比見
注+ 比見:音鼻.吏部擇人
하니 惟取其言詞
하고 不悉其景行
注+ 行:去聲. 後同.이라
數年之後에 惡跡始彰하여 雖加刑戮이라도 而百姓已受其弊하니 如何可獲善人고
如晦對曰 兩漢取人에 皆行著鄕閭하여 州郡이 貢之하니 然後入用이라 故로 當時號爲多士니이다
今每年選集
注+ 選集:去聲. 後同.이 向數千人
하니 厚貌飾詞
를 不可知悉
일새 選司
는 但配其階品而已
라
太宗
이 乃將依漢時法
하여 本州辟召
注+ 本州辟召:平聲.하되 會
라
注
大樂正升之司馬하면 司馬辨論官材하여 論定然後에 官之하고 任官然後에 爵之하며 位定然後에 祿之라
蓋未仕之前에 凡經四級하고 已仕之後에 又經三級하니 其詳且重如此라
故로 嘗謂後世取人之道는 不能復成周之法하여 皆苟焉而已라
今觀太宗問컨대 如何可獲善人고하니 大哉라 問乎여
如晦政當告以成周取士之法이 可也어늘 乃以兩漢辟召之事로 爲對하니 何其陋哉오
厥後에 竟以將行世封으로 不及施行하니 後世惜焉이라
然
이나 使眞能行辟召之法
이라도 又豈足以致
之隆乎
아
정관貞觀 3년(629)에 태종太宗이 이부상서吏部尙書 두여회杜如晦에게 말하였다.
“근래에
注+비比(근래)는 음音이 비鼻이다. 이부吏部에서 사람을 선발하는 것을 보니, 오직 말솜씨와 문서를 작성하는 능력만 보아서 취하고 훌륭한 행실이 있는지는 살피지 않소.
注+행行(행실)은 거성去聲이다. 뒤에도 같다.
몇 년 후에 악행이 비로소 드러나서 비록 형벌을 가한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이 이미 그 폐해를 겪은 뒤이니, 어떻게 해야 선한 사람을 얻을 수 있겠소.”
두여회가 대답하였다. “전한前漢‧후한後漢시대에 사람을 선발할 적에는 모두 행실이 향리에서 알려져 주와 군에서 주천한 뒤에 임용하였기 때문에 당시에 인재들이 많다고 한 것입니다.
지금은 매년 선발되어 모인 사람이
注+선選(선발하다)은 거성去聲이다. 뒤에도 같다. 대략 수천 명이니, 모습을 중후하게 하거나 말을 꾸며서 하는지를 알 수 없기에 인재를 선발하는 관청에서는 다만 품계만 배정할 뿐입니다.
인재를 선발하는 법이 실로 정밀하지 못하니, 이 때문에 인재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태종이
한漢나라 때 법령을 따라
본주本州에서 불러 임명하게 하였으나
注+영令(하여금)은 평성平聲이다., 마침 공신들에게 벼슬을 세습하도록 하려는 일로 해서 드디어 중지되었다.
注
내가 살펴보건대 옛날에 인재를 취하는 법은 향리에서 뛰어난 사람을 논하여 사도司徒에게 올려 보내면 사도가 국학國學에 올려 보내고,
대악정大樂正이 사마司馬에게 올려 보내면 사마가 관리의 재능을 논변하여 논의가 정해진 뒤에 관직을 주었고, 관직을 임용한 뒤에 작위를 주었으며, 지위가 결정된 뒤에 녹봉을 주었다.
벼슬하기 전에 모두 네 단계의 과정을 거치고, 벼슬에 오른 뒤에 또 세 단계의 과정을 거쳤으니, 자세하고 엄중하기가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일찍이 생각하기를 후세에 인재를 선발하는 방법은 다시 주周나라의 법도를 회복하지 못하여서 모두 구차할 뿐이었다고 하였다.
지금 태종太宗의 질문을 살펴보건대 어떻게 해야 선한 사람을 얻을 수 있느냐고 하였으니, 질문이 훌륭하다.
두여회杜如晦는 마땅히 주나라에서 선비를 선발하던 법을 말해주는 것이 옳았는데 양한兩漢시대에 지방에서 훌륭한 인재를 불러 임명하던 일로 대답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비루한가?
그 후에 결국 벼슬을 세습하도록 하는 일 때문에 시행되지 못하였으니, 후세에 이 점을 애석하게 여긴다.
그러나 가령 정말 인재를 불러 임명하던 법을 시행했더라도 어찌 인재가 많았던 주나라의 융성함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