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歷代逋誅하여 莫能討擊이어늘 陛下責其逆亂殺主虐人하여 親總六軍하사 問罪遼碣하시니
未經旬日
에 卽拔遼東
하고 前後虜獲數十萬計
라 分配諸州
하여 無處不滿
하여 雪往代之宿恥
注+⑤ 雪往代之宿恥:隋文帝十八年, 高麗寇遼西, 遣楊諒討之, 無功. 煬帝六年, 徵其王元入朝, 不至. 八年, 徵天下兵擊之, 帝親征攻諸城, 不下, 來護兒宇文述等大敗. 九年, 復親征, 不拔. 十年, 復討之, 徵其王入朝, 竟不至.하고 掩崤陵之枯骨
注+⑥ 掩崤陵之枯骨:左傳, 僖公三十三年, 晉人及姜戎敗秦師于殽. 文公二年, 秦伯伐晉, 濟河焚舟, 取王官及郊. 晉人不出, 遂自茅津濟, 封殽尸而還.하니 比功校德
하면 萬倍前王
이라
覩夷狄之將亡
하면 則指期數歲
하시고 授將帥之節度
注+⑦ 授將帥之節度:將帥之將, 去聲, 後同.하면 則決機萬里
하시며 屈指而候驛
하시고 視景而望書
하시니 符應若神
하고 筭無遺策
이라
고구려高句麗는 역대로 토벌을 피하여 토벌하지 못했는데, 폐하께서 개소문蓋蘇文이 반역을 꾀하여 군주를 시해하고 백성들을 잔학하게 대하는 것에 대해 질책하여 친히 6군을 인솔하여 요하遼河와 갈석碣石에서 그 죄를 물으셨습니다.
열흘도 되지 않아
요동遼東을 함락하였고, 전후로 수십만 명을 포로로 잡아들였습니다. 포로들을 여러
주州로 분배하여 포로가 넘쳐나지 않는 곳이 없어서,
수隋나라 때 당했던 묵은 수모를 설욕하고
注+수 문제隋 文帝 18년(598)에 고구려가 요서遼西를 침략하자, 양량楊諒을 보내어 토벌하였는데,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 수 양제隋 煬帝 6년(610)에 고구려왕 고원高元(영양왕嬰陽王)을 불러 입조入朝하게 하였는데 오지 않았다. 수 양제 8년에 천하의 병사들을 징발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수 양제가 직접 정벌에 나서서 여러 성들을 공략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내호아來護兒와 우문술宇文述 등의 장수들이 크게 패하였다. 수 양제 9년에 다시 직접 정벌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수 양제 10년에 다시 정벌에 나서 고구려왕을 불러 입조하게 하였으나 끝내 오지 않았다. 효릉崤陵의 전투처럼 방치되어 썩어가는
전사자戰死者의 유골을 매장하였으니
注+《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33년에 진晉나라가 강융姜戎과 함께 진秦나라 군대를 효산殽山에서 쳐부수었다. 문공文公 2년에 진백秦伯이 진晉나라를 공격하여 황하를 건넌 후 타고 있던 배를 불태워버리고서 왕관王官(진晉 지명)과 교郊(진晉 지명)를 빼앗았다. 그러나 진나라가 싸우러 나오지 않자, 진군秦軍은 모진茅津(진晉 지명)에서 황하를 건너 지난번 효산에 버려진 전사자戰死者의 시신을 매장하고 돌아왔다., 그 공과 덕을 비교하면 전대 왕들보다 만 배가 됩니다.
이는 폐하께서 잘 아시는 것이니, 미천한 신이 어찌 감히 다 말씀드리겠습니까.
게다가 폐하의 인후한 풍모는 천하를 뒤덮고, 효성과 덕성은 하늘과 짝이 되시니,
오랑캐가 멸망하는 것을 살펴보시는 경우는 시기를 몇 년으로 지적하시고, 장수에게 부절을 주는 경우는
注+장수將帥의 장將(장수)은 거성去聲이다. 뒤에도 같다. 만 리에서 기미를 결정하시며, 손꼽아가면서 파발마의 보고를 기다리고 해 그림자를 보며 서신을 바라시니, 부합하시는 것은 신처럼 응하고 계산하신 것은 빠트린 책략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