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당중우唐仲友가 말하였다. “양梁‧주周‧진陳‧수隋의 시대에는 우리의 도道가 곤궁에 처했었다. 하지만 유학자는 이런 시대에도 선왕先王의 경전을 수호하여 유현劉炫과 같은 이들이 방랑 생활을 하며 굶어 죽을 상황에서도 경전의 의미를 밝히는 것을 후회하지 않아서 후학의 강론과 학습에 보탬이 되게 했다.
태종太宗이 그들의 자손을 발탁해서 보답하고 좌구명左丘明 등 21인에 대해선 그들의 책을 채용하고 그들의 도道를 시행하니 또 부자夫子(공자孔子)의 사당에 배향하여 포상하고 존대했다.
선유先儒의 자손들이 발탁되는 은혜를 입고 또 부자夫子의 제사에 배향되었으니 지금의 유자儒者들이 더욱더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또 후세의 모범이 되기에도 충분하니, 태종太宗의 두 가지 조치가 어찌 훌륭하지 않은가.
注
내가 살펴보건대, 태종太宗이 부자夫子를 선성先聖으로 삼고서 국자학國子學에 사당을 세우고 그로부터 수년 뒤에 다시 양梁‧주周‧진陳‧수隋의 명유名儒의 자손들을 우대했으니 비록 그들의 경학經學과 학행學行이 성현聖賢의 내면까지 탐구하진 못했다고 해도 천하天下를 권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수년 뒤에 또다시 조칙을 내려, 좌구명左丘明 등 21인을 공자孔子의 사당에 배향케 했다.
좌씨左氏 등의 유학자들이 경전의 의미를 주석하고 제도를 살펴 논평하여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의지하고 근거할 바가 있게 했으니, 참으로 이 질사秩祀에 해당되기에 충분하여 마침내 사라지지 않을 전칙典則으로 삼은 것이다.
태종의 이 조치는 또한 이전의 제왕들이 미처 시행하지 못한 것이다. 근대의 유학자들은 자손에게 은혜가 미쳤고 옛날의 유학자들은 배향配享으로 질사秩祀를 지내게 되었으니 태종이 유학자를 존숭하고 그 도道를 중시한 것이 훌륭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