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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注疏(2)

논어주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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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子曰
臧武仲以防求爲後於魯하니
雖曰不要君이나 吾不信也하노라
[注]孔曰 防 武仲故邑이라
爲後 立後也
魯襄公二十三年 武仲爲孟氏所譖하야 出奔邾하다
自邾如防하야 使爲以大蔡納請曰 紇非能害也 知不足也이니이다
非敢私請이니 苟守先祀하야 無廢二勳이면 敢不辟邑이리잇가
乃立臧爲하다 紇致防而奔齊하니
此所謂要君이라
[疏]‘子曰 臧武仲以防求爲後於魯 雖曰不要君 吾不信也’
○正義曰 : 此章論臧孫紇要君之事.
防, 武仲故邑.
爲後, 猶立後也.
武仲據防邑求立後於魯, 他人雖曰武仲不是要君, 吾不信也. 言實是要君.
[疏]○注‘孔曰’至‘要君’
○正義曰 : 云‘魯襄公二十三年 武仲爲孟氏所譖 出奔邾’者, 此及下至‘致防而奔齊’ 皆左氏傳文也.
案彼傳云 “季武子無適彌長, 而愛悼子, 欲立之, 訪於臧紇, 紇爲立之”.
公彌卽公鉏也.
“孟孫惡臧孫, 季孫愛之,
孟氏之御騶豐點, 好羯也.
孟莊子疾, 豐點謂公鉏 ‘苟立羯, 請讎臧氏’
孟孫卒, 遂立羯.
孟氏閉門, 告於季孫曰 ‘臧氏將爲亂, 不使我葬’ 季孫不信. 臧孫聞之, 戒.
冬十月, 孟氏將辟, 除於臧氏, 臧孫使正夫助之, 除於東門, 甲從己而視之.
孟氏又告季孫. 季孫怒, 命攻臧氏.
乙亥, 臧紇斬鹿門之關以出奔邾” 是也.
云‘自邾如防 使爲以大蔡納請’者, 傳又曰 “初, 臧宣叔娶于鑄, 生賈及爲而死. 繼室以其姪, 穆姜之姨子也.
生紇, 長於公宮. 姜氏愛之,
故立之.
臧賈‧臧爲出在鑄.
臧武仲自邾使告臧賈, 且致大蔡焉曰 ‘紇不佞, 失守宗祧, 敢告不弔.
紇之罪不及不祀, 子以大蔡納請, 其可’
賈曰 ‘是家之禍也, 非子之過也. 賈聞命矣.’ 再拜受龜,
使爲以納請, 遂立爲也.
臧孫如防, 使來告” 是也.
杜預曰 “大蔡, 大龜”
云‘紇非害也 知不足也’者, 此下皆彼傳文, 言使甲己, 但慮事淺耳.
云‘非敢私請’者, 言爲其先人請也.
云‘苟守先祀 無廢二勳’者, 二勳, 文仲‧宣叔.
云‘敢不辟邑 乃立臧爲 紇致防而奔齊 此所謂要君’者, 據邑請後, 故孔子以爲要君.


께서 말씀하셨다.
장무중臧武仲방읍防邑점거占據하고서 나라에 후계자後繼者를 세워주기를 요구하였다.
〈사람들은〉 비록 요군要君(형세를 믿고서 임금에게 강요强要함)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공왈孔曰 : 무중武仲고읍故邑(代代로 지켜온 봉읍封邑)이다.
위후爲後후계자後繼者를 세움이다.
나라 양공襄公 23년에 무중武仲맹씨孟氏참소讒訴를 입고 나라로 출분出奔하였다.
나라에서 방읍防邑으로 가서 〈나라에〉 장위臧爲를 보내어 대채大蔡(龜甲)를 바치고서 〈후계자後繼者를 세워주기를〉 하기를 “제가 남을 해치려 한 것이 아니었으나, 지혜智慧부족不足하였습니다.
종족宗族을 위해 하는 것이지〉 감히 저 개인個人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니, 진실로 선대先代제사祭祀를 지켜 조부祖父 문중文仲부친父親 선숙宣叔공훈功勳폐기廢棄되지 않게 하신다면 어찌 감히 방읍防邑을 떠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나라가 장위臧爲를 후계자로 세우니, 장흘臧紇(臧武仲)은 방읍防邑을 〈국가國家에〉 바치고서 나라로 출분出奔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요군要君’이다.
의 [子曰 臧武仲以防求爲後於魯 雖曰不要君 吾不信也]
정의왈正義曰 : 이 장손흘臧孫紇요군要君한 일을 논한 것이다.
무중武仲고읍故邑이다.
위후爲後입후立後와 같다.
장무중臧武仲방읍防邑을 점거하고서 나라에 후계자後繼者를 세워주기를 요구한 행위를 다른 사람들은 비록 장무중臧武仲요군要君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진실로 이것이 요군要君이라는 말이다.
의 [孔曰]에서 [要君]까지
정의왈正義曰 : [魯襄公二十三年 武仲爲孟氏所譖 出奔邾] 여기서부터 아래의 ‘치방이분제致防而奔齊’까지는 모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글이다.
고찰하건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양공襄公 23년에, 계무자季武子적자適子가 없고, 〈서자庶子 중에〉 공미公彌장자長子였으나 도자悼子를 사랑하여 그를 후계자後繼者로 세우고자 하여 장흘臧紇(臧武仲)에게 물으니, 장흘臧紇계무자季武子를 위하여 도자悼子후계자後繼者로 세워주었다고 하였다.
공미公彌는 바로 공서公鉏이다.
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맹손孟孫(孟莊子)은 장손臧孫(臧紇)을 미워하고 계손季孫(季武子)은 장손臧孫을 좋아하였다.
맹씨孟氏어추御騶(말 기르는 일과 수레 모는 일을 겸한 관직官職) 풍점豐點(孟莊子의 서자庶子)을 좋아하였다.
맹장자孟莊子을 앓자, 풍점豐點공서公鉏에게 말하기를 ‘만약 을 〈맹씨孟氏후계자後繼者로〉 세워준다면 〈내가 에게 하여〉 장씨臧氏원수怨讐로 여기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맹장자孟莊子가 죽자, 드디어 후계자後繼者로 세웠다.
맹씨孟氏을 닫고서 계손季孫에게 하기를 ‘장씨臧氏을 일으켜 우리의 장사葬事도 지낼 수 없게 하려 합니다.’라고 하니, 계손季孫은 그 말을 믿지 않았으나, 장손臧孫은 그 소식을 듣고 경계警戒하였다.
겨울 10월에 맹씨孟氏묘도墓道를 닦으려고 장씨臧氏에게 제도除徒(길을 닦는 역도役徒)를 빌리기를 청하니, 장손臧孫정부正夫(遂正이 관리하는 역도役徒)를 보내어 돕게 하고서 동문東門 밖에 묘도墓道를 닦을 때에 장손臧孫갑사甲士를 거느리고 가서 일하는 것을 시찰視察하였다.
맹씨孟氏가 또 계손季孫에게 하니, 계손季孫하여 을 내려 장씨臧氏공격攻擊하게 하였다.
을해일乙亥日장흘臧紇녹문鹿門의 빗장[關]을 자르고 나라로 달아났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自邾如防 使爲以大蔡納請]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또 “당초에 장선숙臧宣叔나라의 여자女子를 아내로 맞이하여 장고臧賈장위臧爲를 낳았다. 그 아내가 죽자, 장선숙臧宣叔이 아내의 질녀姪女계실繼室로 삼았으니 그녀는 목강穆姜(宣公의 부인夫人)의 이종姨從(姨母의 딸)이었다.
그녀가 장흘臧紇을 낳아 궁중宮中에서 기르니 목강穆姜장흘臧紇을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장흘臧紇장선숙臧宣叔후계자後繼者로 세웠다.
장고臧賈장위臧爲나라를 떠나 나라에 가서 있었다.
장무중臧武仲나라에서 장고臧賈에게 사람을 보내어 하고, 또 대채大蔡(큰 귀갑龜甲)를 바치며 말하기를 ‘제가 불민不敏하여 종조宗祧를 지킬 수 없게 되었으니, 감히 저의 부조不弔(無能)를 합니다.
저의 제사祭祀단절斷絶하는 데는 미치지 않았으니, 형님께서 이 대채大蔡나라에 바치고서 〈후계자後繼者로 세워주기를〉 하시면 아마 들어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장고臧賈가 말하기를 ‘이는 우리 가문家門재화災禍이지 그대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니, 나는 그대의 을 따르겠다.’라고 하고서 두 번 절하고서 대귀大龜를 받았다.
그리고는 장위臧爲를 보내어 대귀大龜노군魯君께 바치고서 〈자기를 후계자後繼者로 세워주기를〉 하게 하였는데, 〈노군魯君은〉 드디어 장위臧爲를 〈장선숙臧宣叔의〉 후계자後繼者로 세웠다.
그러자 장손臧孫방읍防邑으로 가서 〈노군魯君에게〉 사람을 보내어 하였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두예杜預에 “대채大蔡대구大龜이다.”라고 하였다.
[紇非能害也 知不足也] 이 이하는 모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양공襄公 23년의 글인데 갑사甲士로 하여금 자기를 시종하게 한 것은 일을 고려考慮한 것이 얕아서였을 뿐이라는 말이다.
[非敢私請] 그 선인先人을 위해 한다는 말이다.
[苟守先祀 無廢二勳] 이훈二勳장문중臧文仲장선숙臧宣叔이다.
[敢不辟邑 乃立臧爲 紇致防而奔齊 此所謂要君] 을 점거하고서 후계자後繼者를 세워주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공자孔子께서 ‘요군要君’이라고 하신 것이다.


역주
역주1 (公子)[子 公] : 저본에는 ‘公子’로 되어있으나, 《春秋左氏傳》에 의거하여 ‘子 公’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 (籍)[藉] : 저본에는 ‘籍’으로 되어있으나, 阮刻本에 “北監本과 毛本에는 ‘籍’이 ‘藉’로 되어있으니, 옳다.”라고 한 것에 의거해 ‘藉’로 바로잡았다.
역주3 (敢)[能] : 저본에는 ‘敢’으로 되어있으나, 阮刻本에 “《春秋左氏傳》 襄公 23년조에 ‘敢’이 ‘能’으로 되어있다.”라고 한 것에 의거해 ‘能’으로 바로잡았다.
역주4 (後)[從] : 저본에는 ‘後’로 되어있으나, 《春秋左氏傳》 襄公 23년조의 杜預 注에 의거하여 ‘從’으로 바로잡았다.

논어주소(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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