蓋述往牒之治亂은 爲將來之龜鑑也니 此政善惡은 皆吾師者矣라
雖然
이나 旣非上聖之資
인댄 則學問之道
는 當
淺而及深
하고 逌近而至遠
하니 可不鑑戒也哉
아
予今講貞觀政要하여 而敬玩皇朙憲宗皇帝親製序文하니 辭簡理明하여 猗與帝綸에 三復欽歎하고 且切興嘅로다
噫라 將三代之宏治로 比漢唐之借仁하면 王霸之分이 判若黑白이라
어늘 而眇予小子
는 承祖宗艱大之業
하여 臨靑丘億兆之民
이 于今一紀于玆
로되 而因其涼德
하여 治效未聞
하니 比諸漢唐
에 其亦遠矣
하니
觀於斯書
에 感愧交中
하여 敢以蕪辭
로 略攄于後
하여 表予自勵自勉之心
이나 而字劃未精
하여 不能手寫
할새 爰命善書大臣
하여 書以入梓
하고 皇明序文
도 亦令
으로 摹唐本而重刊
하니 之思
가 庶幾不泯云爾
라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 兼領經筵事 監春秋館事 臣
은 奉敎書
하노라
과거 전적에서 치란을 서술하는 것은 장래의 귀감을 위해서이니, 전적에 드러난 정치의 선악은 모두 내가 스승으로 여기는 것이다.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순舜임금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하였는데, 송宋나라 신종神宗이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을 짐朕이 어찌 바라겠는가.”라고 하자, 정자程子(程顥)가 서글퍼하였다.
입지立志가 낮지 않아야 하는 것은 평민도 그러한데 하물며 제왕帝王이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이미 가장 높은 성인聖人의 자질이 아니라면 학문學問의 도道는 당연히 낮은 데로부터 깊은 데에 미치고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에 이르러야 하니, 교훈으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론하면서 명明나라 헌종황제憲宗皇帝의 어제御製 서문을 경건히 음미해보니, 말이 간결하고 이치가 명백하여 아름다운 황제의 훈계에 재삼 경탄하고 또 절실하게 감탄하였다.
아, 삼대三代의 위대한 치적을 한漢나라‧당唐나라에서 인仁을 빌려 다스린 것에 견주어보면 왕도王道와 패도霸道의 구분이 흑백黑白처럼 판별된다.
옛날 공자孔子 문하의 제자들은 비록 5척 동자라도 춘추春秋 오패五霸를 일컫기를 부끄러워하였거늘 부족한 나 소자小子(英祖)는 조종祖宗의 어렵고 큰 왕업을 계승하여 청구靑丘(우리나라)의 억조 백성을 다스린 것이 지금 12년이나 되었는데도 덕이 모자라 다스린 효과가 소문나지 않았으니 한漢나라‧당唐나라에 견주어보아도 차이가 크다.
위로 명明나라 헌종憲宗 어제서御製序〈에서 인용한 《중용中庸》〉의 ‘먼 데를 갈 적에는 가까운 데에서 출발하며 높은 데를 오를 적에는 낮은 데에서 오른다.’는 교훈과 내게 조종祖宗의 큰일을 물려주고 어려운 일을 던져주신 뜻을 저버렸다.
이 책을 보고는 감격과 부끄러움이 마음에 교차하여 감히 서투른 글로 뒤에 간략히 피력하여 나 스스로 면려하는 마음을 드러내었으나 글씨가 서툴러 손수 쓰지 못하기 때문에, 글씨 잘 쓰는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써서 판각하게 하고 명明나라 헌종憲宗의 서문도 운각芸閣에서 당본唐本(중국본)을 본떠 중간重刊하게 하였으니, 《시경詩經》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의 우려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때는
겨울, 손을 모아 절하고 삼가 서문을 쓰노라.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겸영경연사兼領經筵事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신臣 서명균徐命均은 교명을 받들어 글씨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