, 執弓箭宿衛.가 於殿庭陳訴云
五品以上非反逆이면 不合留身이어늘 以是國親이라 故生節目하여 不肯決斷하고 淹留歲月이니이다하다
정관貞觀 7년(633)에
촉왕蜀王注+촉왕蜀王은 이름이 음愔이니, 태종太宗의 여섯째 아들이다.妃의 부친
양예楊譽가
성省(관청) 안에서
비녀婢女를 차지하려고 다투었는데,
도관낭중都官郞中注+〈도관낭중都官郞中은〉 당唐나라 제도에 의하면 형부刑部에 속한 관리로서, 도예徒隷(복역 노예)의 배치, 포로와 죄수에 대한 기록, 옷과 양식과 의약품을 공급하고, 소송사건과 억울한 일을 해소시키는 일을 담당한다. 모든 공公‧사私의 양민과 천민을 반드시 두루 관리하며, 모든 반역에 연좌된 사람은 그 집안을 몰수하여 관청 노비로 삼는다.설인방薛仁方이 그를 구류시켜 사실을 신문하고 미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注+여予(주다)는 음이 여與이다..
천우千牛이던 양예의 아들이
注+천우千牛는 후위後魏(北魏)의 관직 이름이다. 수隋나라 때 천우도千牛刀가 있었는데, 임금의 몸을 방어하는 칼이라는 뜻이다. 그 직책은 본디 임금의 칼을 관리하니,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의 “포정庖丁이 혜문군惠文君을 위해 소를 해체했는데, 19년 동안 해체한 소가 수천 마리였으나 칼날이 이제 막 숫돌에서 갈려 나온 듯했다.”는 데에서 이름을 취한 것이다. 이 칼이 몸을 방비할 만하다는 말인데 이것을 그대로 관직명으로 삼은 것이다. 당唐나라 제도에 의하면 좌左‧우천우위장군右千牛衛將軍은 궁전宮殿의 시위侍衛와 임금의 의장儀仗 좌우에서 시중드는 일과 활과 화살을 들고 숙직하며 호위하는 일을 관장한다.전정殿庭에서 호소하며 말하였다.
“5품 이상은 반역죄가 아니면 신체를 구류해서는 안 되는데, 국친國親이라 하여 일부러 죄목을 만들고서 판결을 내리려 하지 않고 마냥 날짜만 보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