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觀十二年
에 太宗
이 謂中書侍郎岑文本曰 梁陳
注+ 梁陳:梁, 姓蕭氏, 受齊禪. 陳, 姓陳氏, 受梁禪.名臣
에 有誰可稱
이며 復有子弟堪招引否
아
文本이 奏言호대 隋師入陳에 百司奔散하여 莫有留者로되 惟尙書僕射袁憲이 獨在其主之傍하고
王世充이 將受隋禪하여 群僚表請勸進하되 憲子國子司業承家가 托疾獨不署名하니
承家弟承序
가 今爲建昌令
注+ 今爲建昌令:建昌, 縣名, 今陞州, 屬南康路, 隷江西.하여 淸貞雅操
가 實繼先風
이니이다
由是召拜晉王友
하고 兼令侍讀
注+ 兼令侍讀:令, 平聲. 唐制, 諸王友, 掌陪侍遊居規諷道義. 侍讀, 掌講道經學.이라가 尋授弘文館學士
하다
注
【集論】唐氏仲友曰 古人
이 云
이라하니 其袁氏子弟之謂歟
인저
忠謹風操가 不忍負主하니 誰不欲之爲人臣乎아 爲之者는 勉之而已라
注
愚按 梁陳이 於唐에 相距頗遠이로되 猶有招引名臣子孫之言하니 太宗之意가 深遠矣라
岑文本이 謂隋師入陳에 袁憲이 有獨侍其主之忠하고 王世充이 受禪에 憲之子가 獨不署名하고 其弟가 又淸貞雅操라하여
向非太宗心存忠義之臣하여 而興言及此하고 非文本之公忠이 不揜人善如此하면
정관貞觀 12년(638)에
태종太宗이
중서시랑中書侍郎 잠문본岑文本에게 말하였다. “
양梁나라와
진陳나라의
注+양梁은 성姓이 소씨蕭氏이며 제齊나라의 제위를 물려받았다. 진陳은 성姓이 진씨陳氏이며 양梁나라의 제위를 물려받았다. 명신 가운데 누가 거론할 만하며, 불러들일 만한 자제들이 또 있소.”
잠문본이 아뢰었다. “수隋나라 군사가 진陳나라로 쳐들어가자 모든 관리들이 뿔뿔이 흩어져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직 상서복야尙書僕射 원헌袁憲만이 홀로 그 군주의 곁에 있었고,
왕세충王世充이 수隋나라의 선위를 받으려 할 때 뭇 신료들이 표문을 올려 제위에 오를 것을 요청했는데, 원헌의 아들 국자사업國子司業 원승가袁承家만이 병이라 핑계대고 홀로 서명하지 않았으니
원승가의 아우
원승서袁承序가 지금
건창령建昌令으로 있는데
注+건창建昌은 현縣 이름으로 지금의 승주陞州이고 남강로南康路에 소속되어 있고 강서江西에 속한다. 청렴하고 곧고 고상하고 지조가 있어 실로 선대의 기풍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불러
진왕우晉王友에 임명하고
시독侍讀을 겸임케 했다가
注+영令(하여금)은 평성平聲이다. 당唐나라 제도에 의하면, 제왕우諸王友는 평소에 노닐고 지낼 때 모시는 일과 도덕과 의리를 일깨워주는 일을 담당하며, 시독侍讀은 경전을 강론하는 일을 관장한다. 뒤이어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로 임명하였다.
注
당중우唐仲友가 말하였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한마음으로 수많은 임금을 섬길 수 있다.’고 했는데 원씨袁氏 자제子弟를 두고 말한 것이리라.
충성스럽고 삼가고 지조가 있어 차마 군주를 저버리지 않았으니, 누가 신하로 삼고 싶지 않겠는가. 신하로 삼으려는 자는 힘써 노력해야 할 것이다.”
注
내가 살펴보건대, 양梁과 진陳은 당唐과의 시간적 거리가 꽤 먼데도 훌륭한 신하들의 자손을 불러들이라는 말을 했으니 태종太宗의 생각은 멀고 깊다 할 것이다.
잠문본岑文本이, ‘수隋나라 군사가 진陳나라로 쳐들어갈 때 원헌袁憲이 홀로 그 군주를 모시는 충성을 보이고 왕세충王世充이 자리를 물려받을 때 원헌袁憲의 아들만이 홀로 서명하지 않고 그 아우는 또 청렴하고 곧고 고아하고 지조가 있다.’고 하여,
한 집안의 부자와 형제가 충성과 의리를 대대로 전했음에도 드러나지 않았었다.
만일 태종이 마음속에 충성과 의로운 신하를 간직하여 이를 언급하지 않고, 잠문본의 공평함과 충성함이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의 선행을 덮어두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면,
원씨袁氏 집안의 충성과 절의가 어떻게 드러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