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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2)

정관정요집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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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집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貞觀十二年 太宗 謂中書侍郎岑文本曰 梁陳注+ 梁陳:梁, 姓蕭氏, 受齊禪. 陳, 姓陳氏, 受梁禪.名臣 有誰可稱이며 復有子弟堪招引否
文本 奏言호대 隋師入陳 百司奔散하여 莫有留者로되 惟尙書僕射袁憲 獨在其主之傍하고
王世充 將受隋禪하여 群僚表請勸進하되 憲子國子司業承家 托疾獨不署名하니
此之父子 足稱忠烈이니이다
承家弟承序 今爲建昌令注+ 今爲建昌令:建昌, 縣名, 今陞州, 屬南康路, 隷江西.하여 淸貞雅操 實繼先風이니이다
由是召拜晉王友하고 兼令侍讀注+ 兼令侍讀:令, 平聲. 唐制, 諸王友, 掌陪侍遊居規諷道義. 侍讀, 掌講道經學.이라가 尋授弘文館學士하다
【集論】唐氏仲友曰 古人이라하니 其袁氏子弟之謂歟인저
忠謹風操 不忍負主하니 誰不欲之爲人臣乎 爲之者 勉之而已
愚按 梁陳 於唐 相距頗遠이로되 猶有招引名臣子孫之言하니 太宗之意 深遠矣
岑文本 謂隋師入陳 袁憲 有獨侍其主之忠하고 王世充 受禪 憲之子 獨不署名하고 其弟 又淸貞雅操라하여
一門父子兄弟 忠義傳家로대 而不著聞하니
向非太宗心存忠義之臣하여 而興言及此하고 非文本之公忠 不揜人善如此하면
則袁氏之忠節 何由著聞哉


정관貞觀 12년(638)에 태종太宗중서시랑中書侍郎 잠문본岑文本에게 말하였다. “나라와 나라의注+소씨蕭氏이며 나라의 제위를 물려받았다. 진씨陳氏이며 나라의 제위를 물려받았다. 명신 가운데 누가 거론할 만하며, 불러들일 만한 자제들이 또 있소.”
잠문본이 아뢰었다. “나라 군사가 나라로 쳐들어가자 모든 관리들이 뿔뿔이 흩어져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직 상서복야尙書僕射 원헌袁憲만이 홀로 그 군주의 곁에 있었고,
왕세충王世充나라의 선위를 받으려 할 때 뭇 신료들이 표문을 올려 제위에 오를 것을 요청했는데, 원헌의 아들 국자사업國子司業 원승가袁承家만이 병이라 핑계대고 홀로 서명하지 않았으니
이들 부자는 충렬忠烈이라 일컬을 만합니다.
원승가의 아우 원승서袁承序가 지금 건창령建昌令으로 있는데注+건창建昌 이름으로 지금의 승주陞州이고 남강로南康路에 소속되어 있고 강서江西에 속한다. 청렴하고 곧고 고상하고 지조가 있어 실로 선대의 기풍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불러 진왕우晉王友에 임명하고 시독侍讀을 겸임케 했다가注+(하여금)은 평성平聲이다. 나라 제도에 의하면, 제왕우諸王友는 평소에 노닐고 지낼 때 모시는 일과 도덕과 의리를 일깨워주는 일을 담당하며, 시독侍讀은 경전을 강론하는 일을 관장한다. 뒤이어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로 임명하였다.
당중우唐仲友가 말하였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한마음으로 수많은 임금을 섬길 수 있다.’고 했는데 원씨袁氏 자제子弟를 두고 말한 것이리라.
충성스럽고 삼가고 지조가 있어 차마 군주를 저버리지 않았으니, 누가 신하로 삼고 싶지 않겠는가. 신하로 삼으려는 자는 힘써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내가 살펴보건대, 과의 시간적 거리가 꽤 먼데도 훌륭한 신하들의 자손을 불러들이라는 말을 했으니 태종太宗의 생각은 멀고 깊다 할 것이다.
잠문본岑文本이, ‘나라 군사가 나라로 쳐들어갈 때 원헌袁憲이 홀로 그 군주를 모시는 충성을 보이고 왕세충王世充이 자리를 물려받을 때 원헌袁憲의 아들만이 홀로 서명하지 않고 그 아우는 또 청렴하고 곧고 고아하고 지조가 있다.’고 하여,
한 집안의 부자와 형제가 충성과 의리를 대대로 전했음에도 드러나지 않았었다.
만일 태종이 마음속에 충성과 의로운 신하를 간직하여 이를 언급하지 않고, 잠문본의 공평함과 충성함이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의 선행을 덮어두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면,
원씨袁氏 집안의 충성과 절의가 어떻게 드러날 수 있겠는가.


역주
역주1 一心可以事百君 : 《晏子春秋》 〈內篇 問下〉에 보인다.

정관정요집론(2)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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