疏
‘舜有臣五人而天下治’者, 言帝舜時, 有大才之臣五人, 而天下大治.
五人者, 禹也, 稷也, 契也, 皐陶也, 伯益也.
謂周公旦也, 召公奭也, 太公望也, 畢公也, 榮公也, 太顚也, 閎夭也, 散宜生也, 南宮适也,
‘孔子曰 才難 不其然乎 唐虞之際 於斯爲盛 有婦人焉 九人而已’者, 記者擧舜及武王之時大才之人於上, 遂載孔子之言於下.
言堯舜交會之間, 比於此周, 周最爲盛, 多賢才也, 然尙有一婦人, 其餘九人而已, 大才難得, 豈不然乎.
‘三分天下有其二 以服事殷 周之德 其可謂至德也已矣’者, 此孔子因美周文王有至聖之德也.
言殷紂淫亂, 文王爲西伯而有聖德, 天下歸周者三分有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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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先祖嘗爲
, 佐禹平水土, 甚有功, 虞‧夏之際, 封於呂.
西伯將獵, 卜之, 曰‘所獲, 非龍非彲, 非虎非熊, 所獲, 霸王之輔.’
於是周西伯獵, 果遇太公於渭之陽, 與語大說, 曰 ‘自吾
曰 「當有聖人適周, 周以興.」 子眞是邪.
孫子兵法曰 “周之興也, 呂牙在殷.” 則牙又是其名字.
太‧閎‧散‧南宮, 皆氏. 顚‧夭‧宜生‧适, 皆名也.
文母, 文王之后大姒也. 從夫之諡, 武王之母, 謂之文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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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義曰 : 云 ‘唐者 堯號 虞者 舜號’者, 史記諸書, 皆言“堯帝嚳之子, 帝摰之弟.
書曰 “惟彼陶唐.” 世本云 “帝堯爲陶唐氏”. 韋昭云 “陶唐皆國名, 猶湯稱殷商也.”
案經傳, 契居商, 故湯以商爲國號. 後盤庚遷殷, 故殷‧商雙擧.
歷檢書傳, 未聞帝堯居陶, 而以陶冠唐, 蓋以二字爲名, 所稱或單或複也.
已來, 地爲國號, 而舜有天下, 號曰有虞氏, 是地名也.
皇甫謐云 “堯以二女妻舜, 封之於虞, 今河東太陽山西虞地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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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義曰 : 云‘殷紂淫亂’者, 紂爲淫亂, 書傳備言, 若泰誓云“沈湎冒色, 敢行暴虐”之類是也.
云‘文王爲西伯而有聖德’者, 鄭玄詩譜云 “周之先公曰太王者, 避狄難, 自豳始遷焉, 而脩德建王業.
商王帝乙之初, 命其子王季爲西伯. 至紂, 又命文王典治南國
之諸侯.” 是謂文王繼父之業爲西伯也.
孔叢云 “羊容問於子思曰 ‘古之帝王中分天下,
二公治之, 謂之二伯.
周自后稷封爲王者之後, 大王‧王季皆爲諸侯, 奚得爲西伯乎.’
子思曰 ‘吾聞諸子夏云 「殷王帝乙之時, 王季以九命作伯於西, 受圭瓚秬鬯之錫,
皇甫謐亦云 “王季於帝乙殷王之時, 賜九命爲西長, 始受圭瓚秬鬯.” 皆以爲王季受九命作東西大伯.
鄭不見孔叢之書, 旱麓之箋不言九命, 則以王季爲州伯也.
文王亦爲州伯, 故西伯戡黎注云 “文王爲雍州之伯, 南兼梁‧荊, 在西,
文王之德, 優於王季, 文王尙爲州伯, 明王季亦爲州伯也.
楚辭天問曰 “伯昌號衰, 秉鞭作牧.” 王逸注云 “伯, 謂文王也.
鞭以喩政, 言紂號令旣衰, 文王執鞭持政, 爲雍州牧.”
天問, 屈原所作, 去聖未遠, 謂文王爲牧, 明非大伯也.
言‘至紂 又命文王’者, 旣以繼父爲伯, 又命之使兼治南國江漢汝墳之諸侯.
古公曰 ‘我世當有興者, 其在昌乎.’” 後果受命爲文王也.
云‘天下歸周者三分有二 而猶服事殷’者, 鄭玄又云 “於時三分天下有其二, 以服事殷,
故雍‧梁‧荊‧豫‧徐‧楊之人, 咸被其德而從之.”
鄭旣引論語三分有二, 故據禹貢州名, 指而言之, 雍‧梁‧荊‧豫‧徐‧楊歸文王, 其餘冀‧靑‧兗屬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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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왈正義曰 : 이 장章은 큰 인재人才를 얻기 어려움을 논論한 것이다.
[舜有臣五人而天下治] 제순帝舜 때에 대재大才를 지닌 신하 다섯 사람을 두니, 천하天下가 크게 다스려졌다는 말이다.
다섯 사람은 우禹‧직稷‧설契‧고요皐陶‧백익伯益이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나는 직분을 다하는 신하 열 사람을 두었다.’고 하였으니,
주공周公 단旦‧소공召公 석奭‧태공太公 망望‧필공畢公‧영공榮公‧태전太顚‧굉요閎夭‧산의생散宜生‧남궁괄南宮适을 이르고,
[孔子曰 才難 不其然乎 唐虞之際 於斯爲盛 有婦人焉 九人而已] 이 장을 기록한 자가 순舜과 무왕武王 때의 큰 인재人才들을 위에 거론하고서, 마침내 그 아래에 공자孔子의 말씀을 기재記載한 것이다.
당唐은 요堯의 국호國號이고, 우虞는 순舜의 국호國號이다.
요堯와 순舜이 교체交替하던 사이로부터 이 주周나라에 이르기까지 주周나라가 가장 융성하여 현재賢才가 많았으나 오히려 부인婦人 한 사람이 끼어 있어 그 나머지는 아홉 사람일 뿐이니, 큰 인재人才를 얻기 어렵다는 말이 어찌 옳은 말이 아니냐는 말이다.
[三分天下有其二 以服事殷 周之德 其可謂至德也已矣] 이것은 공자孔子께서 이어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지닌 지성至聖의 덕德을 찬미하신 것이다.
은殷나라 주왕紂王은 음란淫亂하고 문왕文王은 서백西伯이 되어 성덕聖德이 있으니, 천하天下의 3분의 2가 주周나라에 귀의歸依하였다.
그런데도 〈문왕은〉 오히려 은殷나라를 복종服從해 섬겼으므로 ‘지극한 덕德’이라고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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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왈正義曰 : 《사기史記》와 《서경書經》 〈순전舜典〉을 고찰하건대, 우禹의 이름은 문명文命이니 곤鯀(舜이 추방追放한 사흉四凶 중의 하나)의 아들이다.
순舜이 그를 임명해 사공司空으로 삼았으니 수토水土를 다스리는 관직이다.
직稷의 이름은 기棄이니, 제곡帝嚳의 아들이다.
순舜이 그를 임명해 후직后稷으로 삼았으니, 백곡百穀의 파종播種을 맡는 관직이다.
설契도 제곡帝嚳의 아들인데, 우禹를 도와 치수治水에 공功을 세웠다.
순舜이 그를 임명해 사도司徒로 삼았으니 오교五敎를 펴는 관직이다.
고요皐陶는 자字가 정견庭堅이니 전욱顓頊의 후손이다.
순舜이 그를 임명해 사士(刑獄을 담당하는 관원官員)로 삼았으니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관직이다.
순舜이 그를 임명해 우관虞官으로 삼았으니 산택山澤을 맡은 관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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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왈正義曰 : [亂 治也] 《이아爾雅》 〈석고釋詁〉의 글이다.
[十人 謂周公旦以下] 선유先儒들이 서로 전해온 설이다.
고찰하건대 《사기史記》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에 “주공周公은 이름이 단旦이니 무왕武王의 아우이다.
노魯나라에 봉封해졌고, 주읍周邑을 채지采地로 받았다.
그러므로 주공周公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기史記》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에 “소공召公은 이름이 석奭이고 주周나라와 동성同姓이며, 연燕나라에 봉封해졌고 소읍召邑을 채지采地로 받았다.
그러므로 소공召公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기史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 “태공太公 망望은 여상呂尙이니 동해東海 사람이다.
그의 선조先祖가 일찍이 사악四岳이 되어 우禹를 도와 수토水土를 다스리는 일에 매우 공功이 있었으므로 우虞나라와 하夏나라의 교체기에 여읍呂邑에 봉封해졌다.
본래의 성姓은 강씨姜氏였으나 봉읍封邑의 이름을 따라 여呂를 성姓으로 삼았다.
여상呂尙은 일찍이 곤궁困窮하였고 나이도 늙었는데, 낚시질을 하다가 주周나라 서백西伯(文王)을 만났다.
서백西伯이 사냥을 나가려 할 때 점占을 치니 그 점괘에 ‘잡는 것은 용龍도 아니고 이彲(이무기)도 아니며, 호랑이도 아니고 곰도 아니니, 얻는 것은 패왕霸王의 보좌輔佐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주周나라 서백西伯은 사냥을 나갔다가 과연 위수渭水 북쪽에서 태공太公을 만나 그와 이야기를 해보고는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의 선군先君 태공太公께서 ‘성인聖人이 나타나 주周나라로 올 것인데, 주周나라는 그로 인해 흥성興盛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그대가 참으로 그 사람인가?
우리 태공太公께서 그대를 기다린 지 오래이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를 ‘태공太公 망望’이라 호칭號稱하고서, 그를 수레에 태워 함께 돌아와 태사太師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유향劉向의 《별록別錄》에 “그를 스승으로 삼고서 존숭尊崇[尙]하여 아버지처럼 여겼다.
그러므로 그를 ‘사상보師尙父’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부父 또한 남자男子의 미칭美稱이다.
《손자병법孫子兵法》에 “주周나라가 일어날 때 여아呂牙가 은殷나라에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아牙 또한 그의 이름이다.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평정平定하고 천하天下의 왕王이 된 뒤에 사상보師尙父를 제齊나라에 봉封하였다.
필畢과 영榮은 모두 국명國名인데, 주周나라 조정에 들어와 천자天子의 공경公卿이 되었다.
태太‧굉閎‧산散‧남궁南宮은 모두 씨氏이고, 전顚‧요夭‧의생宜生‧괄适은 모두 이름이다.
문모文母는 문왕文王의 후后인 태사太姒이니, 남편의 시호諡號인 문文을 따르고 무왕武王의 모후母后였으므로 문모文母라 한 것이다.
《시경詩經》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에 말한 후비后妃와 부인夫人은 모두 이 사람(太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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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왈正義曰 : [唐者 堯號 虞者 舜號] 《사기史記》 등 여러 서적書籍에 모두 “요堯는 제곡帝嚳의 아들이고, 제지帝摰의 아우이다.
곡嚳이 죽자 지摯가 즉위하였고, 지摯가 죽자 마침내 요堯에게 제위帝位를 전하였다.”라고 하였다.
《서전書傳》에 “요堯가 16세歲에 당후唐侯로서 천자天子의 자리에 올랐다.”라고 하였으니, 〈요堯가 천자天子가 된 뒤에〉 드디어 당唐을 국호國號로 삼은 것이다.
《서경書經》에 “저 도당陶唐으로부터[惟彼陶唐]”라고 하였고, 《세본世本》에 “제요帝堯가 도당씨陶唐氏이다.”라고 하였으며, 위소韋昭는 “도陶와 당唐은 모두 국명國名이니, 탕湯을 은상殷商으로 칭稱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경전經傳을 고찰하건대, 설契(殷나라의 시조始祖)이 상商에 살았기 때문에 탕湯이 상商을 국호國號로 삼았고, 뒤에 반경盤庚이 은殷으로 천도遷都하였기 때문에 은殷과 상商을 함께 들어 국호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서전書傳》을 두루 고검考檢해보아도 제요帝堯가 도陶에 살았다는 기록을 보지 못하였는데, ‘도陶’字를 ‘당唐’字 위에 씌웠으니, 아마도 이는 두 글자를 국명國名으로 삼고서 국명國名을 칭稱할 때 혹 한 자로 칭稱하기도 하고 혹 두 자로 칭稱하기도 한 것인 듯하다.
순舜을 우虞라 한 것은 우禹를 하夏라 한 것과 같다.
《외전外傳》에 우씨禹氏를 ‘유하有夏’로 칭稱하였으니, 그렇다면 순씨舜氏가 ‘유우有虞’였음을 알 수 있다.
전욱顓頊 이래로 지명地名을 국호國號로 삼았는데, 순舜이 천하天下를 소유하고서 국호國號를 ‘유우씨有虞氏’라고 하였으니, 이 또한 지명을 국호로 삼은 것이다.
황보밀皇甫謐은 “요堯가 두 딸을 순舜의 아내로 주고서 순舜을 우虞에 봉封하였으니, 지금의 하동河東 태양산太陽山 서쪽의 우지虞地가 바로 그곳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순舜이 우虞 땅에 살면서 우虞를 씨氏로 삼은 것이다.
요堯가 순舜을 우虞에 봉封하여 제후諸侯로 삼았는데, 순舜이 천자天子가 되자 마침내 〈우虞를〉 천자국天子國의 국호國號로 삼은 것이다.
그러므로 미천微賤했을 때부터 천자天子가 된 뒤에까지 항상 우씨虞氏로 칭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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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왈正義曰 : [殷紂淫亂] 주왕紂王이 음란淫亂했던 것은 《서전書傳》에 자세히 말하였으니, 이를테면 《서경書經》 〈주서周書 태서泰誓〉에 “술에 빠지고 여색女色을 탐하여 포학暴虐을 자행恣行하였다.[沈湎冒色 敢行暴虐]”고 한 유類가 그것이다.
[文王爲西伯而有聖德] 정현鄭玄의 《모시보毛詩譜》에 “주周나라의 선공先公 태왕太王이 적인狄人의 난亂을 피해 빈豳에서 비로소 〈기산岐山 밑으로〉 옮겨와서 덕德을 닦아 왕업王業을 세웠다.
상왕商王 제을帝乙이 초기初期에 태왕太王의 아들 왕계王季를 임명하여 서백西伯으로 삼았고, 주왕紂王에 이르러 또 문왕文王을 임명하여 남방南方의 강한江漢과 여분汝墳 일대의 제후국諸侯國을 맡아 다스리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문왕文王이 아버지의 사업事業을 계승하여 서백西伯이 된 것을 말한 것이다.
은殷나라 때에 주州의 장관長官을 백伯이라 하였으니, 옹주雍州의 백伯이 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주례周禮》 〈춘관春官 대종백大宗伯〉에 “팔명八命이 목牧이 된다.”라고 하였으니, 은殷나라의 주목州牧도 팔명八命이었을 것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한록旱麓〉의 모전毛傳에 “구명九命이 된 뒤에 거창秬鬯과 규찬圭瓚을 하사받았다.”라고 한 것과 같다.
《공총자孔叢子》에 “양용羊容이 자사子思에게 ‘옛날 제왕帝王이 천하天下를 반분半分하여 이공二公에게 다스리게 하고서 그들을 이백二伯이라 하였습니다.
주周는 후직后稷을 봉封하여 왕王이 되게 한 뒤로 태왕太王과 왕계王季가 모두 제후諸侯가 되었으니, 어찌 서백西伯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묻자,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내가 자하子夏에게 들으니, 은왕殷王 제을帝乙 때에 왕계王季가 구명九命으로 서방西方의 백伯이 되어 규찬圭瓚과 거창秬鬯을 하사下賜받았다.
그러므로 문왕文王이 이어받아 마음대로 정벌征伐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하였다.
이는 제후諸侯로서 백伯이 되었음을 말한 것이니,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섬서陝西 지역을 나누어 다스렸던 것과 같다.
황보밀皇甫謐은 또 “왕계王季가 은왕殷王 제을帝乙 때에 구명九命을 받아 서장西長(西伯)이 되어 비로소 규찬圭瓚과 거창秬鬯을 받았다.”라고 하였으니, 모두 왕계王季가 구명九命을 받아 동서東西의 대백大伯이 된 것으로 여긴 것이다.
정현鄭玄은 《공총자孔叢子》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한록旱麓〉의 전箋에 구명九命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니, 이는 왕계王季를 주백州伯으로 여긴 것이다.
문왕文王 역시 주백州伯이 되었기 때문에 《서경書經》 〈상서尙書 서백감려西伯戡黎〉의 주注에 “문왕文王이 옹주雍州의 백伯이 되어 남쪽으로 양주梁州와 형주荊州를 아울러 다스리며 서쪽에 있었다.
그러므로 서백西伯이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왕文王의 덕德이 왕계王季보다 우수했는데도 문왕文王이 오히려 주백州伯이 되었으니, 왕계王季 역시 주백州伯이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초사楚辭》 〈천문天問〉에 “백창伯昌은 호령號令이 쇠衰하자 채찍을 잡고 목牧이 되었다.”라고 하였는데, 왕일王逸의 주注에 “백伯은 문왕文王을 이른다.
채찍은 정치政治를 비유한 것이니, 주왕紂王의 호령號令이 쇠衰해진 뒤에 문왕文王이 채찍을 잡고 정치政治를 맡아 옹주목雍州牧이 되었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천문天問〉은 굴원屈原이 지은 것이다 〈굴원屈原의 시대가〉 성인聖人의 시대와 멀지 않았는데 ‘문왕文王이 목牧이 되었다.’고 말하였으니, 대백大伯이 아님이 분명하다.
[至紂 又命文王] 이미 부친의 뒤를 이어 백伯이 되었는데, 또 문왕에게 명하여 남국南國의 강한江漢과 여분汝墳 일대一帶의 제후諸侯들을 아울러 다스리게 한 것이다.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에 “계력季歷이 태임太任을 아내로 맞아 창昌을 낳았는데, 성왕聖王이 될 상서祥瑞가 있었다.
고공古公이 말하기를 ‘내 대代에 응당 나라를 흥성시킬 자가 나올 것이니, 아마 창昌일 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뒤에 과연 천명天命을 받아 문왕文王이 되었다.
[天下歸周者三分有二 而猶服事殷] 정현鄭玄이 또 말하기를 “당시當時에 천하天下의 3분의 2를 소유所有하고서도 은殷나라를 복종服從하여 섬겼다.
그러므로 옹주雍州‧양주梁州‧형주荊州‧예주豫州‧서주徐州‧양주楊州 사람들이 모두 그 덕화德化를 입어 문왕文王을 따랐다.”라고 하였다.
정현鄭玄은 이미 《논어論語》의 ‘삼분유이三分有二’를 인용引用하였기 때문에, 《서경書經》 〈하서夏書 우공禹貢〉의 주명州名에 의거해 〈주명州名을〉 지적해 말하여, 옹주雍州‧양주梁州‧형주荊州‧예주豫州‧서주徐州‧양주楊州는 문왕文王에게 귀의歸依하였고, 그 나머지 기주冀州‧청주靑州‧연주兗州는 주왕紂王에게 속屬하였다고 한 것이다.
9주州 가운데 6주州를 소유했으니, 이것이 천하天下의 3분의 2를 소유한 것이다.
《서전書傳》에 “문왕文王이 제후諸侯들을 거느리고 주왕紂王을 섬겼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오히려 은殷나라에 복종하여 섬긴 것이다.
주왕紂王의 죄악罪惡이 극한極限에 도달하였으되 문왕文王은 차마 정벌하지 못하고 오히려 복종하여 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