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貞觀政要集論(1)

정관정요집론(1)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정관정요집론(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夫歷代史書 何爲而作也
蓋述往牒之治亂 爲將來之龜鑑也 此政善惡 皆吾師者矣
立志之不卑 韋布猶然이온 況帝王乎
雖然이나 旣非上聖之資인댄 則學問之道淺而及深하고 逌近而至遠하니 可不鑑戒也哉
予今講貞觀政要하여 而敬玩皇朙憲宗皇帝親製序文하니 辭簡理明하여 猗與帝綸 三復欽歎하고 且切興嘅로다
將三代之宏治 比漢唐之借仁하면 王霸之分 判若黑白이라
어늘 而眇予小子 承祖宗艱大之業하여 臨靑丘億兆之民 于今一紀于玆로되 而因其涼德하여 治效未聞하니 比諸漢唐 其亦遠矣하니
上負御製之訓 祖宗之意로다
觀於斯書 感愧交中하여 敢以蕪辭 略攄于後하여 表予自勵自勉之心이나 而字劃未精하여 不能手寫할새 爰命善書大臣하여 書以入梓하고 皇明序文 亦令으로 摹唐本而重刊하니 之思 庶幾不泯云爾
峕皇明紀元後九十一䄵甲寅冬 拜手謹敍하노라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 兼領經筵事 監春秋館事 臣 奉敎書하노라


御製貞觀政要後序
역대歷代 사서史書는 무엇 때문에 지었는가.
과거 전적에서 치란을 서술하는 것은 장래의 귀감을 위해서이니, 전적에 드러난 정치의 선악은 모두 내가 스승으로 여기는 것이다.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임금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하였는데, 나라 신종神宗이 “임금과 임금을 이 어찌 바라겠는가.”라고 하자, 정자程子(程顥)가 서글퍼하였다.
입지立志가 낮지 않아야 하는 것은 평민도 그러한데 하물며 제왕帝王이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이미 가장 높은 성인聖人의 자질이 아니라면 학문學問는 당연히 낮은 데로부터 깊은 데에 미치고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에 이르러야 하니, 교훈으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론하면서 나라 헌종황제憲宗皇帝어제御製 서문을 경건히 음미해보니, 말이 간결하고 이치가 명백하여 아름다운 황제의 훈계에 재삼 경탄하고 또 절실하게 감탄하였다.
아, 삼대三代의 위대한 치적을 나라‧나라에서 을 빌려 다스린 것에 견주어보면 왕도王道패도霸道의 구분이 흑백黑白처럼 판별된다.
옛날 공자孔子 문하의 제자들은 비록 5척 동자라도 춘추春秋 오패五霸를 일컫기를 부끄러워하였거늘 부족한 나 소자小子(英祖)는 조종祖宗의 어렵고 큰 왕업을 계승하여 청구靑丘(우리나라)의 억조 백성을 다스린 것이 지금 12년이나 되었는데도 덕이 모자라 다스린 효과가 소문나지 않았으니 나라‧나라에 견주어보아도 차이가 크다.
위로 나라 헌종憲宗 어제서御製序〈에서 인용한 《중용中庸》〉의 ‘먼 데를 갈 적에는 가까운 데에서 출발하며 높은 데를 오를 적에는 낮은 데에서 오른다.’는 교훈과 내게 조종祖宗의 큰일을 물려주고 어려운 일을 던져주신 뜻을 저버렸다.
이 책을 보고는 감격과 부끄러움이 마음에 교차하여 감히 서투른 글로 뒤에 간략히 피력하여 나 스스로 면려하는 마음을 드러내었으나 글씨가 서툴러 손수 쓰지 못하기 때문에, 글씨 잘 쓰는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써서 판각하게 하고 나라 헌종憲宗의 서문도 운각芸閣에서 당본唐本(중국본)을 본떠 중간重刊하게 하였으니, 《시경詩經》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의 우려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때는 겨울, 손을 모아 절하고 삼가 서문을 쓰노라.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겸영경연사兼領經筵事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서명균徐命均은 교명을 받들어 글씨를 쓴다.


역주
역주1 御製貞觀政要後序 : 朝鮮 英祖가 짓고, 大臣인 徐命均에게 명하여 글씨 쓰게 한 어제서이다.
역주2 舜何人……予何人 : 《孟子》 〈滕文公 上〉에 보인다.
역주3 宋之神宗……而程子愀然 : 《二程文集》 권12 〈明道先生行狀〉에 “神宗이 ‘이것은 堯임금‧舜임금의 일이니 朕이 어찌 감당하겠소.’라고 하니, 明道 선생이 서글퍼하여 ‘陛下의 이 말은 天下의 복이 아닙니다.’[神宗曰 此堯舜之事 朕何敢當 先生愀然曰 陛下此言 非天下之福也]”라고 하였다.
역주4 逌(유) : 由와 통용된다.
역주5 昔之孔門之徒……羞穪五霸 : 漢나라 董仲舒가 말하기를 “孔子 문하의 제자들은 비록 5척의 아동이라도 春秋 五霸를 일컫기 부끄러워하였으니, 거짓과 무력을 우선하고 仁義를 뒤로하였기 때문이다.[仲尼之門 五尺童子羞稱五霸 爲其先詐力而後仁義也]”라고 하였다. 《漢書 권56 董仲舒列傳》
五霸는 춘추시대에 會盟의 盟主가 된 다섯 명의 군주로, 齊 桓公, 晉 文公, 秦 穆公, 宋 襄公, 楚 莊王을 말한다. 또는 宋 襄公 대신에 吳王 闔閭를, 秦 穆公 대신에 越王 勾踐을 넣기도 한다.
역주6 行遠登高 : 35쪽 역주5) 참조.
역주7 遺大投艱 : 큰일을 물려주고 어려운 일을 던져주었다는 뜻으로, 《書經》 〈周書 大誥〉에 “내 하는 일은 하늘이 시키신 것이다. 내 몸에 큰일을 물려주고 어려운 일을 던져주시니, 나 沖人(어린 임금)은 나 자신을 생각할 겨를도 없다.[予造天役 遺大投艱于朕身 越予沖人 不卬自恤]”라고 하였다.
역주8 芸閣 : 조선시대 校書館의 별칭으로 규장각의 屬司이다. 經籍의 인쇄와 제사 때 쓰이는 향, 축문, 印信 등을 관장했다. 규장각을 內閣이라 하고 교서관을 外閣이라 하기도 한다.
역주9 匪風下泉 : 〈匪風〉은 《詩經》 〈檜風〉의 편명이고, 〈下泉〉은 〈曹風〉의 편명으로, 모두 왕업이 쇠퇴하고 정사가 가혹해진 것을 슬퍼하는 내용이다.
역주10 徐命均 : 680~1745. 英祖 때의 相臣이다. 자는 平甫, 호는 保拙齋‧嘯皐‧在澗이다. 본관은 達城이다. 관직이 左議政에 이르렀다. 청백하고 근검한 재상으로 유명하였고, 글씨를 잘 썼다. 시호는 文翼이다.
역주11 明나라……甲寅年(1734) : 明나라 崇禎皇帝 연호 이후 91년이 되는 갑인년. 崇禎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思宗, 즉 毅宗의 연호로, 1627년 丁卯年(즉위년)부터 사용하여 1644년 甲申年까지 사용되었다. 甲寅年(1734)은 1644년 이후 91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의리를 지킨다는 의도에서 明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이 ‘崇禎’을 계속 사용하였고, 심지어 일제 강점기까지 사용한 경우도 있다.

정관정요집론(1) 책은 2019.06.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