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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3)

정관정요집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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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집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貞觀十二年 疎勒朱俱波甘棠注+① 疎勒朱俱波甘棠:皆西域國名. 疎勒, 距長安九千里餘, 王姓裴氏. 朱俱波, 在葱嶺之西. 甘棠, 在大海南. 遣使貢方物注+② 遣使貢方物:使, 去聲, 後同.이어늘 太宗謂群臣曰 向使中國不安이면 日南注+③ 日南:南蠻國, 在安南之外.西域朝貢使 亦何緣而至 朕何德以堪之리오
覩此 翻懷危懼하노니 近代平一天下하여 拓定邊方者注+④ 拓定邊方者:拓, 音托. 惟秦皇漢武로되 하고 漢武驕奢하여 國祚幾絶注+⑤ 國祚幾絶:幾, 平聲.하니
朕提하여 以定四海하여 하고 億兆乂安하니 自謂不減二主也하니 由是每自懼危亡하여 必不敢懈怠
惟籍公等直言正諫하여 以相匡弼하노니 若惟揚美隐惡하여 共進諛言이면 則國之危亡 可立而待也注+⑥ 貞觀十二年……可立而待也:按通鑑係貞觀九年十二月.
【集論】唐氏仲友曰 太宗因四夷之賓하여 而以秦皇漢武自儆하여 求輔弼之言하니 此忠言可進之機어늘 惜哉 玄齡無杜漸之言하여 俾進乎帝王保治之道也
愚按 昔武王克商 西旅底貢厥獒어늘 太保作旅獒하여 用訓于王하여 而致愼德之戒
夫以武王之聖으로도 而召公所以警戒之者如此하니 後之人主 可不深思而加念之哉
太宗因四夷之賓하여 以秦皇漢武自儆以求言이어늘
而當時大臣 雖不聞有如太保作書之訓이나 然自懷危亡하여 不敢懈怠하여 有合於之言하니 庶幾乎帝王保治之道矣


정관貞觀 12년(638)에 소륵국疎勒國, 주구파국朱俱波國, 감당국甘棠國에서注+소륵疎勒, 주구파朱俱波, 감당甘棠은〉 모두 서역의 나라 이름이다. 소륵疎勒장안長安과의 거리가 9천여 리이며, 왕의 배씨裴氏이다. 주구파朱俱波총령葱嶺의 서쪽에 있다. 감당甘棠대해大海의 남쪽에 있다. 사신을 보내어 토산품을 바치자注+使(사신)는 거성去聲이다. 뒤에도 같다., 태종太宗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가령 중국이 불안하다고 할 것 같으면, 일남日南이나注+일남日南은〉 남만국南蠻國으로, 안남安南의 밖에 있다. 서역西域조공사朝貢使가 또한 무엇 때문에 오겠으며, 짐이 무슨 덕으로 감당하겠소.
이것을 보니 두려운 마음이 번득 일어나오. 근대에 천하를 평정하고 변방을 개척한 자는注+(개척하다)은 이다. 오직 진 시황秦 始皇한 무제漢 武帝뿐인데, 진 시황은 폭정을 일삼다가 자식 대에 이르러 망하였고, 한 무제는 교만 사치하여 국운國運이 거의 끊어졌소.注+(거의)는 평성平聲이다.
짐이 삼척三尺을 들어 천하를 평정하여 먼 곳의 오랑캐들이 복종하고 백성들이 안정되었으니, 두 군주(진 시황과 한 무제)에 뒤지지 않다고 생각하오. 그러나 두 군주의 말로는 스스로를 보존하지 못했으니, 이 때문에 항상 국가가 위태로워지고 멸망할까 두려워 기필코 감히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오.
공들의 직언直言과 정직한 간언諫言에 의지하여 서로 바르게 하고 도와야 할 것이니, 만일 좋은 면만 칭찬하고 나쁜 면을 감추며, 모두 아첨하는 말만 올린다면 나라가 위태로워지고 멸망하는 상황을 금방 맞게 될 것이오.”注+살펴보건대 《자치통감資治通鑑정관貞觀 9년 12월 조에 실려 있다.
당중우唐仲友가 말하였다. “태종이 사이四夷에서 오는 빈객賓客으로 인하여 진 시황秦 始皇한 무제漢 武帝를 들어 스스로를 경계하여 보필하는 이들의 말을 구하였다. 이때가 충언忠言을 진언할 수 있는 기회인데, 방현령房玄齡이 조짐을 막는 말을 안 해서 제왕이 다스림을 지키는 도에 나아가지 못하게 한 것이 애석하다.”
내가 살펴보건대 옛날에 주 무왕周 武王나라를 정벌하였을 때에 서려西旅에서 큰 개를 공물로 바치자, 태보太保(소공召公)가 〈여오旅獒〉편을 지어서 무왕에게 훈계하는 글을 올려 을 삼가는 경계를 이루었다.
훌륭했던 무왕조차도 소공召公이 이처럼 경계하는 말을 올렸으니, 후세의 군주가 깊이 생각하여 더욱 유념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태종이 사이四夷에서 오는 빈객賓客으로 인하여 진 시황秦 始皇한 무제漢 武帝의 예를 들어 스스로를 경계하고 간언을 구하였는데,
당시의 대신大臣이 비록 태보가 지었던 〈여오〉와 같은 훈계의 글을 올렸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나, 스스로 위태로워질까 염려하여 감히 게을리 행동하지 않아 밤낮으로 혹시라도 부지런하지 않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는 말에 부합함이 있었으니, 제왕이 다스림을 지키는 에 가깝다고 하겠다.


역주
역주1 始皇暴虐 至子而亡 : 秦나라는 始皇의 아들 二世皇帝 때 망하였다.
역주2 三尺劒 : 옛날 검은 대개 3척이었으므로 일컬은 말이다. 《史記》 〈高祖本紀〉에 “내가 포의의 신분으로 일어나서 석 자의 칼을 쥐고 천하를 차지하였으니, 이것이 하늘의 명이 아니겠는가.[吾以布衣提三尺劍取天下 此非天命乎]”라고 하였다.
역주3 遠夷率服 : 《書經》 〈虞書 舜典〉에 “오랑캐들이 모두 와서 복종하였다.[蠻夷率服]”라고 하였다.
역주4 二主末途 皆不能自保 : 秦 始皇의 맏아들 扶蘇가 姦臣들의 농간에 죽고, 漢 武帝의 太子 劉據 역시 간신의 농간에 죽은 사건을 들 수 있다. 秦 始皇 35년에 焚書坑儒를 저지르자 맏아들 扶蘇가 “儒生들이 孔子를 암송하며 받들고 있는데 황제께서 엄한 법으로 처벌하니 천하가 불안해질 것입니다.”라고 간언하니, 진 시황이 노하여 부소를 북쪽 上郡으로 보내 蒙恬 장군을 감시하게 하였으나, 실제로는 태자를 유배 보낸 것이다. 그 뒤에 진 시황이 순행 길에서 죽고 丞相 李斯와 趙高가 진 시황의 유언을 위조하여 막내아들 胡亥를 황제로 옹립하고 부소에게 명하여 자결토록 하자 부소는 자결하였다. 이후 간신들의 농간으로 인해 진나라는 얼마 안 있어 멸망하였다. 漢 武帝가 즉위한 지 50년 되는 征和 2년(B.C.91)에 무당과 術士들이 宮人을 미혹시켜 궁궐에 木人을 묻어 제사하는 巫蠱事件이 발생하였다. 마침 武帝가 병이 들자 江充을 시켜 巫蠱獄事를 다스리게 하였는데, 강충이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려고 戾太子(武帝의 태자 劉據)의 궁에서 목인을 가장 많이 파냈다고 보고하여 여태자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에 여태자는 군대를 일으켜 간신 강충을 죽였으나, 결국 丞相의 군대에 패하여, 湖縣으로 도망가서 은신하였다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뒤에 무제는 여태자의 억울함을 깨닫고 후회하던 끝에 思子宮을 짓고 歸來望思之臺를 만들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천하 사람들이 모두 눈시울을 적셨다. 《史記 권6 秦始皇本紀》, 《漢書 권63 武五子傳》
역주5 夙夜罔或不勤 : 西旅에서 큰 개를 바치자 召公이 武王을 경계하면서 “밤낮으로 혹시라도 부지런하지 않는 일이 없게 해야 합니다. 작은 행실을 조심하지 않으면 마침내 큰 덕에 누를 끼친 결과, 마치 아홉 길의 산을 쌓아 올리다가 한 삼태기의 흙을 덜 부어 망쳐버리는 것처럼 될 것입니다.[夙夜罔或不勤 不矜細行 終累大德 爲山九仞 功虧一簣]”라고 하였다. 《書經 周書 旅獒》

정관정요집론(3)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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