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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注疏(1)

논어주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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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冉有曰
夫子爲衛君乎
[注]鄭曰 爲 猶助也
衛君者 謂輒也
衛靈公逐太子蒯聵러니 公薨而立孫輒하니라
晉趙鞅納蒯聵於戚城하니 衛石曼姑帥師圍之하니라
故問其意助輒不乎아하니라
子貢曰
吾將問之호리라
하야
伯夷叔齊何人也잇고
古之賢人也니라
怨乎잇가
求仁而得仁이어니 又何怨이리오
[注]孔曰 夷齊讓國遠去하야 終於餓死
故問怨邪
以讓爲仁하니 豈有怨乎
하야
夫子不爲也시리러라
[注]鄭曰 父子爭國 惡行이라
孔子以伯夷叔齊爲賢且仁이라
故知不助衛君明矣
[疏]‘冉有’至‘爲也’
○正義曰:此章記孔子崇仁讓也.
‘冉有曰 夫子爲衛君乎’者, 爲, 猶助也.
衛君, 謂出公輒也.
衛靈公逐太子蒯聵, 公薨而立孫輒, 輒卽蒯聵之子也.
後晉趙鞅納蒯聵於戚城, 衛石曼姑帥師圍之.
子而拒父, 惡行之甚.
時孔子在衛, 爲輒所賓禮, 人疑孔子助輒.
故冉有言問其友曰 “夫子之意, 助輒不乎.”
‘子貢曰 諾 吾將問之’者, 子貢承冉有之問, 其意亦未決,
故諾其言, 我將入問夫子, 庶知其助不也.
‘入曰 伯夷‧叔齊何人也’者, 此子貢問孔子辭也.
伯夷‧叔齊, 孤竹君之二子. 兄弟讓國遠去, 終於餓死. 今衛乃父子爭國, 爭‧讓正反.
所以擧夷‧齊爲問者, 子貢意言夫子若不助衛君, 應言夷‧齊爲是, 夫子若助衛君, 應言夷‧齊爲非.
故入問曰 “伯夷‧叔齊, 何人也.”
‘曰 古之賢人也’者, 孔子答言 “是古之讓國之賢人也.”
‘曰怨乎’者, 此子貢復問曰 “夷‧齊初雖有讓國之賢, 而終於餓死, 得無怨恨邪.”
所以復問此者, 子貢意言, 若夫子不助衛君, 應言不怨, 若助衛君, 則應言有怨也.
‘曰 求仁而得仁 又何怨’者, 此孔子答言不怨也.
初心讓國, 求爲仁也.
君子殺身以成仁,
夷‧齊雖終於餓死, 得成於仁, 豈有怨乎.
故曰 “又何怨.”
‘出曰 夫子不爲也’者, 子貢旣問而出, 見冉有而告之曰 “夫子不助衛君也.” 知其父子爭國惡行也.
孔子以伯夷‧叔齊爲賢且仁, 故知不助衛君明矣.
[疏]○注 ‘鄭曰’至‘不乎’
○正義曰:云 ‘衛靈公逐太子蒯聵’者, 案左傳定十四年 “蒯聵謀殺靈公夫人南子, 不能而出奔宋.” 是也.
云 ‘公薨而立孫輒’者, 哀二年左傳曰 “夏, 衛靈公卒, 夫人曰 ‘命公子郢爲太子,
君命也.’ 對曰 ‘郢異於他子, 且君沒於吾手, 若有之, 郢必聞之.
且亡人之子輒在.’
乃立輒.” 是也.
云 ‘後晉趙鞅納蒯聵於戚城’者, 亦哀二年春秋文也.
云 ‘衛石曼姑帥師圍之’者, 春秋哀三年春 “齊國夏‧衛石曼姑, 帥師圍戚.” 是也.


염유冉有가 말하였다.
부자夫子께서 나라 임금을 도우실까?”
정왈鄭曰:와 같다.
위군衛君을 이른다.
영공靈公태자太子 괴외蒯聵를 축출하였는데, 영공靈公이 죽자 손자孫子 을 세웠다.
뒤에 나라 조앙趙鞅괴외蒯聵척성戚城으로 들여보내니, 나라 석만고石曼姑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곳을 포위하였다.
그러므로 공자의 뜻이 을 도우실 것인지 아닌지를 물은 것이다.
자공子貢이 말하였다.
“그렇소.
내 장차 여쭈어보겠소.”
〈자공이 공자께서 계시는 방으로〉 들어가서 여쭈었다.
백이伯夷숙제叔齊는 어떤 사람입니까?”
께서 대답하셨다.
“옛날의 현인賢人이다.”
자공子貢이 물었다.
원한怨恨하였습니까?”
께서 대답하셨다.
을 구하여 을 얻었으니, 또 무엇을 원한怨恨하였겠느냐?”
공왈孔曰:백이伯夷숙제叔齊는 나라를 사양하고 멀리 떠나 결국 굶어 죽었다.
그러므로 원한怨恨하였느냐고 물은 것이다.
사양함으로써 을 실현하였으니, 어찌 원한怨恨이 있었겠는가.
자공子貢이〉 나와서 말하였다.
부자夫子께서는 돕지 않으실 것이오.”
정왈鄭曰:부자간父子間에 나라를 다툰 것은 악행惡行이다.
공자孔子께서는 백이伯夷숙제叔齊하고 하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나라 임금을 돕지 않을 것이 분명함을 안 것이다.
의 [冉有]에서 [爲也]까지
○正義曰:이 공자孔子께서 겸양謙讓숭상崇尙하신 것을 기록한 것이다.
[冉有曰 夫子爲衛君乎] 와 같다.
위군衛君출공出公 을 이른다.
영공靈公태자太子 괴외蒯聵축출逐出하였는데, 영공靈公이 죽자 손자孫子을 세웠으니 은 바로 괴외蒯聵의 아들이다.
그 뒤에 나라 조앙趙鞅괴외蒯聵척성戚城으로 들여보내니 나라 석만고石曼姑가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곳을 포위하였다.
아들로서 아비를 막았으니 심한 악행惡行이다.
이때 공자孔子께서 나라에 계시면서 에게 빈례賓禮(상빈上賓의 예로 대우함)를 받으시니, 사람들은 공자孔子께서 을 도울 것으로 의심하였다.
그러므로 염유冉有가 그의 벗에게 부자夫子의 뜻이 을 도우실 것인지 아닌지를 물은 것이다.
[子貢曰 諾 吾將問之] 자공子貢염유冉有의 질문을 받고 자신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말에 수긍하고서, 내 들어가서 부자夫子께 여쭈어보면 도우실 것인지 아닌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入曰 伯夷叔齊何人也] 자공子貢공자孔子께 여쭌 말이다.
백이伯夷숙제叔齊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로 형제간에 나라를 사양하고 멀리 떠나 결국 굶어 죽었는데, 지금 나라는 도리어 부자간父子間에 나라를 다투었으니, 〈이들의〉 다툼과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사양은 정반대이다.
자공子貢백이伯夷숙제叔齊를 들어 물은 까닭은, 부자夫子께서 만약 나라 임금을 돕지 않으려 하신다면 당연히 백이伯夷숙제叔齊의 행위가 옳았다고 말씀하실 것이고, 부자夫子께서 만약 나라 임금을 도우려 하신다면 당연히 백이伯夷숙제叔齊의 행위가 옳지 않았다고 말씀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들어가서 “백이伯夷숙제叔齊는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여쭌 것이다.
[曰 古之賢人也] 공자께서 “이들은 옛날 나라를 사양한 현인賢人이다.”라고 대답하신 말씀이다.
[曰怨乎] 자공子貢이 다시 “백이伯夷숙제叔齊가 당초에는 비록 나라를 사양하는 어짊이 있었지만, 결국 굶어 죽었으니 어찌 원한怨恨이 없었겠습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자공이 다시 이렇게 물은 것은, 만약 부자夫子께서 나라 임금을 돕지 않으려 하신다면 당연히 원한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실 것이고, 만약 나라 임금을 도우려 하신다면 당연히 원한怨恨하였다고 말씀하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求仁而得仁 又何怨] 공자孔子께서 “원한하지 않았다.”고 대답하신 것이다.
처음에 나라를 사양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을 행하기를 구한 것이다.
군자君子는 자신을 희생하여 을 이룬다.
백이伯夷숙제叔齊가 비록 결국 굶어 죽었으나 을 이루었으니 어찌 원한怨恨이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또 어찌 원한하였겠느냐?”라고 대답하신 것이다.
[出曰 夫子不爲也] 자공子貢이 여쭌 뒤에 밖으로 나와서 염유冉有를 만나 “부자夫子께서 나라 임금을 돕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고하였으니, 부자간에 나라를 다투는 것이 악행惡行임을 안 것이다.
공자孔子께서 백이伯夷숙제叔齊하고 하다고 하셨기 때문에 나라 임금을 돕지 않을 것이 분명함을 안 것이다.
의 [鄭曰]에서 [不乎]까지
○正義曰:[衛靈公逐太子蒯聵]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정공定公 14년조를 고찰하건대 “괴외蒯聵영공靈公의 부인 남자南子를 죽이려고 계획하였다가 죽이지 못하고 나라로 망명하였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公薨而立孫輒] 애공哀公 2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여름에 영공靈公이 죽자, 부인夫人이 말하기를 ‘공자公子 태자太子로 삼으라.
선군先君이시다.’라고 하니, 이 대답하기를 ‘저는 다른 아들들과 신분身分이 다르고, 또 선군先君이 돌아가실 때 제가 곁에 있었으니, 만약 그런 이 있었다면 제가 반드시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망명한 사람의 아들 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을 임금으로 세웠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後晉趙鞅納蒯聵於戚城] 역시 《춘추春秋애공哀公 2년의 글이다.
[衛石曼姑帥師圍之] 《춘추春秋애공哀公 3년 봄에 “나라 국하國夏나라 석만고石曼姑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척성戚城을 포위하였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논어주소(1) 책은 2021.08.02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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