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之所陳
에 朕聞過矣
라 當置之几案
하여 事等弦韋
注+弦, 弓弦. 韋, 柔皮也. 韓子曰 “西門豹性急, 佩韋以自緩, 董安于性緩, 佩弦以自急.”하리라
必望
하여 期之歲暮
하고 不使康哉良哉
로 獨美於往日
注+美, 亦作盛. 虞書舜皐陶賡歌之辭曰 “股肱良哉, 庶事康哉.”하고 若魚若水
가 遂爽於當今
注+蜀先主曰 “孤之有孔明, 猶魚之得水也.”이라
遲復嘉謀
하노니 犯而無隱
注+遲, 去聲. 禮 “事君有犯而無隠.”하라
朕將虛襟靜志
하여 敬佇德音
注+按太宗此詔, 係在十一年七月, 魏徴累上疏之後.하리라
李翶論修史之法에 則曰 假如傳魏徴하면 則記其諫諍之詞에 足以見正直이라하니
魏公事英主에 力賛治道하여 已成太平之治하고 見其小失하면 尙孜孜諫諍以防其甚하니라
如事中常之主하여 天下未治에 其君或有大過면 諫必危切이요 至安危大計하여는 必忘身以爭也리라
蓋輔相之道가 不至此면 不足以爲忠하니 後之爲相者는 宜詳之로다
魏徵教太宗十思에 使太宗能以是十思而充之면 則當時之治가 不惟貞觀而已리니 雖竝隆於堯舜이라도 可也니라
不惟大事能諫이라 雖小事라도 未嘗舍也요 不惟初年能諫이라 雖末年이라도 未嘗輟也라
이어늘 而是年一月之中
에 見於諫疏者
가 凡二焉
이라
見於書者如此하니 則其見於言者를 可知矣요 傳於世者如此하니 則其不傳於世者를 亦可知矣로다
臣不以數諫爲嫌하고 君不以數諫爲忤하니 其致貞觀之治가 有以也夫로다
今以二疏觀之하니 一以爲當監隋之所以失하고 念唐之所以得이요 一以爲有善始者實繁이나 能克終者實寡라
夫能懼得失而後에 能愼終始요 能愼終始면 則有得而無失矣리니 二疏之言은 相爲表裏者也라
공公의 진언에서 짐의 과실을 들었으니 당연히 책상에 놓아두고
완급緩急을 조절하는 지침으로 삼겠소.
注+현弦은 활줄이고, 위韋는 부드러운 가죽이다. 《한비자韓非子》 〈관행觀行〉에 “서문표西門豹는 성격이 급하여 부드러운 가죽을 차고 다니면서 스스로 느긋하게 하였고, 동안우董安于는 성격이 느긋하여 활줄을 차고 다니면서 스스로 긴장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반드시 초년의 실수를 수습하여 늘그막에 도모하기를 바라고, 신하가 훌륭하여 일이 편안하게 된다는 것이 과거의 아름다운 일로만 남게 하지 말고,
注+미美는 성盛으로도 되어 있다. 《서경書經》 〈우서虞書 익직益稷〉에 순舜임금과 고요皐陶가 이어가며 노래한 가사에 “고굉(신하)이 훌륭하여 모든 일이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물고기와 물과 같은 관계가 지금에도 어긋나게 하지 않겠소.
注+촉한蜀漢 선주先主(劉備)가 “나에게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있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아름다운 계획을 거듭하기를 기다릴 것이니, 면전에 직간함은 있고 은미하게 간함은 없어야 할 것이오.
注+지遲(기다리다)는 거성去聲이다. 《예기禮記》 〈단궁檀弓 상上〉에 “임금을 섬기는 데에는 면전에 직간함은 있고 은미하게 간함은 없다.”라고 하였다.
짐은 장차 마음을 비우고 뜻을 안정시키고서 경건하게 훌륭한 말을 기다리겠소.”
注+살펴보면 태종太宗의 이 조칙은 《자치통감資治通鑑》 정관貞觀 11년(637) 7월에 위징이 누차 올린 상소의 뒤에 실려 있다.
“위공魏公은 충직忠直으로 칭송받아 수백 년을 거쳐오면서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이고李翶가 역사 편찬의 법을 논할 적에 말하기를 ‘가령 위징魏徴의 열전을 만든다면 그 간쟁한 말을 기록하는 데에서 충분히 정직正直함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위공魏公이 간쟁諫諍의 도道를 얻었으니 그의 말이 충분히 후세에 진실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건의 상소는 바로 간쟁에 관한 저술이다.
위공魏公은 영특한 임금을 모실 적에 힘써 정치의 도를 도와 이미 태평의 치적을 이룩하고, 태종太宗의 작은 실수를 보면 여전히 힘써 간쟁하여 심각한 상황을 예방하였다.
만일 중간 등급의 임금을 섬겨 천하가 아직 다스려지지 않았을 적에 그 임금에게 혹 큰 과실이 있다면 간쟁을 반드시 위태롭고 절실하게 했을 것이고, 안위安危의 큰 계책에 있어서는 반드시 자신을 잊고 다투었을 것이다.
재상의 도가 이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충성이라고 하기에 부족하니 뒤에 재상이 된 자는 자세히 살펴야 할 것이다.”
“위징이 태종太宗에게 열 가지 생각[十思]을 가르치매 만일 태종이 이 열 가지 생각을 잘 확충해나갔다면 당시의 치적이 정관貞觀 정도에 그칠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니, 비록 요堯임금‧순舜임금과 나란히 융성한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위공의 열 가지 생각은 공자孔子의 아홉 가지 생각[九思]과 함께 만대에 훈계를 남길 수 있다.”
내가 살펴보건대 위징魏徵이 간언함에 있어서 신중했다고 이를 만하다.
큰일을 잘 간언했을 뿐만 아니라 비록 작은 일이라도 버려둔 적이 없고, 초년에 잘 간언했을 뿐만 아니라 비록 말년에 이르러서도 그친 적이 없었다.
역사에서 위징의 평생 간언한 상소가 200여 편이라고 일컫는데 이해(貞觀 11년) 한 달 동안 간언한 상소로 보이는 것이 두 건이다.
글에 나타난 것이 이와 같으니 말에 나타난 것을 알 만하고, 세상에 전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세상에 전하지 않는 것을 또한 알 만하다.
신하가 자주 간언함을 꺼리지 않고 임금이 자주 간언을 듣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으니 정관貞觀의 치적을 이룬 것이 이유가 있도다.
지금 이 상소 두 건을 살펴보니, 하나는 수隋나라가 천하를 잃은 까닭을 거울삼고 당唐나라가 천하를 얻은 까닭을 생각하라는 것이며, 하나는 시작을 잘하는 이는 실로 많으나 끝까지 잘하는 이는 실로 적다는 것이다.
얻고 잃는 것을 두려워한 뒤에야 처음부터 끝까지 신중히 할 수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신중히 할 수 있으면 얻음은 있고 잃음이 없을 것이니, 두 건 상소의 말은 서로 표리가 되는 것이다.
오긍吳兢이 두 건 상소를 합하여 1장章으로 만들었으니 그 뜻이 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