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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注疏(3)

논어주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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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주소(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 微子去之하고 箕子為之奴하고 比干諫而死하니라
[注]馬曰 微箕 二國名이요 爵也
微子 紂之庶兄이요 箕子比干 紂之諸父
微子見紂無道하고 早去之하고 箕子佯狂為奴하고 比干以諫見殺하니라
孔子曰
殷有三仁焉하니라
[注]仁者愛人이라
三人行異而同稱仁 以其俱在憂亂寧民일새니라
[疏]‘微子’至‘仁焉’
○正義曰 : 此章論殷有三仁, 志同行異也.
‘微子去之 箕子為之奴 比干諫而死’者, 微子, 紂之庶兄. 箕子‧比干, 紂之諸父.
見紂無道, 微子去之. 箕子佯狂為奴. 比干以諫見殺.
‘孔子曰 殷有三仁焉’者, 愛人謂之仁,
三人所行異而同稱仁, 以其俱在憂亂寧民也.
○注‘馬曰’至‘見殺’
○正義曰 : 云‘微箕 二國名 子 爵也’者, 孔安國云 “微, 圻內國名, 子, 爵,
為紂卿士, 去無道.” 鄭玄以為 “微與箕俱在圻內, 孔雖不言箕, 亦當在圻內.” 王肅云 “微, 國名, 子, 爵,
入為王卿士.”
肅意蓋以微為圻外, 故言入也.
微子名啓, 世家作開,
辟漢景帝名也.
‘微子 紂之庶兄 箕子比干 紂之諸父’者, 啓與其弟仲衍 皆紂之同母庶兄也.
呂氏春秋仲冬紀云 “紂之母生微子啓與仲衍, 其時尙為妾.
紂之父欲立微子啓為太子, 太史據法而爭曰 ‘有妻之子, 不可立妾之子.’
故立紂為後.”
徧檢書傳, 不見箕子之名.
惟司馬彪注莊子云 “箕子名胥餘.” 不知出何書也.
家語曰 “則諸父.” 知比干是紂之諸父耳. 箕子則無文.
宋世家云 “箕子者, 紂之親戚也.”
言親戚, 不知為父為兄也.
鄭玄‧王肅皆以箕子為紂之諸父, 服虔‧杜預以為紂之庶兄,
旣無正文, 各以意言之耳.
云‘微子見紂無道 早去之 箕子佯狂為奴 比干以諫見殺’者, 尙書微子篇 備有去殷之事.
本紀云 “西伯旣卒, 周武王之東伐, 至盟津. 諸侯叛殷, 會周者八百.
諸侯皆曰 ‘紂可伐矣.’ 武王曰 ‘爾未知天命.’ 乃復歸.
紂愈淫亂不止.
微子數諫不聽, 乃與太師謀, 遂去.
比干曰 ‘為人臣者, 不得不以死爭.’ 迺强諫紂. 紂怒曰 ‘吾聞聖人心有七竅.’ 剖比干, 觀其心.
箕子懼, 乃佯狂為奴, 紂又囚之.” 是也.


미자微子는 〈를〉 떠났고, 기자箕子는 〈의〉 종이 되었고, 비간比干하다가 죽었다.
마왈馬曰 : 는 두 나라의 이름이고, 작위爵位이다.
미자微子서형庶兄이고, 기자箕子비간比干제부諸父(아버지뻘 되는 당내堂內지친至親)이다.
미자微子무도無道함을 보고서 일찍이 를 떠나갔고, 기자箕子는 미친 체하여 종이 되었고, 비간比干하다가 살해殺害당하였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나라에 세 분의 인인仁人이 계셨다.”
인자仁者는 사람을 사랑한다.
세 사람이 행한 일이 달랐는데도 똑같이 ‘’이라 칭한 것은 그분들의 〈뜻이〉 모두 국란國亂을 근심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의 [微子]에서 [仁焉]까지
정의왈正義曰 : 이 나라에 계셨던 세 인인仁人이 뜻은 같았으나 행위가 달랐던 일을 논한 것이다.
[微子去之 箕子為之奴 比干諫而死] 미자微子서형庶兄이고, 기자箕子비간比干제부諸父이다.
무도無道함을 보고서 미자微子는 떠나갔고, 기자箕子는 미친 체하여 종이 되었고, 비간比干하다가 살해殺害당하였다.
[孔子曰 殷有三仁焉]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이라 한다.
세 사람이 행한 일이 다른데도 똑같이 ‘’이라 칭한 것은 그분들의 〈뜻이〉 모두 국란國亂을 근심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의 [馬曰]에서 [見殺]까지
정의왈正義曰 : [微箕 二國名 子 爵也] 공안국孔安國은 “기내圻內에 있는 국명國名이고, 작위爵位이다.
경사卿士가 되었다가 무도無道함을 보고 떠난 것이다.”라고 하였고, 정현鄭玄은 “는 모두 기내圻內에 있는 〈나라이니,〉 공안국孔安國이 비록 를 말하지 않았으나, 또한 응당 기내圻內에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왕숙王肅은 “국명國名이고, 작위爵位이다.
들어와서 주왕紂王경사卿士가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숙王肅기외圻外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라 말한 듯하다.
미자微子는 이름이 인데, 《사기史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는 ‘’로 되어있다.
이는 나라 경제景帝의 이름을 피해 ‘’로 바꾼 것이다.
[微子 紂之庶兄 箕子比干 紂之諸父] 는 그 아우 중연仲衍과 함께 모두 동복同腹 서형庶兄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중동기仲冬紀〉에 “모친母親미자계微子啓중연仲衍을 낳았는데, 그때는 〈그 신분이〉 아직 이었다.
얼마 뒤에 가 되어 를 낳았다.
부친父親미자계微子啓를 세워 태자太子로 삼고자 하니, 태사太史에 의거해 ‘의 아들이 있으니 의 아들을 세워서는 안 된다.’라고 간쟁諫爭하였다.
그러므로 를 세워 후사後嗣로 삼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서전書傳(典籍)을 두루 검색檢索해보았으나, 기자箕子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오직 사마표司馬彪의 《장자莊子에만 “기자箕子는 이름이 서여胥餘이다.”라고 하였으니, 어느 서적書籍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비간比干와의 친속親屬 〈관계가〉 제부諸父이다.”라고 하였으니, 비간比干제부諸父임을 알 수 있을 뿐이고, 〈이 밖에〉 기자箕子에 대한 글은 없다.
사기史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 “기자箕子친척親戚이다.”라고 하였다.
친척親戚’이라 하였으니, 아버지뻘이 되는지 형뻘이 되는지 알 수 없다.
정현鄭玄왕숙王肅은 모두 기자箕子제부諸父라 하였고, 복건服虔두예杜預서형庶兄이라 하였다.
이미 〈신빙信憑할 만한〉 정문正文(經文)이 없으니, 각각 자기들의 의사意思에 따라 말한 것뿐이다.
[微子見紂無道 早去之 箕子佯狂為奴 比干以諫見殺] 《상서尙書》 〈미자微子〉篇에 나라를 떠난 일이 자세히 실려 있다.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에 “서백西伯이 죽은 뒤에 나라 무왕武王동정군東征軍을 거느리고서 맹진盟津에 이르니, 제후諸侯들이 나라를 배반하고서 나라 진영陣營으로 모인 자가 800이었다.
제후諸侯들이 모두 ‘토벌討伐해야 한다.’라고 하였으나, 무왕武王은 ‘너희들은 천명天命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고서 회군回軍하여 돌아갔다.
〈그러자〉 는 더욱 음란淫亂한 짓을 멈추지 않았다.
미자微子가 자주 하였으나 듣지 않으니, 이에 〈미자微子는〉 태사太師모의謀議하고서 마침내 〈나라를〉 떠났다.
비간比干이 말하기를 ‘남의 신하가 된 자는 죽음으로 간쟁諫爭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서, 에게 강력히 하니, 가 노하여 ‘내 들으니, 성인聖人심장心腸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고 한다.’라고 하고서, 비간比干의 배를 갈라 그 심장心腸을 꺼내보았다.
기자箕子가 〈이것을 보고〉 두려워하여 곧 거짓으로 미친 체하니, 가 또 그를 수금囚禁(拘禁)하였다.”라고 한 것이 이 일을 말한 것이다.


역주
역주1 (尤)[猶] : 저본에는 ‘尤’로 되어있으나, “北監本과 毛本에는 ‘尤’가 ‘猶’로 되어있으니, 옳다.”라고 한 阮元의 校勘記에 의거하여 ‘猶’로 바로잡았다.
역주2 (改而為妻後生紂)[已而為妻而生紂] : 저본에는 ‘改而為妻後生紂’로 되어있으나, “《呂氏春秋》 〈呂覽〉에는 ‘改’가 ‘已’로 되어있고 ‘後’가 ‘而’로 되어있으니, 옳다.”라고 한 阮元의 校勘記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역주3 比干(是)[於]紂 (之)親 : 저본에는 ‘比干是紂之親’으로 되어있으나, “지금 《孔子家語》에는 ‘比干於紂 親’으로 되어있다.”라고 한 阮元의 校勘記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논어주소(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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