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正義曰 : 云‘微箕 二國名 子 爵也’者, 孔安國云 “微, 圻內國名, 子, 爵,
為紂卿士, 去無道.” 鄭玄以為 “微與箕俱在圻內, 孔雖不言箕, 亦當在圻內.” 王肅云 “微, 國名, 子, 爵,
‘微子 紂之庶兄 箕子比干 紂之諸父’者, 啓與其弟仲衍 皆紂之同母庶兄也.
呂氏春秋仲冬紀云 “紂之母生微子啓與仲衍, 其時
尙為妾.
紂之父欲立微子啓為太子, 太史據法而爭曰 ‘有妻之子, 不可立妾之子.’
惟司馬彪注莊子云 “箕子名胥餘.” 不知出何書也.
家語曰 “
則諸父.” 知比干是紂之諸父耳. 箕子則無文.
鄭玄‧王肅皆以箕子為紂之諸父, 服虔‧杜預以為紂之庶兄,
云‘微子見紂無道 早去之 箕子佯狂為奴 比干以諫見殺’者, 尙書微子篇 備有去殷之事.
本紀云 “西伯旣卒, 周武王之東伐, 至盟津. 諸侯叛殷, 會周者八百.
諸侯皆曰 ‘紂可伐矣.’ 武王曰 ‘爾未知天命.’ 乃復歸.
比干曰 ‘為人臣者, 不得不以死爭.’ 迺强諫紂. 紂怒曰 ‘吾聞聖人心有七竅.’ 剖比干, 觀其心.
注
마왈馬曰 : 미微와 기箕는 두 나라의 이름이고, 자子는 작위爵位이다.
미자微子는 주紂의 서형庶兄이고, 기자箕子와 비간比干은 주紂의 제부諸父(아버지뻘 되는 당내堂內의 지친至親)이다.
미자微子는 주紂의 무도無道함을 보고서 일찍이 주紂를 떠나갔고, 기자箕子는 미친 체하여 종이 되었고, 비간比干은 간諫하다가 살해殺害당하였다.
疏
○정의왈正義曰 : 이 장章은 은殷나라에 계셨던 세 인인仁人이 뜻은 같았으나 행위가 달랐던 일을 논한 것이다.
[微子去之 箕子為之奴 比干諫而死] 미자微子는 주紂의 서형庶兄이고, 기자箕子와 비간比干은 주紂의 제부諸父이다.
주紂의 무도無道함을 보고서 미자微子는 떠나갔고, 기자箕子는 미친 체하여 종이 되었고, 비간比干은 간諫하다가 살해殺害당하였다.
[孔子曰 殷有三仁焉]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인仁이라 한다.
세 사람이 행한 일이 다른데도 똑같이 ‘인仁’이라 칭한 것은 그분들의 〈뜻이〉 모두 국란國亂을 근심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注
○정의왈正義曰 : [微箕 二國名 子 爵也] 공안국孔安國은 “미微는 기내圻內에 있는 국명國名이고, 자子는 작위爵位이다.
주紂의 경사卿士가 되었다가 무도無道함을 보고 떠난 것이다.”라고 하였고, 정현鄭玄은 “미微와 기箕는 모두 기내圻內에 있는 〈나라이니,〉 공안국孔安國이 비록 기箕를 말하지 않았으나, 기箕 또한 응당 기내圻內에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왕숙王肅은 “미微는 국명國名이고, 자子는 작위爵位이다.
들어와서 주왕紂王의 경사卿士가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숙王肅은 미微가 기외圻外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입入’이라 말한 듯하다.
미자微子는 이름이 계啓인데, 《사기史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는 ‘개開’로 되어있다.
이는 한漢나라 경제景帝의 이름을 피해 ‘개開’로 바꾼 것이다.
[微子 紂之庶兄 箕子比干 紂之諸父] 계啓는 그 아우 중연仲衍과 함께 모두 주紂의 동복同腹 서형庶兄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중동기仲冬紀〉에 “주紂의 모친母親이 미자계微子啓와 중연仲衍을 낳았는데, 그때는 〈그 신분이〉 아직 첩妾이었다.
주紂의 부친父親이 미자계微子啓를 세워 태자太子로 삼고자 하니, 태사太史가 법法에 의거해 ‘처妻의 아들이 있으니 첩妾의 아들을 세워서는 안 된다.’라고 간쟁諫爭하였다.
그러므로 주紂를 세워 후사後嗣로 삼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서전書傳(典籍)을 두루 검색檢索해보았으나, 기자箕子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오직 사마표司馬彪의 《장자莊子》 주注에만 “기자箕子는 이름이 서여胥餘이다.”라고 하였으니, 어느 서적書籍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비간比干은 주紂와의 친속親屬 〈관계가〉 제부諸父이다.”라고 하였으니, 비간比干이 주紂의 제부諸父임을 알 수 있을 뿐이고, 〈이 밖에〉 기자箕子에 대한 글은 없다.
《사기史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 “기자箕子는 주紂의 친척親戚이다.”라고 하였다.
‘친척親戚’이라 하였으니, 아버지뻘이 되는지 형뻘이 되는지 알 수 없다.
정현鄭玄과 왕숙王肅은 모두 기자箕子를 주紂의 제부諸父라 하였고, 복건服虔과 두예杜預는 주紂의 서형庶兄이라 하였다.
이미 〈신빙信憑할 만한〉 정문正文(經文)이 없으니, 각각 자기들의 의사意思에 따라 말한 것뿐이다.
[微子見紂無道 早去之 箕子佯狂為奴 比干以諫見殺] 《상서尙書》 〈미자微子〉篇에 은殷나라를 떠난 일이 자세히 실려 있다.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에 “서백西伯이 죽은 뒤에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동정군東征軍을 거느리고서 맹진盟津에 이르니, 제후諸侯들이 은殷나라를 배반하고서 주周나라 진영陣營으로 모인 자가 800이었다.
제후諸侯들이 모두 ‘주紂를 토벌討伐해야 한다.’라고 하였으나, 무왕武王은 ‘너희들은 천명天命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고서 회군回軍하여 돌아갔다.
〈그러자〉 주紂는 더욱 음란淫亂한 짓을 멈추지 않았다.
미자微子가 자주 간諫하였으나 듣지 않으니, 이에 〈미자微子는〉 태사太師와 모의謀議하고서 마침내 〈은殷나라를〉 떠났다.
비간比干이 말하기를 ‘남의 신하가 된 자는 죽음으로 간쟁諫爭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서, 주紂에게 강력히 간諫하니, 주紂가 노하여 ‘내 들으니, 성인聖人의 심장心腸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고 한다.’라고 하고서, 비간比干의 배를 갈라 그 심장心腸을 꺼내보았다.
기자箕子가 〈이것을 보고〉 두려워하여 곧 거짓으로 미친 체하니, 주紂가 또 그를 수금囚禁(拘禁)하였다.”라고 한 것이 이 일을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