桓公殺公子糾어늘 召忽死之호되 管仲不死하니 曰 未仁乎ᄂ저
注
[注]孔曰 齊襄公立하야 無常하니 鮑叔牙曰 君使民慢하니 亂將作矣라하고 奉公子小白出奔莒하다
襄公從弟公孫無知殺襄公하니 管夷吾‧召忽奉公子糾出奔魯하다
魯伐齊하야 納子糾로되 小白自莒先入하니 是爲桓公이라
桓公이 九合諸侯호되 不以兵車는 管仲之力也니 如其仁이리오
疏
‘子路曰 桓公殺公子糾 召忽死之 管仲不死 曰 未仁乎’者,
召忽‧管仲皆事子糾. 及桓公殺公子糾, 召忽致死, 而管仲獨不死, 復臣桓公,
‘子曰 桓公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 如其仁 如其仁’者, 孔子聞子路言管仲未仁, 故爲說其行仁之事,
范甯注云 “十三年會北杏, 十四年會鄄, 十五年又會鄄, 十六年會幽,二十七年又會幽,
僖元年會檉, 二年會貫, 三年會陽穀, 五年會首戴, 七年會甯母, 九年會葵丘”
疏
云‘襄公從弟公孫無知殺襄公’者, 春秋莊八年 “冬十有一月癸未, 齊無知弑其君諸兒” 是也.
云‘管夷吾召忽奉公子糾出奔魯’者, 亦莊八年左傳文.
云‘齊人殺無知 魯伐齊 納子糾’者, 莊九年經文也.
云‘殺子糾 召忽死之’者, 案莊九年傳云 “夏, 公伐齊, 納子糾, 桓公自莒先入.
鮑叔帥師來言曰 ‘子糾, 親也, 請君討之. 管
, 讎也, 請受而甘心焉’
歸而以告曰 ‘管夷吾治於高傒, 使相可也.’ 公從之” 是也.
“환공桓公이 공자公子 규糾를 죽이자, 소홀召忽은 그를 위해 죽었으나, 관중管仲은 죽지 않았으니, 〈관중管仲은〉 인仁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注
공왈孔曰 : 제齊 양공襄公이 즉위卽位하여 〈정령政令이〉 무상無常하니, 포숙아鮑叔牙가 말하기를 “임금이 백성들을 방종放縱하게 만드니, 장차 반란叛亂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고서, 공자公子 소백小白을 모시고 거莒나라로 도망갔다.
양공襄公의 종제從弟 공손무지公孫無知가 양공襄公을 죽이자, 관이오管夷吾와 소홀召忽이 공자公子 규糾를 모시고 노魯나라로 도망해 왔다.
노魯나라가 제齊나라를 토벌하여 공자公子 규糾를 들여보내고자 하였으나, 소백小白이 거莒나라로부터 먼저 들어가서 〈제齊나라 임금이 되었으니〉 이가 환공桓公이다.
〈노魯나라가 제齊나라의 강압强壓에 의해〉 도리어[乃] 공자公子 규糾를 죽이니 소홀召忽이 그를 위해 죽었다.
“환공桓公이 아홉 번 제후諸侯를 회합會合하되 병거兵車(武力)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관중管仲의 힘이었으니, 누가 그의 인仁만 하겠는가?
注
공왈孔曰 : 누가 관중管仲의 인仁만 하겠는가?
疏
○정의왈正義曰 : 이 장章은 제齊나라 대부大夫 관중管仲의 덕행德行을 논한 것이다.
[子路曰 桓公殺公子糾 召忽死之 管仲不死 曰 未仁乎]
소홀召忽과 관중管仲은 모두 자규子糾를 섬긴 신하인데, 환공桓公이 공자公子 규糾를 죽임에 미쳐 소홀召忽은 목숨을 바쳤으나 관중管仲은 홀로 죽지 않고 다시 환공桓公의 신하가 되었다.
그러므로 자로子路가 관중管仲은 인仁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子曰 桓公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 如其仁 如其仁] 공자孔子께서 “관중管仲은 인仁하지 않다.”라고 한 자로子路의 말을 들으셨기 때문에 자로를 위해 관중管仲이 인仁을 행한 일을 말씀해주신 것이다.
제齊 환공桓公이 아홉 번 제후諸侯를 회합하되 병거兵車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말은 의상衣裳의 회합會合을 이른다.
‘망해가는 나라를 보존시키고 끊어지는 대代를 이어주어 제하諸夏를 안정시킨 것이 모두 관중管仲의 힘이다.
인仁이 되기에 충분하니 이밖에 다시 누가 관중管仲의 인仁만 한 이가 있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이다.
두 번 말씀하신 것은 자로子路의 말을 부정하고 관중管仲을 깊이 찬미하기 위함이다.
아홉 번 회합했다고 말한 것은, 《사기史記》에 “병거兵車의 회합會合이 세 번, 승거乘車의 회합會合이 여섯 번이다.”라고 하였다.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 “의상衣裳의 회합會合이 열한 번이다.”라고 하였는데,
범녕范甯의 주注에 “장공莊公 13년에 북행北杏에서 회합會合하고, 14년에 견鄄에서 회합會合하고, 15년에 또 견鄄에서 회합會合하고, 16년에 유幽에서 회합하고, 27년에 또 유幽에서 회합하고,
희공僖公 원년元年에 정檉에서 회합하고, 2년에 관貫에서 회합會合하고, 3년에 양곡陽穀에서 회합會合하고, 5년에 수대首戴에서 회합會合하고, 7년에 영모甯母에서 회합會合하고, 9년에 규구葵丘에서 회합會合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모두 열한 번 회합하였는데, 북행北杏과 양곡陽穀의 회합會合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합九合이라 한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 : [襄公立 無常]에서 [出奔莒]까지.
모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장공莊公 8년의 글이다.
두예杜預의 주注에 “정령政令이 무상無常한 것이다.
소백小白은 제齊 희공僖公의 서자庶子이다.”라고 하였다.
[襄公從弟公孫無知殺襄公] 《춘추春秋》 장공莊公 8년에 “겨울 11월 계미일癸未日에 제齊나라 무지無知가 그 임금 제아諸兒를 시해弑害하였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管夷吾召忽奉公子糾出奔魯] 이 또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장공莊公 8년의 글이다.
[齊人殺無知 魯伐齊 納子糾] 《춘추春秋》 장공莊公 9년의 경문經文이다.
[小白自莒先入 是爲桓公]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장공莊公 9년의 전문傳文이다.
[殺子糾 召忽死之] 고찰하건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장공莊公 9년에 “여름에 장공莊公이 제齊나라를 토벌하여 자규子糾를 제齊나라의 임금으로 들여보내려 하였는데, 환공桓公이 거莒나라에서 먼저 제齊나라로 들어갔다.
가을에 노魯나라 군대가 제齊나라 군대와 건시乾時에서 전투하다가 노魯나라 군대가 대패大敗하였다.
포숙鮑叔이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말하기를 ‘자규子糾는 친족親族〈이라 차마 직접 죽일 수 없으니〉 노군魯君께서 그를 죽이고, 관중管仲과 소홀召忽은 원수이니 우리가 인수引受해다가 통쾌하게 원수를 갚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노魯나라가〉 생두生竇(생두)에서 자규子糾를 죽이니 소홀召忽은 자규子糾를 위해 죽고, 관중管仲은 포로捕虜가 되기를 청하였다.
포숙鮑叔이 관중管仲을 인수引受해 가다가 당부堂阜에 이르러 그의 결박結縛을 풀어주었다.
포숙이 돌아가서 제齊 환공桓公에게 고하기를 ‘관이오管夷吾는 치국治國의 재능이 고혜高傒보다 뛰어나니, 그를 승상丞相으로 삼으소서.’라고 하니, 환공桓公이 그의 말을 따랐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