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西周는 하남河南‧곡성穀城‧평음平陰‧언사偃師‧공鞏‧구지緱氏 등 아주 좁은 천개의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으며, 환공桓公‧위공威公‧혜공惠公‧무공武公‧문공文公으로 이어져 명맥을 유지하였다. 난왕赧王이 죽은 이듬해를 동주군東周君의 원년으로 삼고, 다시 2년 후에 진秦나라는 서주군西周君을 탄호취憚狐聚(탄호취,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임여현臨汝縣)로 옮겨 가게 하여 멸망시키고 말았다. 또 동주군東周君은 7년 만에 다시 진秦나라에 의해 강제로 양인취陽人聚(지금의 임여현臨汝縣 서쪽)로 쫓겨나 주실周室은 완전히 명맥이 끊기고 만다.(B.C.255)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서는 《대사기大事記》를 들어 “주정왕周貞王 28년, 고왕考王이 들어서서 그 아들 게揭를 하남河南 환공桓公으로 세웠다. 하남河南은 곧 겹욕郟鄏을 가리킨다. ……平王이 낙양洛陽(成周)으로 동천東遷한 후의 서주西周란 원래 풍호豐鎬이며, 동주東周는 동도東都(成周, 낙양洛陽)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위열왕威烈王 이후의 서주西周란 하남河南을 가리키며, 동주東周는 낙양洛陽을 가리킨다. 어찌하여 하남河南을 서주西周라 일컫는가? 낙양洛陽에서 하남河南 왕성王城은 서쪽이었기 때문이다. 낙양洛陽을 동주東周라 부르는 이유도 역시 이와 같다. ……河南 환공桓公이 죽고 아들 위공威公, 그리고 이어서 혜공惠公이 들어섰으며, 혜공惠公은 다시 그 아들 반班을 공鞏 땅에 봉하고 이를 동주東周라 불렀다. 이 당시 동주東周, 서주西周는 비록 분치分治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혜공惠公은 스스로를 서주西周라 부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유高誘의 주註에는 “서주西周 왕성王城은 지금의 하남河南이며 동주東周 성주成周는 지금의 낙양洛陽이다.”라 하였다. 그리고 《세본世本》에는 “서주西周 환공桓公은 이름이 게揭이며 하남河南에 거居하였고, 동주東周 혜공惠公은 이름이 반班으로 낙양洛陽에 거하였다.”라고 하였다. 포표鮑彪는 이를 잘못 알고 서주西周가 정식正式 왕통王統인 것으로 착각하여 《전국책戰國策》에서 〈서주책西周策〉을 맨 앞으로 놓아 제멋대로 차례를 바꾸는 오류를 범하였던 것이다.
한편 포표鮑彪는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를 들어 서주西周의 관할 지역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하남河南‧낙양洛陽‧곡성穀城‧평음平陰‧언사偃師‧공鞏‧구지緱氏 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