或君亂於上하고 臣理於下하며 或臣亂於下하고 君理於上하니 二者苟逢이면 何者爲甚이리오
君心理하면 則照見下非하여 誅一勸百하리니 誰敢不畏威盡力이리잇가
若昬暴於上
하여 忠諫不從
하면 雖百里奚伍子胥之在虞吳
라도 不救其禍
요 敗亡亦繼
注+一作促. 虞‧吳, 二國名. 百里奚, 虞之賢臣. 晉假道於虞以伐虢, 欲并取虞. 百里奚知虞公之不可諫, 而去之秦. 後果爲晉所滅. 伍子胥, 名員, 楚人, 吳之賢臣. 吳王夫差伐越, 越請和. 子胥諫, 吳王不聽, 與越平. 復欲伐齊, 子胥以爲不可, 吳王又不聽. 太宰嚭譛子胥於王, 王賜劒使自死. 後吳爲越王勾踐所滅.하리이다
必如此
인댄 齊文宣
은 昬暴
호대 楊遵彥
이 以正道扶之得理
는 何也
注+齊文宣, 姓高, 名洋, 東魏臣. 襲其父歡, 位封齊王, 受魏禪, 國號齊. 楊遵彦, 名愔, 仕齊爲尙書令. 文宣以功業自矜, 遂嗜酒淫泆, 肆行强暴, 而能委政楊愔, 總攝機衡, 百度修飭. 時人皆言 “主昏於上. 政淸於下.”오
遵彥이 彌縫暴主하여 救理蒼生이나 纔得免亂이요 亦甚危苦니 與人主嚴明하고 臣下畏法하여 直言正諫이 皆見信用으로 不可同年而語也니이다
君正則臣正하니 未有綱之不正하고 而能使其目之正者라
而太宗이 乃以齊文宣得楊遵彦으로 爲君亂臣治之比하니 殊不知彼之所爲가 才能救其亡耳라
孔子言 衛靈公之無道어늘 康子曰 夫如是어니 奚而不喪가하니 孔子曰 仲叔圉는 治賓客하고 祝鮀는 治宗廟하고 王孫賈는 治軍旅하니
愚按 書曰 后克艱厥后하고 臣克艱厥臣이라야 政乃乂하여 黎民敏德이라하니
君臣相須라야 以成至治니 此元首股肱所由以取喻也라
太宗之言이 未爲知要니 夫君亂臣理는 此季世之所見也라
정관貞觀 16년(642)에 태종太宗이 근신에게 말하였다.
“혹은 임금은 위에서 어지럽게 하고 신하는 아래에서 다스리며, 혹은 신하는 아래에서 어지럽게 하고 임금은 위에서 다스리니, 만약 이 두 가지 경우를 만나게 되면 어느 것이 더 심한 것이오?”
“임금의 마음이 다스려지면 아래의 잘못을 환히 보아서 한 사람을 죽여 백 사람을 권면할 것이니, 누가 감히 위엄을 두려워하여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임금이 위에서 어둡고 포악하여 충성스러운 간언을 따르지 않으면 비록
백리해百里奚와
오자서伍子胥가
우虞나라와
오吳나라에 있었지만 그 재앙을 구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패망이 또한 뒤따르게 하였던 것처럼 될 것입니다.”
注+〈계繼는〉 어떤 본에는 촉促으로 되어 있다. 우虞‧오吳는 두 나라 이름이다. 백리해百里奚는 우虞나라의 어진 신하이다. 진晉나라가 우虞나라에게 길을 빌려 괵虢나라를 치겠다고 하고는 아울러 우虞나라를 취하려고 하였다. 백리해는 우공虞公에게 간언할 수 없음을 알고 우虞나라를 떠나 진秦나라로 갔다. 그 후에 과연 우虞나라는 진晉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오자서伍子胥는 이름이 원員이니, 초楚나라 사람이고 오吳나라의 어진 신하이다.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월越나라를 치자 월越나라가 화친을 청하였다. 오자서가 간언하였으나 오왕이 따르지 않고 월越나라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다시 제齊나라를 치려고 하자 오자서가 옳지 않다고 말하였으나 오왕이 또 따르지 않았다. 태재太宰 비嚭가 오왕에게 오자서를 참소하자, 오왕이 검을 내려 오자서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하였다. 후에 오나라는 월왕越王 구천勾踐에게 멸망당하였다.
“반드시 이와 같다면
북제北齊의
문선제文宣帝가 어둡고 포악했지만
양준언楊遵彦이 바른길로 도와서 다스려지게 된 것은 무엇이오?”
注+북제北齊의 문선제文宣帝(529~559)는 성이 고高이며 이름은 양洋이니, 동위東魏의 신하였다. 아버지 고환高歡을 이어서 지위가 제왕齊王에 봉해졌고 위魏나라를 선양받아 국호를 제齊라고 하였다. 양준언楊遵彦은 이름이 음愔이니, 제齊나라에 벼슬하여 상서령尙書令이 되었다. 문선제가 공적을 자랑하여 마침내 술을 즐기고 음탕한 행동을 하였으며, 방자한 행동을 하고 포악한 짓을 하였으나 양음楊愔에게 정사를 맡겨 기형機衡(중추 직위)을 총괄하게 하니, 모든 일이 잘 다스려졌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군주는 위에서 어두운데 정사는 아래에서 맑구나.”라고 하였다.
“양준언이 포악한 군주를 이리저리 주선하여 백성들을 다스려 구제했으나 겨우 혼란을 면할 수 있었고, 또한 심히 위태로워 고생하였으니, 이는 임금은 밝고 엄격하며 신하들은 국법을 두려워하여 곧은 말과 올바른 간언이 모두 군주의 신임을 받아 쓰인 것과는 같은 수준에서 말할 수 없습니다.”
임금이 바르면 신하가 바르니, 벼리가 바르지 않은데 그물눈을 바르게 할 수 있는 경우는 없다.
그렇다면 임금이 만약 스스로 어지럽게 한다면 어찌 신하가 다스려지게 할 수 있겠는가.
정공鄭公(魏徵)의 말은 ‘벼리를 바르게 하는 도를 얻었다.’라고 말할 만하다.
그러나 태종太宗이 이에 제齊나라 문선제文宣帝가 양준언楊遵彦을 얻은 것으로 임금이 〈위에서〉 어지럽게 하였으나 신하가 〈아래에서〉 다스린 것과 비교를 하였으니, 저들이 한 것은 겨우 망하는 것을 구제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전혀 알지 못한 것이다.
공자孔子가 위영공衛靈公이 도가 없다고 말하자, 계강자季康子가 말하기를 ‘이와 같은데도 어찌하여 지위를 잃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중숙어仲叔圉는 빈객을 다스리고, 축타祝鮀는 종묘宗廟를 다스리고, 왕손가王孫賈는 군대를 다스렸습니다.
이와 같으니, 어찌 그 지위를 잃겠습니까.’라고 하였으니, 이는 또한 임금은 어지럽게 하고 신하는 다스린 것이다.
그러나 잃지 않는데 그쳤을 뿐이니, 어찌 나라를 일으킬 수 있겠는가.”
내가 살펴보건대, 《서경書經》 〈우서虞書 대우모大禹謨〉에 말하기를 “임금은 임금이 되는 것을 어렵게 여기며 신하는 신하가 되는 것을 어렵게 여겨야 정사가 다스려져서 백성들이 덕에 속히 교화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의존하여야 지극한 치세를 이룰 수 있으니, 이는 임금과 신하가 의지하는 것으로써 비유를 취한 것이다.
태종太宗의 말은 요점을 알지 못한 것이니, 임금이 어지럽게 하고 신하가 다스리는 것은 말세에 나타나는 것이다.
옛날 선대先代의 성대한 시기에서 찾아보면 태갑太甲이 욕심으로 법도를 무너뜨리고 방종함으로 예禮를 무너뜨렸으니 혼란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윤과 같이 태갑의 잘못을 바로잡고 구원하는 원성元聖(湯王)의 대신大臣이 반드시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어진 임금이 되었다.
여기에서 내려가면 위징이 말한바 ‘겨우 어지러움을 면할 수 있다.’라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임금이 다스리고 신하가 어지럽게 하는 것은 더욱 그럴 리가 없다.
임금이 잘 다스려서 정치와 형벌을 명백히 하면 신하가 어찌 스스로 어지럽게 하겠는가.
신하가 정사를 어지럽게 하는 것은 임금이 다스리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