有顔回者好學하야 不遷怒하며 不貳過하더니 不幸短命死矣라
疏
‘哀公問 弟子孰爲好學’者, 魯君哀公問於孔子曰 “弟子之中, 誰爲樂於好學者.”
‘孔子對曰 有顔回者好學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者, 孔子對哀公曰 “有弟子顔回者, 其人好學.”
凡人任情, 喜怒違理, 顔回任道, 怒不過分而當其理, 不移易, 不遷怒也.
人皆有過憚改, 顔回有不善, 未嘗不知, 知之, 未嘗復行, 不貳過也.
凡事應失而得曰幸, 應得而失曰不幸. 惡人橫夭, 則惟其常, 顔回以德行著名, 應得壽考, 而反二十九髮盡白, 三十二而卒,
疏
○正義曰:云 ‘凡人任情 喜怒違理’者, 言凡常之人, 信任邪情, 恣其喜怒, 違於分理也.
云 ‘顔回任道 怒不過分’者, 言顔回好學旣深, 信用至道, 故怒不過其分理也.
有不善, 未嘗不知, 知之, 未嘗復行也.’”
注云 “
, 顔子之分也.
失之於幾, 故有不善, 得之於貳, 不遠而復, 故知之, 未嘗復行也.” 引之以證不貳過也.
此稱其好學, 而言不遷怒貳過者, 以不遷怒貳過, 由於學問旣篤, 任道而行, 故擧以言焉, 以明好學之深也.
“안회顔回란 자가 있어 배움을 좋아하여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잘못을 거듭 범하지 않았는데, 불행히도 목숨이 짧아 죽었습니다.
지금은 없으니 배움을 좋아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注
일반인들은 자기 뜻대로 행동하여 기뻐하고 노여워함이 사리에 어긋나지만, 안회顔回는 도를 따라서 노여워함이 분수를 넘지 않았다.
천遷은 옮김이니, 노여워함이 그 사리에 맞고, 〈또〉 옮기지 않은 것이다.
불이과不貳過는 불선不善한 일이 있으면 〈즉시 고쳤고〉 다시 행한 적이 없는 것이다.
疏
○正義曰:이 장은 안회顔回의 덕을 칭찬한 것이다.
[哀公問 弟子孰爲好學] 노魯나라 임금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제자 중에 배움을 좋아하는 자가 누구냐?”고 물은 것이다.
[孔子對曰 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 공자께서 애공에게 “제자 중에 안회란 자가 있어 그 사람이 배움을 좋아합니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일반인들은 자기 뜻대로 행동하여 기뻐하고 노여워함이 사리에 어긋나지만, 안회는 도를 따라서 노여워함이 분수를 넘지 않고 사리에 맞았으며, 옮기지 않았으니, 〈이것이〉 노여움을 옮기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만 안회는 불선不善(잘못)이 있으면 알지 못한 적이 없었고, 알면 다시 행한 적이 없었으니, 〈이것이〉 잘못을 거듭 범하지 않은 것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잃는 것이 당연한데도 얻는 것을 ‘행幸’이라 하고, 얻는 것이 당연한데도 잃는 것을 ‘불행不幸’이라 하니, 악인惡人이 횡요橫夭(뜻밖에 재앙을 받아 요사夭死)하는 것은 정상이지만, 안회는 덕행으로 명성이 드러났으니 장수를 누리는 것이 당연한데, 도리어 29세에 머리가 다 하얗게 세고 32세에 죽었다.
그러므로 “불행히도 목숨이 짧아 죽었다.”고 한 것이다.
지금은 배움을 좋아하는 자가 없으니 다시 배움을 좋아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疏
○正義曰:[凡人任情 喜怒違理] 일반인들은 바르지 못한 생각을 믿고 따라서 기쁨과 노여움을 제멋대로 자행하여 분수와 도리를 어긴다는 말이다.
[顔回任道 怒不過分] 안회는 배움을 좋아하는 마음이 이미 깊어 지극한 도를 믿고 따르기 때문에 노여워함이 그 분수와 도리를 넘지 않았다는 말이다.
[有不善 未嘗復行]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하下〉의 글이다.
《주역》 〈계사전〉에 “자子께서 ‘안씨顔氏의 아들은 기미幾微를 아는 데 거의 근접하였다.
불선不善(허물)이 있으면 알지 못한 적이 없고, 알면 다시 행한 적이 없었다.’고 하셨다.”라고 하였는데, 한강백韓康伯의 주注에 “기미의 이치[幾理]에는 어둡고, 형기形器로 조성造成되어야 깨달은 것이 안자의 천분天分(타고난 자질)이다.
기미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불선함이 있었고, 잘못을 거듭 범해서는 안 됨을 알고서 멀리 벗어나지 않고 되돌아왔기 때문에, 알면 다시 행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을 이끌어 잘못을 거듭 범하지 않은 증거로 삼은 것이다.
이곳의 말은 안자의 호학好學을 칭찬한 것인데, ‘불천노이과不遷怒貳過’를 말한 것은 ‘불천노이과不遷怒貳過’가 학문이 이미 독篤(深厚)하여 도를 믿고 따라 행한 데서 유래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들어 말하여 배우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깊었음을 밝힌 것이다.
일설一說에 “애공이 노여움을 옮기고 과오를 거듭 범하였기 때문에 공자께서 이 말로 넌지시 간諫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