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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國策(1)

전국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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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책(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見逐於趙, 而入韓‧魏, 遇奪於涂.
聞應侯任, 皆負重罪, 應侯內慙, 乃西入秦.
將見昭王, 使人宣言以感怒應侯曰:“燕客蔡澤, 天下駿雄弘辯之士也.
彼一見秦王, 秦王必相之而奪君位.”
應侯聞之, 使人召蔡澤.
蔡澤入, 則揖應侯, 應侯固不快,
及見之, 又倨.
應侯因曰:
“子常宣言代我相秦, 豈有此乎?”
對曰:
“然.”
應侯曰:
“請聞其說.”
蔡澤曰:
“吁!
何君見之晩也?
夫四時之序,
成功者去.
夫人生手足堅强, 耳目聰明聖知, 豈非士之所願與?”
應侯曰:
“然.”
蔡澤曰:
“質仁秉義, 行道施德於天下, 天下懷樂敬愛, 願以爲君王, 豈不辯智之期與?”
應侯曰:
“然.”
蔡澤復曰:
“富貴顯榮, 成理萬物, 萬物各得其所; 生命壽長, 終其年而不夭傷;
天下繼其統, 守其業, 傳之無窮, 名實純粹, 澤流千世, 稱之而毋絶, 與天下終.
豈非道之符, 而聖人所謂吉祥善事與?”
應侯曰:
“然.”
澤曰:
“若秦之, 楚之, 越之, 其卒亦可願矣.”
應侯知蔡澤之欲困己以說, 復曰:
“何爲不可?
夫公孫鞅事孝公, 極身毋二, 盡公不還私, 信賞罰以致治,
竭智能, 示情素,
蒙怨咎, 欺舊交, , 卒爲秦禽將, 破敵軍, 攘地千里.
吳起事悼王, 使私不害公, 讒不蔽忠, 言不取苟合, 行不取苟容,
行義不毁譽, 必有伯主强國, 不辭禍凶.
大夫種事, 主離困辱, 悉忠而不解, 主雖亡絶, 盡能而不離, 多功而不矜, 貴富不驕怠.
若此三子者, 義之至, 忠之節也.
故君子殺身以成名, 義之所在, 身雖死, 無憾悔, 何爲不可哉?”
蔡澤曰:
“主聖臣賢, 天下之福也;
君明臣忠, 國之福也; 父慈子孝, 夫信婦貞, 家之福也.
忠, 不能存殷; 子胥知, 不能存吳; 孝, 而.
是有忠臣孝子, 國家滅亂, 何也?
無明君賢父以聽之.
故天下以其君父爲戮辱, 憐其臣子.
夫待死而後可以立忠成名, 是不足仁, 孔子不足聖, 管仲不足大也.”
於是應侯稱善.
蔡澤得少間, 因曰:
“商君‧吳起‧大夫種, 其爲人臣, 盡忠致功, 則可願矣.
事文王, 也, 豈不亦忠乎?
以君臣論之, 商君‧吳起‧大夫種, 其可願孰與閎夭‧周公哉?”
應侯曰:
“商君‧吳起‧大夫種不若也.”
蔡澤曰:
“然則君之主, 慈仁任忠, 不欺舊故, 孰與秦孝公‧楚悼王‧越王乎?”
應侯曰:
“未知何如也.”
蔡澤曰:
“主固親忠臣, 不過秦孝‧越王‧楚悼;
君之爲主, 正亂‧批患‧折難‧廣地‧殖穀‧富國‧足家‧强主,
威蓋海內, 功章萬里之外, 不過商君‧吳起‧大夫種.
而君之祿位貴盛, 私家之富過於三子,
而身不退, 竊爲君危之.
語曰:日中則移, 月滿則虧.
物盛則衰, 天之常數也; 進退‧盈縮‧變化, 聖人之常道也.
昔者, 九合諸侯, 一匡天下, 至之會, 有驕矜之色, 畔者九國.
吳王無適於天下, 輕諸侯, 凌齊‧晉, 遂以殺身亡國.
叱呼駭三軍, 然而身死於庸夫.
此皆乘至盛不及道理也.
夫商君爲孝公平權衡‧正度量‧調輕重, 決裂阡陌, 敎民耕戰,
是以兵動而地廣, 兵休而國富,
故秦無敵於天下, 立威諸侯. 功已成, 遂以車裂.
楚地持戟百萬, 白起率數萬之師, 以與楚戰, 一戰擧鄢‧郢, 再戰,
南幷蜀‧漢, 又越韓‧魏攻强趙, 北阬, 誅屠四十餘萬之衆,
流血成川, 沸聲若雷,
使秦業帝.
自是之後, 趙‧楚懾服, 不敢攻秦者, 白起之勢也. 身所服者, 七十餘城.
功已成矣, 賜死於.
吳起爲楚悼罷無能, 廢無用, 損不急之官, 塞私門之請, 壹楚國之俗,
南攻, 北幷陳‧蔡, 破橫散從, 使馳說之士無所開其口.
功已成矣, 卒.
大夫種爲越王墾草刱邑, 辟地殖穀, 率四方士, 上下之力, 以禽勁吳,
成霸功. 勾踐終棓而殺之.
此四子者, 成功而不去, 禍至於此.
此所謂信而不能詘, 往而不能反者也.
知之, 超然避世, 長爲陶朱.
君獨不觀博者乎?
或欲分大投, 或欲分功. 此皆君之所明知也.
今君相秦, 計不下席, 謀不出廊廟, 坐制諸侯,
利施三川, 以實宜陽, 決之險, 塞太行之口,
又斬, 棧道千里於蜀‧漢, 使天下皆畏秦.
秦之欲得矣, 君之功極矣.
此亦秦之分功之時也!
如是不退, 則商君‧白公‧吳起‧大夫種是也. 君何不以此時歸相印, 讓賢者授之?
必有之廉, 長爲應侯, 世世稱孤, 而有之壽, 孰與以禍終哉?
此則君何居焉?”
應侯曰:
“善.”
乃延入坐爲上客.
後數日, 入朝, 言於秦昭王曰:
“客新有從來者蔡澤, 其人辯士.
臣之見人甚衆, 莫有及者,
臣不如也.”
秦昭王召見, 與語, 大說之, 拜爲.
應侯因謝病, 請歸相印.
昭王彊起應侯, 應侯遂稱篤, 因免相.
昭王新說蔡澤計畫, 遂拜爲秦相, .
蔡澤相秦王數月, 人或惡之, 懼誅, 乃謝病歸相印, 號爲.
秦十餘年,
昭王‧孝文王‧, 卒事始皇帝. 爲秦使於燕, 三年而燕使入質於秦.


채택蔡澤나라에서 쫓겨나다
채택蔡澤나라에서 쫓겨나 나라‧나라로 망명하여 떠돌다가, 도중에서 가지고 다니던 솥과 그릇까지 빼앗겼다.
채택은 응후應侯가 임명한 정안평鄭安平왕계王稽 등이 모두 중죄를 범하게 되어 응후가 내심 매우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에 서쪽으로 진나라로 들어왔다.
장차 진나라 소왕昭王을 만나려고 하면서 사람을 시켜 응후가 격노하도록 떠들고 다니게 하기를 ‘나라 유세객 채택은 천하의 준걸스럽고 말은 잘하는 인물이다.
그가 한 번 진왕秦王을 알현하게 되면 진왕은 틀림없이 그를 으로 삼고 응후의 자리를 빼앗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응후가 이 말을 듣자 사람을 시켜 채택을 불러오도록 하였다.
채택이 들어와서 응후에게 만 하니, 응후는 매우 불쾌하였다.
마주 대한 후에도 채택은 여전히 거만하였다.
이에 응후는 꾸짖으며 물었다.
“그대가 항상 나를 대신해서 진나라 상이 된다고 떠들고 다녔다는 데 그런 일이 있소?”
채택이 대답하였다.
“그렇소!”
응후가 말하였다.
“어디 이유나 들어봅시다.”
채택이 말하였다.
“아!
그대는 어찌 그리 나를 늦게 만났소!
무릇 네 계절의 차례를 보시오.
을 이루면 물러날 줄 압니다.
또 사람으로 태어나서 수족手足견강堅强하고, 이목耳目이 총명하여 그 지혜가 성인 같아지는 것, 이것은 선비라면 누구나 바라는 게 아니겠소?”
응후가 말하였다.
“그렇소.”
채택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에 바탕을 두고 를 바로잡아 그 을 천하에 시행하여 천하가 마음으로 기뻐하고 사랑하여 그런 인물을 왕으로 삼고 싶어하는 것, 이것이 웅변가와 지혜로운 자가 기대하는 것이 아니겠소?”
응후가 말하였다.
“그렇소.”
채택이 다시 말하였다.
“부귀 영달하고 만물이 이치대로 이루어져 그 만물이 각각 제자리를 얻도록 하며, 태어난 목숨이 장수하여 각각 그 천수를 누려 요절夭折함이 없고,
또 천하가 다 그 계통을 이어 을 지키며 이를 후세에 전하되 끝이 없으며, 명실名實순수純粹하고 그 은택이 천세千世에 흘러 그에 맞게 이루어지되 끊임이 없어 천하와 함께하여 끝나는 것,
이런 것이야말로 그 도와 부합되어 성인이 말한 바 길상선사吉祥善事가 아니겠소?”
응후가 말하였다.
“그렇소.”
채택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이 나라에 있어서의 상앙商鞅, 나라에 있어서의 오기吳起, 나라의 대부 문종文種 등 세 사람은 끝내 그 바라던 바를 이룬 자들이라 할 수 있겠소?”
이때에 응후는 채택이 자신을 답하기 어려운 궁지로 몰고 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다시 말하였다.
“어찌 이루지 못한 자라고 할 수 있겠소?
무릇 상앙商鞅나라 효공孝公을 섬기되 자신의 몸을 다해 두 가지 마음이 없었으며, 을 다하되 로 돌리는 법이 없었고, 상벌을 분명히 하여 바른 다스림을 이루었소.
또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다하여 소심素心을 펴 보였소.
불행히 원한과 참언을 입고 옛 친구에게 속임을 당하였지만 그럴수록 힘을 내어 나라 공자公子 을 사로잡고, 마침내 진나라를 위해 나라 장수까지 잡아, 적군을 깨뜨리고 땅을 1천 리나 더 넓혔소.
오기吳起나라 도왕悼王을 섬기면서 사사로운 일을 위해 을 해치는 일이 없었고, 참언讒言으로 충성을 덮어 버리지 않았으며, 말은 구차스럽게 꾸미는 법이 없었으며, 행동도 구차스러운 모습을 한 적이 없었소.
그리고 의를 행하되 훼예毁譽를 돌아보는 일이 없었으며, 섬기는 주인을 반드시 패자로 만들고, 나라를 강하게 하는 일이라면 화흉禍凶을 마다하지 않았소.
대부 문종文種월왕越王을 섬기면서 임금이 나라에 쫓겨 떠돌며 곤욕을 당할 때, 그 충성을 다하되 조금도 해이함이 없었으며 주인이 비록 망하고 끊어졌지만 자신의 능력을 끝까지 써서 그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많은 공을 세우고도 자랑하지 아니하고, 부귀해서도 교만하거나 나태하지 않았소.
이 세 사람의 경우, 는 지극한 데까지, 은 절개를 끝까지 지킨 인물들이오.
그래서 군자는 살신殺身하여 그 이름을 이루는 것이니 가 있는 곳이라면 몸이 비록 죽더라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 법이니, 어찌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겠소?”
채택이 말하였다.
“군주 된 자가 스럽고 그 신하 된 자가 어질다면 이는 천하의 복입니다.
또 임금이 현명하고 신하가 충성한다면 이는 그 나라의 복이며 아버지는 자애롭고 아들은 효도하고 지아비는 미덥고 아내는 정숙하면 이는 그 가정의 복입니다.
그러나 비간比干이 충성되기는 하였지만 나라를 존속시키지는 못하였고, 오자서伍子胥도 지혜롭기는 하였지만 나라를 존속시키지 못하였으며 태자太子 신생申生이 효성스럽기는 하였지만 나라는 끝내 혼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충신忠臣효자孝子가 있었음에도 국가가 멸란滅亂에 빠진 것은 어찌 된 연유입니까?
이는 바로 아랫사람의 충간忠諫이나 건의를 들어 줄 명군明君현부賢父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하에 그 임금이나 아버지가 어질지 못해 살육을 당하게 되면 그 신하나 아들을 불쌍히 여기는 법입니다.
만약 반드시 죽어야만 그 충성을 다하고 이름을 이룬다면 〈아마 죽지 않은〉 미자微子 같은 이는 을 이루었다 할 수 없을 것이며, 공자孔子 또한 성인이라 할 수 없으며, 관중管仲도 큰 인물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응후는 이에 훌륭한 말이라고 칭찬하였다.
채택은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하였다.
상앙商鞅오기吳起대부大夫 문종文種은 남의 신하가 되어 충성을 다하여 공을 이루게 된 것은 그들이 원하였던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굉요閎夭문왕文王을 섬기고 주공周公 성왕成王을 보필한 것도 어찌 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군신 관계로 본다면 상앙‧오기‧문종처럼 원해서 하였던 충성이 굉요나 주공에 비교하여 어떻다고 보십니까?”
응후가 말하였다.
“상앙‧오기‧문종은 굉요나 주공에게 미치지 못하오.”
채택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그대 임금이신 진왕은 인자하고 충성을 믿어 주며 옛 정의를 배반하지 않을까 하는 면에서 효공孝公 도왕悼王월왕越王에 비교하면 어떻다고 보십니까?”
응후가 말하였다.
“어떨지 모르겠소.”
채택이 말하였다.
“그대의 임금은 진실로 충신忠臣을 친히 여기는 면에서는 진 효공‧초 도왕‧월왕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대는 그러한 임금을 위해서 어지러움을 바르게 해 주고, 근심거리를 없애 주었으며, 어려움을 물리치고, 땅을 넓혀 주었으며, 식량 생산을 늘렸으며,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가정들을 풍족하게 해 주고 임금을 강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위세가 해내海內를 덮을 지경이며, 그 공이 1만 리 밖까지 드날리고 있으나 그 공도 상앙‧오기‧대부 문종을 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대의 작록과 지위는 귀성貴盛하여, 사사로이 집에 저장한 는 앞에 든 세 사람보다 많습니다.
그런데도 몸은 물러날 줄 모르니 이것이 제가 그대를 위해 위험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바입니다.
속담에 ‘해는 정오에 이르면 지게 마련이고, 달은 차면 기울게 마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만물은 성하면 쇠하는 법이니 이것이 하늘의 상수常數진퇴進退, 영축盈縮, 변화變化는 성인의 상도常道입니다.
옛날 환공桓公이 아홉 번 제후諸侯회맹會盟하고 한 번 천하를 바로잡아 규구葵丘에서 회맹會盟할 때에 이르러서는 교만하고 긍지가 지나친 표정이어서 그에게 등을 돌린 나라가 아홉이나 되었습니다.
오왕吳王 부차夫差는 천하에 무적일 만큼 강하였으나 제후를 경시하고 을 능멸하여 결국 몸도 망치고 나라도 망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육夏育태사太史 같은 이 역시 호령 하나로 삼군三軍을 놀라게 하였지만 끝내 졸병의 손에 죽고 말았습니다.
이는 모두 권위를 지극히 성하게 할 줄만 알았지 바른 도리에 눈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릇 상앙은 효공孝公을 위해 권형權衡을 공평히 하고, 도량度量을 바르게 하였으며, 경중輕重을 조절하고 정전제丁田制의 경계를 깨뜨리고, 백성들로 하여금 일하면서 싸우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병사들이 움직이면 땅이 넓어지고, 병사들이 쉬면 나라가 부유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진나라는 천하무적의 대국이 되어 제후들에게 위세를 세웠지만 상앙은 공이 이미 이루어진 후 끝내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지고 말았습니다.
당시 나라는 창을 쥔 병사가 1백만이었지만 백기白起는 수만 명밖에 되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와 싸움이 붙었을 때 일거에 을 들어내고, 두 번째에 이릉夷陵까지 불질러 버렸습니다.
남으로는 한중漢中을 병탄하고, 다시 나라‧나라를 넘어 강한 나라를 쳐서 마복군馬服君을 패배시켜 구덩이에 묻었으며, 그 군대 40만의 무리를 도륙하였습니다.
그때 피가 흘러 내를 이루었고 들끓는 곡성이 우레와 같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진나라가 패업霸業을 이루도록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나라‧나라는 그 위세에 복종하여 감히 진나라를 공격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모두 백기의 위세 때문이었으며 게다가 그가 탈취한 땅도 70여 이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공이 이미 이루어졌건만 그도 결국 두우杜郵에서 사사賜死되고 말았습니다.
오기吳起도왕悼王을 위하여 무능한 자를 물리치고 쓸데없는 자리를 폐지시켰으며, 급하지 않은 관료는 덜고 사문私門의 청탁을 막았으며 초나라의 풍속을 하나로 통일시켰습니다.
그리고 남으로 양월楊越을 치고, 북으로는 나라 나라를 병탄하여 연횡連橫 합종合從을 파기하여 유세遊說하는 자들이 입을 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공이 이루어진 후 역시 끝내 사지가 찢기는 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대부 문종文種월왕越王을 위해 나라를 개척하고 땅을 넓혀 식량을 증산하였으며, 사방의 선비들과 상하의 힘을 모아 그 강한 나라 왕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나 패업霸業을 이룬 후에 임금 구천勾踐은 끝내 그를 배반하여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 네 사람은 공을 이룬 다음 물러날 줄을 몰랐기 때문에 화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곧 펴기만 하고 굽힐 줄을 모르고, 가기만 하고 돌아올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범려范蠡만은 이를 알고 초연히 세상을 피해 도주공陶朱公으로 천수天壽를 다하였습니다.
그대는 도박賭博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까?
어떤 때는 혼자서 이겼으면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남이 이긴 것을 나누어 갖기라도 하였으면 하니, 이는 그대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대는 나라의 재상이 되어 계책은 자리를 뜨지 않고 모책은 조정을 나서지 않고도 편안히 앉아서 세워 제후들을 제압할 정도입니다.
그리하여 삼천三川까지 이익이 넘치고 의양宜陽까지 그 공이 채워지며, 양장羊腸의 험로를 열어 태항산太行山 입구를 봉쇄하였습니다.
그리고 범씨范氏중항씨中行氏의 땅을 지나 잔도棧道로 1천 리나 뻗쳐 한중漢中까지 통하게 하여 천하 제후들로 하여금 진나라를 두렵게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진나라가 얻고 싶어하는 것이면 그대가 다 이루어 주었으니 그대의 공은 지극합니다.
지금이 역시 진나라의 공을 나눌 때입니다.
만약 이때 그대가 용퇴勇退하지 않으면 그대도 결국 저 상앙‧백기‧오기‧대부 문종처럼 되고 말 것인데, 왜 그대는 지금 이때에 상인相印을 풀어 다른 어진 이에게 넘겨 주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면 그대는 틀림없이 백이伯夷처럼 청렴하다는 칭찬을 받게 될 것이며, 그대의 봉지인 땅의 를 누리며 세세토록 를 칭하며, 저 왕자王子 적송자赤松子 같은 선인仙人를 누릴 터이니, 잘못되어 를 입고 생을 마치는 것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여기에서 그대는 어떻게 처신할 것입니까?”
응후가 말하였다.
“좋소!”
그리고는 채택을 안으로 맞이하여 상객上客으로 삼았다.
범저는 며칠 후 입조入朝하여 진 소왕에게 말하였다.
“저의 빈객賓客 중에 새로이 방금 산동山東으로부터 온 채택蔡澤이라는 자가 있는데 그는 변사辯士입니다.
제가 이제껏 많은 사람을 보아왔지만 그보다 뛰어난 인물은 본 적이 없습니다.
저도 그만 못합니다.”
진 소왕은 채택을 불러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끝에 크게 기뻐하여 그를 객경客卿으로 삼았다.
응후는 병을 핑계하여 상인相印을 풀어 반납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강경하게 응후를 나오게 하였지만 응후는 끝내 이 중하다고 일컬어 인하여 재상직을 하였다.
소왕은 새로이 채택의 계획을 기뻐하여 마침내 그를 진나라 으로 삼아 동쪽의 나라를 거두어들였다.
채택이 진나라 상이 된 지 수개월이 되자 사람들이 더러 그를 비방하자, 채택은 주살誅殺당할까 두려워 이에 즉시 병을 핑계로 역시 상인相印을 반납하니, 강성군剛成君이라 호하였다.
그 뒤에도 채택은 진나라에 10여 년 더 거주하였다.
뒤에 소왕昭王효문왕孝文王장양왕莊襄王을 거쳐 마침내 시황始皇을 섬기게 되었으며, 진나라를 위해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3년 후에 나라 태자太子 을 진나라에 인질로 오도록 하였다.


역주
역주1 092. 蔡澤見逐於趙 : 이 장은 《史記》 〈范雎蔡澤列傳〉의 蔡澤傳의 거의 전부이다. 한편 周나라가 멸망된 것은 《史記》와 《資治通鑑》 등에 모두 B.C.255년으로 되어 있다.
역주2 蔡澤 : 燕나라 출신으로 秦나라에 들어와 范雎의 뒤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昭王‧孝文王‧莊襄王‧始皇을 섬겼다. 본장의 내용과 《史記》 〈范雎蔡澤列傳〉 및 108장 참조.
역주3 釜鬲 : 모두 취사 솥의 일종인데, 釜는 다리가 없고 鬲은 세 개의 발이 달렸다.
역주4 鄭安平 : 范雎가 추천하였던 인물인데 趙나라에 투항하였다. 091장 참조.
역주5 王稽 : 范雎가 추천하였던 인물. 082‧091장 참조. 趙나라에게 항복하였다.
역주6 讓之 : 여기서의 讓은 嚷으로 보아 “큰 소리로 꾸짖다.”의 뜻.
역주7 商君 : 商鞅. 衛鞅, 公孫鞅, 商君이라고도 부른다. 본래 衛나라 사람인데 秦 孝公 때 秦나라에 들어와 개혁정책을 성공시킨 인물. 徙木之信의 고사를 남겼다. 《史記》 〈商君列傳〉 및 046장, 《商君書》 등 참조.
역주8 吳起 : 衛나라 출신의 兵法家. 楚 悼王을 섬겨 재상이 되었다. 뒤에 悼王이 죽자 귀족들에게 미움을 받아 죽은 다음 그 시신을 분해하였다고 한다. 《史記》 〈孫子吳子列傳〉 참조.
역주9 大夫 種 : 越나라의 賢臣이며 대부의 직위를 지냈던 文種을 가리킴. 范蠡와 함께 越王 勾踐을 도와 끝내 吳나라를 멸망시켰다.(B.C.473) 《史記》 〈越王勾踐世家〉 참조.
역주10 虜魏公子卬 : 商鞅이 魏나라에서 벼슬할 때 魏나라의 公子 卬과 교분이 있었는데 秦나라로 들어간 후,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를 칠 때, 속임수를 써서 公子 卬을 사로잡았다.
역주11 원주] 固 : 曾鞏本에는 顧로 되어 있다.
역주12 越王 : 勾踐을 말한다. 春秋 말기 吳越抗爭時 많은 고사를 남겼다. 그의 상대는 吳王 夫差였으며 부차의 大臣 伍子胥‧伯嚭와 자신의 대신 文種‧范蠡 등이 대립하여 많은 고사를 남기고 있다. 《史記》 〈吳太伯世家〉 및 〈越王勾踐世家〉와 본 《戰國策》 101‧103‧297‧254‧500장 등 참조.
역주13 比干 : 殷나라 마지막 임금 紂의 숙부. 여러 번 諫言을 하다가 끝내 죽음을 당하였다.
역주14 申生 : 春秋時代 晉 獻公의 태자. 獻公이 驪姬에 빠져 참언을 입게 되자 자살하였다.
역주15 晉惑亂 : 《史記》에는 惑이 國으로 되어 있다. 獻公이 죽은 후 申生의 아우인 重耳가 망명 끝에 돌아와 왕이 되니, 이가 춘추오패 중의 晉 文公이다.
역주16 微子 : 殷 紂王의 庶兄. 이름은 啓. 紂王에게 간언하였으나 듣지 않자 殷나라를 떠났다.
역주17 閎夭 : 周 文王을 섬겼던 인물.
역주18 周公輔成王 : 文王의 아들인 周公 旦이 자신의 형(武王)이 죽고, 그 아들 成王(誦)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자 이를 보필하였다. 《史記》 〈周本紀〉 참조.
역주19 齊 桓公 : 춘추오패 중의 첫째인 齊나라 桓公. 당시 제후를 모아 會盟하였다. 《史記》 〈齊太公世家〉‧〈管子晏子列傳〉 참조.
역주20 葵丘 : 地名. 齊 桓公이 제후를 모아 회맹하였던 곳. 당시 宋나라 땅. 지금의 河南省 考城縣.
역주21 夫差 : 吳나라 왕. 越王 勾踐과 싸워 이겼으나 뒤에 다시 패하여 나라를 잃었다.(B.C.473) 《史記》 〈吳太伯世家〉 참조.
역주22 夏育 : 孟賁과 함께 힘센 장사로 1천 鈞의 무게를 들었다고 한다.
역주23 太史啓 : 《史記》 〈范雎蔡澤列傳〉에는 太史噭로 되어 있다. 고대의 용사. 자세한 事跡은 알 수 없다.
역주24 燒夷陵 : 夷陵은 楚나라의 陵墓 이름. 지금의 胡北省 宜昌縣 동쪽. 楚 頃襄王 21년에 秦將 白起가 초나라를 침공하여 先代의 능인 이릉을 불태웠다.
역주25 馬服 : 馬服子. 趙나라 장군 趙奢의 아들 趙括. 《史記》 〈廉頗藺相如列傳〉 및 089장 참조.
역주26 杜郵 : 地名. 秦邑. 지금의 陝西省 咸陽縣 동쪽.
역주27 楊越 : 즉 揚越. 揚州는 고대 九州의 하나. 越은 중국 남쪽 지역.
역주28 支解 : 吳起가 楚나라 귀족의 亂에 죽자 분을 못 이긴 楚나라 사람들이 그 시신의 四肢를 찢었다 한다. 支는 肢와 같다.
역주29 范蠡 : 越王 勾踐을 도와 吳를 물리친 후, 즉시 文種에게 공을 이루었으니 물러나겠다는 뜻을 편지로 전하고 越나라를 떠나 陶 땅에 이르러 장사로 큰 부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陶朱公이라 불렀다. 《史記》 〈越王勾踐世家〉 참조.
역주30 羊腸 : 羊腸坂, 요새 이름으로 太行山에 있으며 길이 매우 험하여 붙여진 이름.
역주31 范‧中行之途 : 范氏와 中行氏는 춘추시대 晉나라 대부들로 둘 다 魏氏‧趙氏‧韓氏‧智氏와 같이 晉나라 분할 작전에 휘말렸다가 망하였다. 여기서는 三晉의 范氏‧中行氏의 땅이었던 곳을 말한다.
역주32 伯夷 : 周나라가 들어설 때 孤竹國의 왕자. 동생 叔齊와 함께 周나라에 들어왔다가 武王이 桀을 치자 의롭지 못하다고 諫하다가 首陽山에 은거하였다. 《史記》 〈伯夷列傳〉 참조.
역주33 喬‧松 : 고대의 신선 이름. 喬는 周 靈王의 태자로 浮丘公을 만나자 嵩山에 올랐다가 같이 신선이 되었다고 하는데, 흔히 王子喬로 불린다. 松은 고대의 神仙인 赤松子를 가리킨다. 《神仙傳》, 《高士傳》 등에 이들의 일화가 실려 있다.
역주34 山東 : 崤山의 동쪽. 즉 燕나라 출신임을 말한다.
역주35 客卿 : 秦나라 官制로 외국에서 온 사람에게 주는 벼슬.
역주36 東收周室 : 秦 昭王 52년에 周나라의 九鼎이 秦나라로 옮겨짐으로써 西周는 멸망하였다.
역주37 剛成君 : 蔡澤이 昭王으로부터 받은 封號. 《史記》에는 綱成君으로 되어 있다.
역주38 莊襄王 : 趙나라 邯鄲에 인질로 와 있던 秦의 왕자인 子楚. 呂不韋에 의해 秦으로 돌아가 왕이 되었다. 呂不韋는 이미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를 그의 왕후로 삼아 주었는데, 그 여자가 낳은 아들이 곧 秦 始皇이다. 107장 및 《史記》 〈秦始皇本紀〉 참조.
역주39 太子 丹 : 燕나라의 마지막 태자. 秦 始皇을 상대로 자객 荊軻를 보냈다가 실패하였다. 《史記》 〈燕召公世家〉‧〈刺客列傳〉 및 《戰國策》 475장 참조.

전국책(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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