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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2)

정관정요집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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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집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貞觀三年 太宗謂吏部尙書杜如晦曰
정관貞觀 3년(629)에 태종太宗이부상서吏部尙書 두여회杜如晦에게 말하였다.
比見注+ 比見:音鼻.吏部擇人하니 惟取其言詞하고 不悉其景行注+ 行:去聲. 後同.이라
“근래에注+(근래)는 이다. 이부吏部에서 사람을 선발하는 것을 보니, 오직 말솜씨와 문서를 작성하는 능력만 보아서 취하고 훌륭한 행실이 있는지는 살피지 않소.注+(행실)은 거성去聲이다. 뒤에도 같다.
數年之後 惡跡始彰하여 雖加刑戮이라도 而百姓已受其弊하니 如何可獲善人
몇 년 후에 악행이 비로소 드러나서 비록 형벌을 가한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이 이미 그 폐해를 겪은 뒤이니, 어떻게 해야 선한 사람을 얻을 수 있겠소.”
如晦對曰 兩漢取人 皆行著鄕閭하여 州郡 貢之하니 然後入用이라 當時號爲多士니이다
두여회가 대답하였다. “전한前漢후한後漢시대에 사람을 선발할 적에는 모두 행실이 향리에서 알려져 주와 군에서 주천한 뒤에 임용하였기 때문에 당시에 인재들이 많다고 한 것입니다.
今每年選集注+ 選集:去聲. 後同. 向數千人하니 厚貌飾詞 不可知悉일새 選司 但配其階品而已
지금은 매년 선발되어 모인 사람이注+(선발하다)은 거성去聲이다. 뒤에도 같다. 대략 수천 명이니, 모습을 중후하게 하거나 말을 꾸며서 하는지를 알 수 없기에 인재를 선발하는 관청에서는 다만 품계만 배정할 뿐입니다.
銓簡之理 實所未精하니 所以不能得才니이다
인재를 선발하는 법이 실로 정밀하지 못하니, 이 때문에 인재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太宗 乃將依漢時法하여 本州辟召注+ 本州辟召:平聲.하되
태종이 나라 때 법령을 따라 본주本州에서 불러 임명하게 하였으나注+(하여금)은 평성平聲이다., 마침 공신들에게 벼슬을 세습하도록 하려는 일로 해서 드디어 중지되었다.
【集論】 愚按 古者取士之法 하고
내가 살펴보건대 옛날에 인재를 취하는 법은 향리에서 뛰어난 사람을 논하여 사도司徒에게 올려 보내면 사도가 국학國學에 올려 보내고,
大樂正升之司馬하면 司馬辨論官材하여 論定然後 官之하고 任官然後 爵之하며 位定然後 祿之
대악정大樂正사마司馬에게 올려 보내면 사마가 관리의 재능을 논변하여 논의가 정해진 뒤에 관직을 주었고, 관직을 임용한 뒤에 작위를 주었으며, 지위가 결정된 뒤에 녹봉을 주었다.
蓋未仕之前 凡經四級하고 已仕之後 又經三級하니 其詳且重如此
벼슬하기 전에 모두 네 단계의 과정을 거치고, 벼슬에 오른 뒤에 또 세 단계의 과정을 거쳤으니, 자세하고 엄중하기가 이와 같았다.
嘗謂後世取人之道 不能復成周之法하여 皆苟焉而已
그러므로 일찍이 생각하기를 후세에 인재를 선발하는 방법은 다시 나라의 법도를 회복하지 못하여서 모두 구차할 뿐이었다고 하였다.
今觀太宗問컨대 如何可獲善人고하니 大哉 問乎
지금 태종太宗의 질문을 살펴보건대 어떻게 해야 선한 사람을 얻을 수 있느냐고 하였으니, 질문이 훌륭하다.
如晦政當告以成周取士之法 可也어늘 乃以兩漢辟召之事 爲對하니 何其陋哉
두여회杜如晦는 마땅히 주나라에서 선비를 선발하던 법을 말해주는 것이 옳았는데 양한兩漢시대에 지방에서 훌륭한 인재를 불러 임명하던 일로 대답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비루한가?
厥後 竟以將行世封으로 不及施行하니 後世惜焉이라
그 후에 결국 벼슬을 세습하도록 하는 일 때문에 시행되지 못하였으니, 후세에 이 점을 애석하게 여긴다.
이나 使眞能行辟召之法이라도 又豈足以致之隆乎
그러나 가령 정말 인재를 불러 임명하던 법을 시행했더라도 어찌 인재가 많았던 주나라의 융성함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역주
역주1 刀筆 : 竹簡에 글씨를 새기는 칼과 붓이라는 뜻으로, 문서 작성하는 서기의 사무를 말한다.
역주2 : 註에 의하면 본문의 句讀가 ‘乃將依漢時法 令本州辟召’로 되고 ‘漢나라 때 법에 의해 本州로 하여금 부르게 하게 하다.’로 번역되어야 하는데, 《新譯貞觀政要》(2008)에 따라 구두와 번역을 위와 같이 수정하였다.
역주3 功臣等將行世封事 遂止 : 貞觀 11년에 太宗이 子弟 荊州都督 荊王 元景 등 21명과 功臣 司空 趙州刺史 長孫無忌 등 14명에게 刺史를 世襲하려고 하였는데, 이에 반대하여 禮部侍郞 李百藥이 封事를 올리고 中書舎人 馬周가 上疏를 올리자 太宗이 모두 嘉納하고 子弟와 功臣들에게 세습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歴代名臣奏議》 권104 〈封建〉
역주4 鄕論秀士……位定然後祿之 : 《禮記》 〈王制〉에 보인다.
역주5 成周多士 : 《詩經》 〈大雅 文王〉에 “성대하게 많은 선비여, 文王이 이들 때문에 편안하도다.[濟濟多士 文王以寧]”라고 하였다.

정관정요집론(2)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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