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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注疏(2)

논어주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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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주소(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7. 顔淵死 顔路請子之車以爲之槨하니
[注]孔曰 路 淵父也
家貧하야 欲請孔子之車하야 賣以作槨이라
子曰
才不才 亦各言其子也
鯉也死 有棺而無槨하니 吾不徒行以爲之槨 以吾從大夫之後 不可徒行也ᄅ새니라
[注]孔曰 鯉 孔子之子伯魚也
孔子時爲大夫어늘 言從大夫之後 不可以徒行 謙辭也
[疏]‘顔淵死’至‘徒行也’
○正義曰 : 此幷三章記顔回死時孔子之語也.
‘顔淵死 顔路請子之車 以爲之槨’者, 路, 顔淵父也.
家貧, 欲請孔子之車, 賣以作槨也.
‘子曰 才不才 亦各言其子也 鯉也死 有棺而無槨 吾不徒行以爲之槨’者, 此擧親喩疏也.
言淵才鯉不才雖異, 亦各言其子則同.
我子鯉也死時, 但有棺, 以家貧而無槨, 吾不賣車以作槨.
今女子死, 安得賣我車以作槨乎.
‘以吾從大夫之後 不可徒行也’者, 此言不可賣車作槨之由.
徒行, 步行也.
以吾爲大夫, 不可徒行故也.
孔子時爲大夫, 言從大夫之後者, 謙辭也.
[疏]○注 ‘孔曰’至‘辭也’
○正義曰 : 云‘鯉 孔子之子伯魚也’者, 世家文也.
云‘孔子時爲大夫 言從大夫之後 不可以徒行 謙辭也’者, 案孔子世家 “定公十四年, 孔子年五十六, 由大司寇攝行相事.
魯受齊女樂, 不聽政三日, 孔子遂適衛.
歷至宋‧鄭‧陳‧蔡‧晉‧楚, 去魯凡十四歲而反乎魯. 然魯終不能用. 孔子亦不求仕,
以哀公十六年卒, 年七十三.”
今案顔回少孔子三十歲, 三十二而卒, 則顔回卒時, 孔子年六十一, 方在陳‧蔡矣.
伯魚年五十, 先孔子死, 則鯉也死時, 孔子盖年七十左右,
皆非在大夫位時. 而此注云 ‘時爲大夫’, 未知有何所據也.
杜預曰 “嘗爲大夫而去, 故言後也.”
據其年, 則顔回先伯魚卒, 而此云“顔回死, 顔路請子之車以爲之槨, 子曰 ‘鯉也死, 有棺而無槨.’”, 又似伯魚先死者.
王肅家語注云 “此書久遠, 年數錯誤, 未可詳也.”
或以爲假設之辭也.
徒, 猶空也, 謂無車空行也.
是步行謂之徒行,
故左傳襄元年 “敗鄭徒兵於洧上.”, 杜注云 “徒兵, 步兵也.”


안연顔淵이 죽자, 안로顔路공자孔子의 수레를 하여 그것을 팔아 안회顔回외곽外槨을 마련하고자 하니,
공왈孔曰 : 안연顔淵의 아버지이다.
집이 가난하여, 공자孔子의 수레를 청하여 그것을 팔아서 외곽外槨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께서 말씀하셨다.
“재주가 있건 재주가 없건 〈관계없이〉 각각 제 아들이라 말한다.
가 죽었을 때에 내관內棺만 있고 외곽外槨은 없었으니, 내가 걸어 다니기로 작정하고서 〈수레를 팔아 의〉 외곽外槨을 만들어주지 않은 것은, 나는 대부大夫의 뒤를 따르는 사람인지라 걸어 다녀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공왈孔曰 : 공자孔子의 아들 백어伯魚이다.
공자孔子는 이때 대부大夫로 계셨는데, “대부大夫의 뒤를 따르는 사람인지라 걸어 다녀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겸사謙辭이다.
의 [顔淵死]에서 [徒行也]까지
정의왈正義曰 : 이 장과 아래 세 장은 모두 안회顔回가 죽었을 때에 공자孔子께서 하신 말씀을 기록한 것이다.
[顔淵死 顔路請子之車 以爲之槨] 안로顔路안연顔淵의 아버지이다.
집이 가난하여 공자孔子의 수레를 청하여 그것을 팔아서 외곽外槨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子曰 才不才 亦各言其子也 鯉也死 有棺而無槨 吾不徒行以爲之槨] 이것은 친밀親密한 자를 들어 소원疏遠한 자를 비유한 것이다.
안연顔淵은 재주가 있고 는 재주가 없는 것이 비록 다르지만 또한 각각 제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같다.
‘내 아들 가 죽었을 때에 내관內棺만 있고, 집이 가난하기 때문에 외곽外槨이 없었으나, 나는 수레를 팔아 외곽外槨을 마련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너의 아들의 죽음에 어찌 나의 수레를 팔아서 외곽을 마련해줄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以吾從大夫之後 不可徒行也] 이것은 수레를 팔아 외곽外槨을 마련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도행徒行보행步行이다.
‘나는 대부大夫가 되었으니 도행徒行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공자孔子께서 이때 대부大夫로 계셨는데, 대부大夫의 뒤를 따른다고 말씀하신 것은 겸사謙辭이다.
의 [孔曰]에서 [辭也]까지
정의왈正義曰 : [鯉 孔子之子伯魚也]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의 글이다.
[孔子時爲大夫 言從大夫之後 不可以徒行 謙辭也] 〈공자세가孔子世家〉를 고찰하건대, “정공定公 14년에 공자孔子의 나이가 56세였는데, 대사구大司寇로서 승상丞相의 일을 대행代行하셨다.
나라 군신君臣나라가 보낸 여악女樂을 받아들이고서 3일 동안 정사政事를 살피지 않으니, 공자께서 마침내 나라를 떠나 나라로 가셨다.
나라ㆍ鄭나라ㆍ陳나라ㆍ蔡나라ㆍ晉나라ㆍ楚나라를 두루 돌아다니시다가 나라를 떠나신 지 14년 만에 나라로 돌아오셨다. 그러나 나라가 끝내 공자孔子를 등용하지 않으니, 공자孔子도 벼슬을 구하지 않으셨다.
애공哀公 16년에 하시니 연세年歲가 73세였다.”라고 하였다.
지금 고찰하건대, 안회顔回공자孔子보다 30세 아래인데 32세에 죽었으니, 안회顔回가 죽을 때에 공자孔子는 61세로 그때 나라와 나라에 계셨다.
백어伯魚는 나이 50세에 공자孔子보다 먼저 죽었으니, 가 죽었을 때 공자孔子연세年歲가 아마도 70세 전후였을 것이다.
안연顔淵이 죽을 때나 가 죽을 때나〉 모두 〈공자孔子께서〉 대부大夫의 자리에 계실 때가 아닌데, 이 에 “이때 대부로 계셨다.[時爲大夫]”라고 한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다.
두예杜預는 “일찍이 대부로 계시다가 떠나셨기 때문에 뒤(後)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말한 연대年代에 의거하면 안회顔回백어伯魚보다 먼저 죽었는데, 여기에는 “안연顔淵이 죽자, 안로顔路공자孔子의 수레를 하여 그것을 팔아 안회顔回외곽外槨을 마련하고자 하니, 께서 ‘가 죽었을 적에 내관內棺만 있고 외곽外槨은 없었다.’라고 하셨다.”라고 하였으니, 또 백어伯魚가 먼저 죽은 것 같다.
왕숙王肅의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이 책은 오래되어 연수年數에 착오가 있어 자세히 알 수 없다.”라고 하였다.
혹자或者는 〈에 대한 말씀은〉 가설하신 말씀이라고 하였다.
(없음)과 같으니, 수레 없이 걸어감을 이른다.
보행步行도행徒行이라 한다.
그러므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양공襄公 원년元年에 “나라 도병徒兵유수洧水 가에서 패배敗北시켰다.”라고 한 곳의 두예杜預 에 “도병徒兵보병步兵이다.”라고 하였다.



논어주소(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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