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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2)

정관정요집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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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집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貞觀五年 太宗 謂侍臣曰 忠臣烈士 何代無之리오마는 公等 知隋朝誰爲忠貞
王珪曰 臣聞太常丞注+ 臣聞太常丞:太常丞, 卿之佐也. 在京留守할새 見群賊縱橫注+ 見群賊縱橫:縱, 平聲.하고 遂轉騎遠詣江都하여 諫煬帝하여 令還京師注+ 令還京師:令, 平聲.하고
旣不受其言하얀 後更涕泣極諫하니 煬帝怒하여 乃遠使追兵하여 身死瘴癘之地이니이다
有虎賁郎中注+ 有虎賁郎中:賁, 音奔.獨孤盛注+ 獨孤盛:獨孤, 複姓, 盛, 名也. 在江都宿衛할새 起逆이어늘 盛惟一身으로 抗拒而死하니이다
太宗曰 屈突通 爲隋將注+ 屈突通 爲隋將:屈, 區勿切. 將, 去聲. 後同. 屈突, 虜複姓, 通, 名, 仕隋爲虎賁郎將. 初代王遣通守河東, 高祖兵圍之, 通守節不降, 後被擒. 帝勞之. 泣曰 “臣不能盡人臣之節, 故至此, 爲本朝羞.” 帝曰 “忠臣也.” 授兵部尙書, 從討王世充. 時通二子在洛, 帝曰 “以東洛屬公, 如何.” 通曰 “二兒死, 自其分, 終不以私害義.” 帝曰 “烈士徇節, 吾今見之.” 貞觀初卒.하여 共國家하여 戰於潼關注+ 共國家 戰於潼關:潼關, 在今華州華陽縣, 隷陝西省.이러니 聞京城陷하고 乃引兵東走注+ 乃引兵東走:走, 去聲.어늘
義兵 追及於桃林注+ 義兵 追及於桃林:桃林, 今陝州桃林縣, 隷河南.할새 朕遣其家人往招慰하니 遽殺其奴하고 又遣其子往하니 乃云
我蒙隋家驅使하여 已事兩帝하니 今者 吾死節之秋
汝舊於我家爲父子 今則於我家爲仇讎라하고
因射之하니 其子避走
所領士卒 多潰散하여 通惟一身이러니 向東南慟哭盡哀曰
臣荷國恩注+ 臣荷國恩:荷, 去聲.하여 任當將帥라가 智力俱盡하여 致此敗亡이나 非臣不竭誠於國이라하고
言盡 追兵擒之
太上皇 授其官이나 每托疾固辭하니 此之忠節 足可嘉尙이라
因勅所司하여 采訪大業中直諫被誅者子孫하여 聞奏하다
【集論】唐氏仲友曰 屈突通 不死於하고 更盡力於唐하니 尙得爲節義乎
曰 隋運已亡하여 河東之守 力戰不屈이나 天命有歸어늘 通如之何리오
斬家奴하고 射其子하며 兵敗力屈而後擒하니 亦足以報隋矣
商之亡也 雖如箕子 猶陳하고 封朝鮮하니 而欲責人以必死 不亦難乎
若通之竭力於所事 亦足以爲節義矣
愚按 太宗 稱獎隋世忠義之臣할새 於文臣則姚思廉이요 於武臣則屈突通也러니
或曰 二子 隋臣이로되 而仕於唐하여 國亡皆不能死하니 可以爲忠臣乎
愚應之曰 否 不同也
思廉 仕隋 不過諸王講讀之官耳 於軍國之重事 社稷之大計 固不與聞也
國亡커늘 諸人皆去하되 思廉獨不去하고 呵叱亂兵 辭嚴義正하고 又能扶掖舊君하여 泣拜而別이라
其後 代王 竟得善終이라
思廉講讀調護之職 可謂無負矣어니 曷爲而死哉리오
至於通하여는 則不然하니
通仕隋文 已躋貴顯하고 迨乎煬帝하여 尊寵加隆이라 嘗立大功하여 名聞天下하고
煬帝南行 付以關中之任하여 身受重寄하고 手握彊兵이어늘 國亡師敗 安所辭其死哉리오
竝二子之事觀之컨대 庸夫 能斷其是非矣
然則太宗之獎忠義 其得於思廉이요 而失於屈突乎인저


정관貞觀 5년(631)에 태종太宗시신侍臣에게 말하였다. “충신忠臣열사烈士가 어느 시대인들 없겠소만, 공들은 나라 조정에서 누가 충직했다고 생각하시오?”
왕규王珪가 말하였다. “신이 들은 바에 의하면, 태상승太常丞注+태상승太常丞의 보좌이다. 원선달元善達경성京城(장안長安)을 지키고 있었는데 도적들이 날뛰는 것을 보고注+(세로)은 평성平聲이다. 말을 타고 멀리 강도江都로 가서 수 양제에게 서울로 돌아갈 것을 간언하였고注+(하여금)은 평성平聲이다.,
그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자 다시 울부짖으며 간언을 하니, 수 양제가 노하여 그를 멀리 보내 병사들을 딸려 보내서 전염병이 도는 곳에서 죽게 했습니다.
호분랑중虎賁郎中注+(날쌔다)은 음이 이다. 독고성獨孤盛注+독고獨孤복성複姓이고, 은 이름이다. 강도江都에서 호위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우문화급宇文化及이 반역을 일으키자 독고성이 온 몸으로 저항하다 죽었습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굴돌통屈突通이 수나라 장수로 있으며注+(성씨)은 의 반절이다. (장수)은 거성去聲이다. 뒤에도 같다. 굴돌屈突은 흉노의 복성複姓이고 은 이름이며, 수나라 때 호분낭장虎賁郎將을 역임했다. 애초에 대왕代王이 굴돌통을 파견해 하동河東을 지키게 했는데, 고조高祖가 병사로 포위했으나 굴돌통이 절의로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가 뒤에 포로가 되었다. 고조가 위로하자, 울며 말하기를 “신이 신하의 절의를 다 지키지 못해 여기에 이른 것은 본 왕조의 수치입니다.”라고 하니, 고조가 “충신이다.”라고 하고,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임명하여 왕세충王世充을 토벌하게 했다. 당시 굴돌통의 두 아들이 낙양에 있었는데 고조가 말하기를 “동락東洛 지역을 공에게 소속시키려 하는데 어떻소?”라고 하니, 굴돌통이 이르기를 “두 아이가 죽는 것은 각자의 분수(운명)일 뿐이며, 결코 사적인 것으로 의리를 해칠 순 없습니다.”라고 하자, 고조가 말하기를 “열사가 절의를 지키는 것을 내가 지금 보았노라.”라고 했다. 정관 초기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나라와 동관潼關에서 전쟁을 벌였는데注+동관潼關은 지금 화주華州 화양현華陽縣에 있으며 섬서성陝西省에 속한다., 경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달려갔소.注+(달아나다)는 거성去聲이다.
屈突通屈突通
의병義兵(이연李淵 군대)이 도림桃林까지 추격할 무렵에注+도림桃林은 지금의 섬주陝州 도림현桃林縣이며 하남河南에 속한다. 짐이 그 집안 하인을 보내 그를 달래며 부르자 지 체 없이 그 하인을 죽였고, 다시 그 아들을 보내자, 이르기를,
‘내가 수나라에 등용돼서 이미 두 황제(문제와 양제)를 모셨으니, 지금은 내가 목숨을 걸고 절의를 지킬 즈음이다.
네가 과거에는 우리 집안의 부자父子 관계였지만, 지금은 우리 집안의 원수이다.’라고 하고
활을 꺼내 쏘자 그의 아들이 피해 도망갔소.
거느리던 부하 사졸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굴돌통만 홀로 남자, 동남쪽을 향해 한없이 통곡하여 슬픔을 다하면서
‘신이 국가의 은혜를 입어注+(입다, 받다)는 거성去聲이다. 장수의 책임을 맡았는데, 지혜와 힘이 모두 다해 이러한 패망에 이르렀지만, 신이 국가에 정성을 다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라고 하였고,
말이 끝날 즈음에 추격병이 그를 사로잡았소.
태상황太上皇(이연李淵)께서 그에게 관직을 내려주었으나 매번 병이라 핑계대고 굳이 사양했으니, 이러한 충절은 충분히 가상히 여길 만하오.”
그러면서 담당 부서에 명을 내려 대업大業 연간에 바르게 간언하다 죽임을 당한 이들의 자손들을 찾아 보고하도록 했다.
당중우唐仲友가 말하였다. “‘굴돌통이 조상稠桑에서 죽지 않고 당나라에 다시 진력했는데, 그러고도 절의를 지켰다고 할 수 있겠는가?’
‘수나라의 운명이 이미 다한 즈음에 하동河東의 지킴에서 굴복하지 않고 힘써 싸웠지만 천명天命이 결정되어 있었거늘 굴돌통이 어찌하겠는가.
집안 하인을 참수하고 아들에게 활을 쏘았으며, 병사가 패하고 힘이 다하고 나서 포로가 되었으니, 충분히 수나라에 보답한 것이다.
나라가 망할 즈음에 기자箕子 같은 분도 〈홍범洪範〉을 진술해주고 조선朝鮮에 책봉되었으니, 사람들에게 반드시 죽음을 요구하는 것이 또한 곤란하지 않는가.
굴돌통이 자기가 모신 임금에게 온 힘을 다한 것 또한 충분히 절의를 지켰다고 할 만하다.’”
내가 살펴보건대, 태종이 수나라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신하들을 거론하며 장려했는데, 문신文臣요사렴姚思廉이고 무신武臣은 굴돌통이다.
혹자가 “두 사람은 수나라 신하로서 당나라에 벼슬하여, 국가가 망했음에도 모두 목숨을 바치지 않았으니, 충신이라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기에,
내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다. 그와 같지 않다.
요사렴이 수나라에 벼슬한 것은 제왕諸王강독관講讀官에 지나지 않으며,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과 사직社稷의 큰 계책에 대해서는 본디 관여하지 않았다.
국가가 망하자 여느 사람들은 모두 떠났지만, 요사렴만은 홀로 떠나지 않고 혼란을 일으킨 병사들을 꾸짖었는데 말이 엄격하며 의리가 정당했고, 또 옛 임금을 부축하여 울며 절하고 이별했다.
그 뒤 대왕代王은 결국 일생을 잘 마감했다.
요사렴이 강독講讀조리調理와 보호의 직임에 대해 저버린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으니, 어찌 목숨을 바칠 것인가.
굴돌통의 경우는 다르다.
굴돌통이 수 문제隋 文帝에게 벼슬한 것은 이미 높은 자리에 올랐고, 양제煬帝 때엔 존엄과 총애가 보다 융성했으며, 양량楊諒양현감楊玄感의 난리 때는 일찍이 큰 공을 세워 이름이 천하에 드날렸다.
양제가 남쪽으로 가면서 관중關中의 직임을 내주어, 몸소 중한 부탁을 받고 손수 강한 병사를 거느렸거늘, 국가가 망하고 군사가 패망함에 있어 굴돌통이 어찌 그 죽음을 사양할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의 행적을 견주어 살펴보면, 하찮은 사람도 그 시시비비를 판단할 수 있다.
그렇다면 태종이 충성스럽고 의로운 신하를 장려함에 있어, 요사렴은 제대로 평가했지만 굴돌통은 잘못 거론한 것이다.”


역주
역주1 元善達 : 隋나라 때의 관리로 太常丞을 역임했다. 元善達이 越王 楊侗의 명령을 받아 江都까지 돌파하여 구원을 요청하고 京城으로 군대를 돌리도록 간언했지만 煬帝가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조정에 명령을 내려 원선달을 東陽郡으로 파견해 군량과 마초를 빨리 운반하도록 했는데 오래지 않아 원설달은 群盜에게 살해당했다.
역주2 宇文化及 : 선조는 흉노족이며 代郡 武川(지금의 내몽고자치구에 속함) 사람이다. 左翊衛大將軍인 宇文述의 아들로, 隋 煬帝 때 右屯衛將軍을 지냈다. 618년 武賁郞將司 馬德戡 등과 함께 강도에서 정변을 일으켜 양제를 살해하고, 양제의 조카인 秦王 楊浩를 황제로 추대한 다음 자신은 승상을 맡았다. 후에 양호를 독살하고 황제를 자칭하여 연호를 天壽, 국호를 許라고 했다. 619년 聊城에서 竇建德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죽었다.
역주3 稠桑 : 지금의 河南省 靈寶縣의 稠桑驛을 가리킨다. 高祖 李淵의 공격에 끝까지 저항했던 굴돌통이 결국 이 곳에서 항복했다.
역주4 洪範 : 禹王이 홍수를 다스릴 적에 1~9개의 점이 등에 그려져 있는 거북이를 洛水에서 발견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洛書를 그렸는데, 그것의 이치를 연역하여 만든 것이다. 훗날 周 武王이 殷나라를 멸망시키고 은나라의 賢人인 箕子에게 천하를 다스리는 大法을 묻자, 기자가 이것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역주5 楊諒玄感之亂 : 604년에 隋 文帝의 넷째 아들인 楊諒이 일으킨 반란과, 613년 尙書左僕射 楊素의 아들 楊玄感이 黎陽에서 일으킨 반란을 말한다. 두 반란 모두 隋 煬帝에 의해 진압되었다.

정관정요집론(2)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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