疏
○正義曰:云 ‘牲生曰餼’者, 僖三十三年左傳曰 “餼牽竭矣.” 餼與牽相對.
此及聘禮注, 皆云 “牲生曰餼.” 由不與牽相對,
案周禮, “大史頒告朔于邦國.” 鄭玄云 “天子頒朔于諸侯, 諸侯藏之祖廟, 至朔, 朝于廟, 告而受行之.”
此云 ‘子貢欲去告朔之餼羊’ 是用生羊告於廟, 謂之告朔. 人君卽以此日聽視此朔之政, 謂之視朔.
文十六年 “公四不視朔.” 僖五年傳曰 “公旣視朔.” 是也.
視朔者, 聽治此月之政, 亦謂之
, 玉藻云 “天子聽朔于南門之外.” 是也.
其歲首爲之, 則謂之
, “襄二十九年正月, 公在楚.” 傳曰 “釋不朝正於廟.” 是也.
告朔‧視朔‧聽朔‧朝廟‧
享‧朝正, 二禮各有三名, 同日而爲之也.
杜預春秋釋例曰 “人君者, 設官分職以爲民極, 遠細事以全委任之責, 縱諸下以盡知力之用,
故受位居職者, 思效忠善, 日夜自進, 而無所顧忌也.
天下之細事無數, 一日二日萬端, 人君之明有所不照, 人君之力有所不堪,
如此, 則
, 雖躬履此事, 躬造此官, 當皆移聽於內官, 回心於左右, 政之
, 常必由此.
聖人知其不可, 故簡其節, 敬其事, 因月朔朝廟, 遷坐
, 會群吏而聽大政, 考其所行而決其煩疑, 非徒議將然也, 乃所以考已然.
是以上下交泰, 官人以理, 萬民以察, 天下以治也.
然則朝廟‧朝正‧告朔‧視朔, 皆同日之事, 所從言異耳.” 是言聽朔‧朝廟之義也.
玉藻說天子朝廟之禮云 “聽朔於南門之外, 諸侯
, 聽朔於太廟.” 鄭玄以爲 “
在國之陽, 南門之外, 謂明堂也.”
天子用特牛告
, 配以文王‧武王, 諸侯用特羊告太祖而已.
祭法云 “王立七廟
, 曰考廟‧王考廟‧皇考廟‧顯考廟,
皆月祭之,
, 享嘗乃止.
諸侯立五廟, 曰考廟‧王考廟‧皇考廟, 皆月祭之, 顯考廟‧祖考廟, 享嘗乃止.”
然則天子告朔於明堂, 朝享於五廟, 諸侯告朔於大廟, 朝享自皇考以下三廟耳.
故春秋文公六年經云 “閏月不告朔, 猶朝于廟.” 公羊傳曰 “猶者, 可止之辭也.”
天子
以視朔, 皮弁以日
, 諸侯皮弁以聽朔, 朝服以日視朝.
其閏月, 則聽朔於明堂, 闔門左扉, 立於其中, 聽政於路寢門, 終月,
云 ‘魯自文公 始不視朔’者, 卽文六年 “閏月不告朔.” 是也.
疏
○正義曰:이 장은 공자孔子께서 예禮를 폐기하고자 하지 않은 것을 말한 것이다.
[子貢欲去告朔之餼羊] 살아있는 희생을 희餼라 한다.
예에 임금은 달마다 종묘에 곡삭告朔하고서 이어 제사를 지내니, 이를 조향朝享이라 한다.
노魯나라는 문공文公 때부터 정사政事와 예禮에 태만하여 비로소 시삭視朔하지 않고 조향朝享의 제사를 폐지하였으나, 유사有司(그 일을 담당한 관리)가 여전히 그 양羊을 준비해 바쳤다.
자공子貢은 그 예가 폐기된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 양까지 아울러 없애고자 한 것이다.
[子曰 賜也 爾愛其羊 我愛其禮] 이것은 공자께서 양을 없애고자 한 자공의 말에 동의하지 않으셨으므로 그의 이름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너는 그 예가 이미 폐지되었는데도 그 양을 바치는 것을 헛되이 낭비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 양을 없애고자 하는 것이니, 이는 그 양을 아까워함이다.
그러나 나는 양이 남아있으면 그래도 그 예를 기억할 수 있지만, 양마저 없애면 예가 마침내 없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 양을 없애지 않음으로써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이 곡삭告朔의 양을 보고서 곡삭의 예가 있었음을 알게 하여 혹 다시 거행되기를 바란 것이니, 이는 그 예를 아낀 것이다.”
疏
○正義曰:[牲生曰餼] 희공僖公 33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날고기와 소‧양‧돼지가 고갈되었다.[餼牽竭矣]”라고 하여, 희餼와 견牽을 서로 짝지어 말하였다.
견牽은 바로 끌고 갈 수 있는 살아있는 희생이니, 그렇다면 희餼는 이미 죽인 것이고, 죽이고서 또 익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해석하는 자가 “날고기[腥]를 희餼라 한다.”고 하였으니, 아직 익히지 않은 날고기를 이른다.
그러나 사실은 희餼 또한 생生(살아있는 희생)이다.
애공哀公 24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진군晉軍이 돌아가면서 장석臧石에게 소 한 마리를 보냈다.
[晉師乃還 餼臧石牛]”고 하였으니, 이는 살아있는 소를 보낸 것이다.
이곳(《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의례儀禮》 〈빙례聘禮〉 주注에 모두 “살아있는 희생을 희餼라 한다.”고 하고, 견牽과 짝지어 말하지 않았다.
상고하건대 《주례周禮》에 “대사大史가 곡삭告朔(曆)을 방국邦國에 반포한다.”고 한 주注에서 정현鄭玄은 “천자가 삭朔(曆)을 제후에게 반포하면 제후는 그것을 조묘祖廟에 간직하였다가 삭일朔日이 되면 종묘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서 〈조상에게 그 역曆을〉 받아서 시행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곳에 말한 “자공욕거고삭지희양子貢欲去告朔之餼羊”은 살아있는 양을 종묘에 바치고서 고하는 것을 곡삭告朔이라 하고, 임금이 이날에 그달의 정사政事를 듣고서 살피는 것을 시삭視朔이라 하니,
《춘추春秋》 문공文公 16년에 “공이 넉 달 동안 시삭視朔하지 않았다.”고 한 것과, 희공僖公 5년 《좌씨전左氏傳》에 “공이 시삭視朔을 마쳤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시삭視朔은 그달의 정사를 〈신하들에게〉 듣고서 처리하는 것인데, 이를 청삭聽朔이라고도 하니, 《예기禮記》 〈옥조玉藻〉에 “천자天子는 남문南門 밖에서 청삭聽朔한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이날에 또 예로써 종묘에 제사 지내는 것을 조묘朝廟라 한다.
《주례周禮》에는 이를 조향朝享이라 하였으니, 《주례周禮》 〈사준이司尊彝〉에 “추향追享(네 철의 중간에 천묘주遷廟主에 올리는 제사)하고 조향朝享(月祭)한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세수歲首에 거행하면 이를 조정朝正이라 하니, 《춘추春秋》 경經의 “양공襄公 29년 정월에 공公이 초楚나라에 있었다.”고 한 것을, 《좌씨전左氏傳》에 “조묘祖廟에 조정朝正하지 않은 이유를 해석한 것이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곡삭告朔‧시삭視朔‧청삭聽朔‧조묘朝廟‧조향朝享‧조정朝正은 두 예禮에 각각 세 가지 명칭이 있는 것이니, 동일同日에 거행한다.
반드시 월삭月朔에 이 곡삭‧청삭의 예를 거행하는 것은
두예杜預의 《춘추석례春秋釋例》 〈곡삭례告朔例〉에 “임금은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직무를 분담시켜 백성의 준칙準則이 되게 하고, 세세한 일들을 멀리하여 그 책임을 맡은 자에게 모두 위임하고, 모든 신하에게 위임[縱]하여 지혜와 힘을 다 쓰게 하고,
성패를 상고[摠]하여 능력能力을 바치게 하고, 팔병八柄을 가지고서 상벌賞罰을 밝힌다.
그러므로 국가의 중대한 일[機事]이 아닌 것은 모두 위임한다.
〈이렇게 하면〉 진실한 믿음이 〈신하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여 일이 다 거행되어 막힘이 없다.
그러므로 작위爵位를 받아 관직官職이 있는 자들은 충성과 선책善策을 바치기를 생각하여 밤낮으로 자진해서 〈재능을 바치고〉 망설이거나 꺼리는 바가 없다.
천하에는 세세한 일들이 수없이 많아 하루 이틀 사이에 만 가지 일이 발생하니, 임금의 총명이 비추지 못하는 바가 있고, 임금의 힘이 감당할 수 없는 바가 있다.
그렇다면 근신近臣에게 물어 때때로 그들의 말을 채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하면 육향六鄕과 육수六遂의 장관이 비록 몸소 이 일을 행하고 몸소 이 관직을 맡았다 하더라도 모두 내관內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좌우의 말에 마음이 바뀌게 될 것이니, 정치가 잘못되고 어지러워지는 것이 항상 여기에서 연유한다.
성인께서 그래서는 안 됨을 아셨기 때문에 그 절차를 간소화하고 그 일을 신중히 규정規定하여, 월삭月朔으로 인해 조묘朝廟하고서 정위正位(正寢)로 옮겨가 앉아 군리群吏들을 모아놓고 대정大政을 듣고서 그들이 행한 일을 상고하여 번잡하고 의심스러운 일을 처결하였으니, 이는 단지 앞으로 발생할 일만을 의논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난 일도 상고한 것이다.
또 〈신하들의 죄과罪過를〉 심리할 때 당사자의 진술만을 듣고 판결하면 공정성을 잃을 우려가 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중신衆臣에게 물어 판결한다.
그러므로 상하가 서로 소통하여 관인官人은 직무를 잘 처리하고, 만민은 〈선악을 밝게〉 살펴 천하가 태평해진다.
매달 삭일朔日에 반드시 조묘朝廟하고서 이어 정사를 듣는다면 일이 신중히 처리되고 예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한 마리의 양을 바쳐 종묘에 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묘朝廟‧조정朝正‧곡삭告朔‧시삭視朔은 모두 동일同日에 거행하는 일인데, 상황에 따라 말을 달리한 것뿐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청삭聽朔과 조묘朝廟의 뜻을 말한 것이다.
《예기禮記》 〈옥조玉藻〉에 천자가 조묘朝廟하는 예를 설명하기를 “천자는 남문 밖에서 청삭聽朔하고, 제후는 피변皮弁을 쓰고서 태묘太廟에서 청삭한다.”고 하였는데, 그 주注에 정현은 “명당明堂은 국도國都의 남쪽에 있으니, 남문 밖은 명당을 이른다.”고 하였다.
제후가 한 마리의 양으로 곡삭하였으니, 천자는 한 마리의 소로 곡삭하였을 것이다.
천자는 한 마리의 소로 그 제帝(五方帝)와 그 신神(五方神)에게 고하고서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배향하고, 제후는 한 마리의 양으로 태조太祖에게 고할 뿐이다.
두예杜預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4년 주注에서 “명당明堂과 조묘祖廟는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명당은 천제天祭를 지내는 곳이니, 천자가 곡삭을 비록 두예杜預의 말처럼 〈명당에서 거행하지만 천제天帝에게만 고하는 것이 아니라〉 응당 인제人帝에게도 고하였을 것이다.
《예기禮記》 〈제법祭法〉에 “천자는 7묘廟를 세우고서 고묘考廟(父)‧왕고묘王考廟(祖)‧황고묘皇考廟(曾祖)‧현고묘顯考廟(高祖)‧조고묘祖考廟(始祖)에는 모두 다달이 제사를 지내고, 두 조묘祧廟에는 단지 한 철에 한 차례씩 제사 지낼 뿐이며,
제후는 5묘廟를 세우고서 고묘考廟‧왕고묘王考廟‧황고묘皇考廟에는 모두 다달이 제사를 지내고, 현고묘顯考廟‧조고묘祖考廟에는 한 철에 한 차례씩 제사 지낼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천자는 명당에 곡삭하고서 오묘五廟에 조향朝享하며, 제후는 태묘太廟에 곡삭하고서 황고皇考 이하 3묘廟에만 조향朝享할 뿐이다.
모두 곡삭告朔을 먼저 거행하고 조묘祖廟를 뒤에 거행하는 것은 조묘朝廟의 예禮가 곡삭告朔의 예보다 작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공文公은 그 큰 것은 폐지하고 그 작은 것은 거행하였다.
그러므로 《춘추春秋》 문공文公 6년 경經에 “윤월閏月에 곡삭告朔은 하지 않고 오히려 조묘朝廟하였다.[閏月不告朔 猶朝于廟]”고 하였는데,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유猶(오히려)는 그만두어도 될 일을 표현하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천자는 현면玄冕 차림으로 시삭視朔하고 피변皮弁 차림으로 날마다 시조視朝하며, 제후는 피변皮弁 차림으로 청삭聽朔하고 조복朝服 차림으로 날마다 시조視朝한다.
윤월閏月을 만나면 명당에서 청삭聽朔하고, 문의 왼쪽 문짝을 닫고 그 중앙에 서서 노침문路寢門에서 청정聽政하는데, 그달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한다.
그러므로 글자에 왕王자가 문門자 안에 있는 것이 윤閏자이다.
[魯自文公 始不視朔] 곧 《춘추春秋》 문공文公 6년에 “윤월불고삭閏月不告朔”이라 한 것이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