疏
○正義曰 : 此一章論天下有道‧無道禮樂征伐所出不同, 及言衰失之世數也.
‘孔子曰 天下有道 則禮樂征伐自天子出’者, 王者功成制禮, 治定作樂, 立司馬之官, 掌
, 諸侯不得制作禮樂, 賜弓矢然後專征伐.
‘天下無道 則禮樂征伐自諸侯出’者, 謂天子微弱, 諸侯上僭, 自作禮樂, 專行征伐也.
言政出諸侯, 不過十世, 必失其位, 不失者少也.
‘自大夫出 五世希不失矣’者, 言政在大夫, 不過五世, 必失其位, 不失者少矣.
‘陪臣執國命 三世希不失矣’者, 陪, 重也, 謂家臣也.
言陪臣擅權, 執國之政命, 不過三世, 必失其位, 不失者少矣.
‘天下有道 則政不在大夫’者, 元為政命, 制之由君也.
注
○正義曰 : 云‘周幽王為犬戎所殺 平王東遷’者, 案周本紀云 “幽王三年, 嬖褒姒, 生伯服, 幽王欲廢太子.
太子母, 申侯女, 而為后. 幽王得褒姒愛之,
廢申后, 幷去太子, 用褒姒為后, 以其子伯服為太子.
幽王之廢
后, 去太子也, 申侯怒, 乃與繒‧西夷犬戎共攻幽王.
幽王擧烽火徵兵, 兵莫至, 遂殺幽王麗山下, 虜褒姒, 盡取周賂而去.”
隱六年左傳稱 “周桓公言於王曰 ‘我周之東遷, 晉鄭焉依.’”
周本紀又云 “於是諸侯乃卽申侯, 而共立故幽王太子宜臼, 是為平王也.”
云‘周始微弱’者, 地理志云 “幽王淫褒姒, 滅宗周, 子平王東居洛邑.”
云‘諸侯自作禮樂’者, 謂僭為天子之禮樂, 若魯昭公之比也.
案昭二十五年公羊傳云 “子家駒曰 ‘諸侯僭於天子, 大夫僭於諸侯, 久矣.’ 昭公曰 ‘吾何僭矣哉.’
子家駒曰 ‘設兩觀‧乘大輅‧朱干玉戚以舞大夏‧八佾以舞大武.’” 是也.
云‘始於隱公 至昭公十世失政 死於乾侯’者, 隱公名息姑,
平王四十九年卽位. 是王室微弱, 政在諸侯, 始於隱公.
隱公卒, 弟桓公允立, 卒, 子莊公周立, 卒, 子閔公開立, 卒, 兄僖公申立, 卒, 子文公興立, 卒, 子宣公倭立, 卒, 子成公黑肱立, 卒, 子襄公午立, 卒, 子昭公裯立, 是為十世也.
春秋昭公二十五年, 公孫於齊, 三十二年, 卒於乾侯. 是也.
疏
○정의왈正義曰 : 이 한 장章은 천하天下에 도道가 있고 없음에 따라 예악禮樂과 정벌征伐이 나오는 곳이 같지 않음을 논하고, 쇠퇴해 정권을 잃는 대수代數까지 말한 것이다.
[孔子曰 天下有道 則禮樂征伐自天子出] 왕자王者가 공업功業이 이루어지면 예禮를 제정하고, 정치가 안정되면 음악을 제작하며, 사마司馬의 관부官府를 세워 구벌九伐의 법을 맡기니, 제후諸侯는 예악禮樂을 제작할 수 없고, 〈천자天子로부터〉 궁시弓矢를 하사下賜받은 뒤에야 마음대로 정벌征伐할 수 있다.
이것이 천하天下에 도가 있을 때에는 예악禮樂과 정벌征伐이 천자天子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天下無道 則禮樂征伐自諸侯出] 천자天子가 미약微弱하고 제후諸侯가 상참上僭(아랫사람이 분수에 넘치는 짓을 함)하여, 스스로 예악禮樂을 제작하고 제멋대로 정벌征伐을 자행함을 이른다.
정령政令이 제후諸侯로부터 나오면 10대가 지나지 않아 반드시 그 지위를 잃으므로, 잃지 않는 자가 적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노魯나라 소공昭公이 제齊나라로 도망간 것이 이에 해당한다.
[自大夫出 五世希不失矣] 정권이 대부大夫에게 있으면 5대가 지나지 않아 반드시 그 지위를 잃으므로, 잃지 않는 자가 적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노魯나라 대부 계환자季桓子가 양호陽虎에게 수금囚禁된 것이 이에 해당한다.
[陪臣執國命 三世希不失矣] 배陪는 중重(거듭)이니 가신家臣을 이른다.
대부大夫가 이미 신하이기 때문에 〈대부大夫의 신하인〉 가신家臣을 일러 배신陪臣이라 한다.
배신陪臣이 정권을 독점해 국가의 정령政令(政策과 법령法令)을 집행하면 3대가 지나지 않아 반드시 그 지위를 잃으므로, 잃지 않는 자가 적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양호陽虎가 3대 만에 제齊나라로 도망간 것이 이에 해당한다.
[天下有道 則政不在大夫] 천자[元]가 정령政令을 만들고, 정사政事를 처리[制]하는 것이 임금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天下有道 則庶人不議] 의議는 헐뜯어 비방함을 이른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군상君上이 백성들의 말을 참작해 정치와 교화에 반영한다.
그리하여 시행하는 것이 모두 옳으면 서인庶人들이 헐뜯어 비방함이 없다는 말이다.
注
○정의왈正義曰 : [周幽王為犬戎所殺 平王東遷] 고찰하건대,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에 “유왕幽王 3년에 〈유왕幽王의〉 총비寵妃 포사褒姒가 백복伯服을 낳으니, 유왕幽王이 태자太子를 폐하고자 하였다.
태자太子의 모후母后는 신후申侯의 딸로 왕후王后가 되었는데, 유왕幽王이 포사褒姒를 얻고는 그녀를 사랑하여 신후申后를 폐하고 태자太子까지 아울러 버리고서 포사褒姒를 왕후王后로 삼고 그녀의 아들 백복伯服을 태자太子로 삼고자 하였다.
유왕幽王이 신후申后를 폐하고 태자太子를 버리자 신후申侯가 노하여 증繒나라 및 서이견융西夷犬戎과 함께 유왕幽王을 공격하였다.
유왕幽王이 봉화烽火를 들어 군대를 불렀으나 군대가 오지 않으니, 〈견융犬戎이〉 드디어 여산麗山 아래에서 유왕幽王을 죽이고, 포사褒姒를 사로잡고, 주周나라 재물을 다 취해 돌아갔다.”라고 하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6년에 “주周 환공桓公이 환왕桓王에게 ‘우리 주周나라가 동쪽으로 옮겨올 때에 진晉나라와 정鄭나라에 의지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하였고,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에 또 “이때에 제후諸侯들이 도리어 신후申侯에게 붙어 유왕幽王의 옛 태자太子 의구宜臼를 세웠으니, 이가 평왕平王이다.”라고 하였다.
[周始微弱]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유왕幽王이 포사褒姒에 빠져 종주宗周를 망치니, 그 아들 평왕平王이 동쪽으로 옮겨 낙읍洛邑에 거주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때 왕실王室의 존엄尊嚴이 제후諸侯와 다름이 없어서, 그 시詩가 더는 아雅가 되지 못하였다.
[諸侯自作禮樂] 참람하게 천자天子의 예악禮樂을 사용한 것이니, 이를테면 노魯나라 소공昭公 같은 무리이다.
고찰하건대,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소공昭公 25년에 “자가구子家駒가 ‘제후諸侯가 천자의 제도를 참용僭用하고 대부大夫가 제후諸侯의 제도를 참용한 지가 오래입니다.’라고 하니, 소공昭公이 ‘내가 무엇을 참용하였다는 말이냐?’라고 하였다.
자가구子家駒가 〈궁문宮門 앞에〉 ‘양관兩觀(양편에 세운 망루望樓)을 설치하고, 대로大輅를 타고, 붉은 방패[朱干]와 옥도끼[玉戚]를 들고서 대하大夏를 춤추고, 팔일八佾로 대무大武를 춤추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한 것이 이것이다.
[專行征伐] 왕명王命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정벌征伐을 자행함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제후諸侯들은 모두 이러하였다.
[始於隱公 至昭公十世失政 死於乾侯] 은공隱公의 이름은 식고息姑이다.
백금伯禽의 7대孫이고, 혜공惠公 불황弗皇의 아들인데, 성자聲子의 소생所生이다.
주周 평왕平王 49년에 즉위卽位하였으니, 이것이 왕실王室이 미약微弱하고 정권政權이 제후諸侯에 있는 것이 은공隱公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은공隱公이 졸卒하자, 아우 환공桓公 윤允이 즉위하였고, 환공이 졸하자, 이들 장공莊公 주周가 즉위하였고, 장공이 졸하자, 아들 민공閔公 개開가 즉위하였고, 민공이 졸하자 그 형 희공僖公 신申이 즉위하였고, 희공이 졸하자 아들 문공文公 흥興이 즉위하였고, 문공이 졸하자 아들 선공宣公 왜倭가 즉위하였고, 선공이 졸하자 아들 성공成公 흑굉黑肱이 즉위하였고, 성공이 졸하자 아들 양공襄公 오午가 즉위하였고, 양공이 졸하자 아들 소공昭公 주裯가 즉위하였으니, 이때까지 10세世이다.
《춘추春秋》 소공昭公 25년에 소공昭公이 제齊나라로 도망갔고[孫], 32년에 건후乾侯에서 죽은 것이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