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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國策(1)

전국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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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책(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爲一, 將以攻秦.
秦王召羣臣賓客六十人而問焉, 曰:
“四國爲一, 將以圖秦,
寡人於內, 而百姓靡於外, 爲之奈何?”
羣臣莫對. 對曰:
“賈願出使四國, 必絶其謀, 而安其兵.”
乃資車百乘, 金千斤, 衣以其衣冠, 以其劍.
姚賈辭行, 絶其謀, 止其兵, 與之爲交以報秦.
秦王大悅. 賈封千戶, 以爲.
“賈以珍珠重寶, 南使荊‧吳, 北使燕‧代之間三年, 四國之交未必合也, 而珍珠重寶盡於內.
是賈以王之權, 國之寶, 外自交於諸侯, 願王察之.
且梁監門子, 嘗盜於梁, 臣於趙而逐.
取世監門子, 梁之大盜, 趙之逐臣, 與同知社稷之計, 非所以厲羣臣也.”
王召姚賈而問曰:
“吾聞子以寡人財交於諸侯, 有諸?”
對曰:
“有.”
王曰:
“有何面目復見寡人?”
對曰:
孝其親, 天下願以爲子; 忠於君, 天下願以爲臣; 貞女工巧, 天下願以爲妃.
今賈忠王而王不知也.
賈不歸四國, 尙焉之?
使賈不忠於君, 四國之王尙焉用賈之身?
桀聽讒而誅其良將, 紂聞讒而殺其忠臣,
至身死國亡.
今王聽讒, 則無忠臣矣.”
王曰:
“子監門子, 梁之大盜, 趙之逐臣.”
姚賈曰:
, 之逐夫, 之廢屠, 之逐臣, ,
文王用之而王.
, 其也, , 魯之, 桓公用之而伯.
, 之乞人, 傳賣以五羊之皮, 相之而朝.
此四士者, 皆有詬醜, 大誹天下, 明主用之, 知其可與立功.
使若, 人主豈得其用哉!
故明主不取其汙, 不聽其非, 察其爲己用.
故可以存社稷者, 雖有外誹者不聽; 雖有高世之名, 無咫尺之功者不賞.
是以羣臣莫敢以虛願望於上.”
秦王曰:
“然.”
復使姚賈而.


사국四國이 하나가 되다
사국四國(燕‧)이 하나가 되어 장차 나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진왕秦王은 서둘러 군신羣臣빈객賓客 등 60여 명을 불러 놓고 물었다.
“네 나라가 하나가 되어 우리 진나라를 도모하려 하고 있소.
과인은 안으로는 재정財政이 궁핍하고 밖으로는 백성들의 힘이 소모되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군신群臣들이 누구 하나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데, 요가姚賈가 대답하였다.
“제가 원컨대 그 네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반드시 그 모책을 끊고, 군사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이에 왕은 곧 수레 1백 과 황금 1천 을 주고 자신의 의관衣冠을 하게 하고 자신의 칼을 차고 가도록 하였다.
요가가 하직하고 떠나서는 과연 네 나라의 모의를 끊고 군대의 출동을 중지시켰을 뿐 아니라, 그 네 나라와 교류를 맺었다고 진나라에 보고하였다.
진왕은 크게 기뻐하여 요가에게 1천 를 봉하고 상경上卿으로 삼았다.
한비韓非가 이런 사실을 알고 험담을 하였다.
“요가는 진주珍珠중보重寶를 다 풀어 남으로 (楚)‧, 북으로 (趙)에 사신으로 돌아다니며 3년 동안 애썼지만 그 네 나라와의 국교가 반드시 융합融合된 것도 아니며 오히려 안으로 나라의 진주와 중보를 다 탕진하였을 뿐입니다.
이는 요가가 대왕의 권한과 나라의 보물을 써서 밖으로 사사로이 제후들과 교분을 맺은 것이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잘 살피소서.
더구나 그는 (梁)나라 문지기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양나라에서 도둑질을 한 죄도 있고, 또 나라의 신하로 있을 때는 내쳐지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대대로 문지기 집안의 아들이며 양나라의 큰 도둑이요, 조나라에서 쫓겨난 신하와 국가의 계책을 상의하시니, 이는 여러 신하들을 격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은 요가를 불러 물었다.
“내 듣자 하니 그대는 과인의 재물을 가지고 사사로이 제후들을 사귀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이 있소?”
요가가 대답하였다.
“있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그럼 무슨 면목으로 다시 나를 만났소?”
요가가 대답하였다.
증삼曾參이 그 어버이에게 효성을 지극히 하자 천하의 부모들이 모두 그를 아들로 삼고 싶어하였고, 오자서伍子胥가 임금에게 충성을 지극히 하자 천하의 임금들이 모두 그런 자를 신하로 두고 싶어하였으며, 또 정숙하고 솜씨가 뛰어난 여자는 천하의 장부들이 그런 여자를 아내로 삼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대왕께 충성을 다하고 있건만 대왕께서는 이를 모르고 계십니다.
제가 그 네 나라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제가 대왕께 불충하였다면 그 네 나라의 인들 어찌 저를 써 주었겠습니까?
은 참언을 듣고 자신의 뛰어난 장군을 죽였고, 는 참언을 듣고 그 충신을 죽였습니다.
그리하여 몸을 망치고 나라를 망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지금 왕께서도 참언을 곧이들으시면 충신이 없게 됩니다.”
왕이 말하였다.
“그대는 문지기의 아들이며, 양나라에서 도둑질을 한 적이 있고, 조나라에서는 신하로 있다가 쫓겨났다고 한다.”
요가가 말하였다.
태공망太公望나라에서 아내에게 쫓겨난 필부匹夫조가朝歌의 쓸모없는 백정이었으며, 자량子良의 쫓겨난 신하로서 극진棘津에서는 품팔이를 하였지만 누구 하나 고용해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문왕文王이 그를 등용하여 왕자王者가 되었습니다.
관중管仲 땅의 장사꾼으로 남양南陽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고, 나라에서 사형을 면하였으나 환공桓公이 등용하여 패자霸者가 되었습니다.
백리해百里奚나라의 걸인乞人으로서 다섯 마리 검은 염소가죽 값에 팔려 가게 된 것을 목공穆公이 이를 알아보고 재상으로 삼아 서융西戎의 조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문공文公중산中山 도적의 힘을 빌어 성복城濮싸움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이 네 명의 선비는 모두 비천한 출신으로 천하의 놀림거리였으나 밝은 임금이 이들을 등용하였으니 함께 공을 세울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제가 변수卞隨무광務光, 신도적申屠狄처럼 숨어 살았다면 임금께서 저를 어찌 등용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현명한 군주란 신하의 출신 미천微賤 여부를 따지지 않으며, 옛날의 잘못을 따지지 않고 자기를 위해 쓸 만한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직社稷을 보존하려는 자는 비록 외부에서 비방하더라도 듣지 않으며, 비록 세상에 고매한 명성이 있는 인물일지라도 한 치의 이 없으면 상을 내리지 않는 법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군신들이 임금에 대해 허황된 희망을 감히 가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진왕秦王이 말하였다.
“그렇겠다.”
그리고는 이에 요가姚賈의 지위를 회복시키도록 하고, 한비韓非는 죽여 버렸다.


역주
역주1 110. 四國爲一 : 嫪毐 사건(B.C.238) 이후 呂不韋가 이에 연루되어 파직되고(B.C.237), 秦王 政(秦 始皇)의 親政 체제로 들어간다. 이에 四國은 秦의 허술한 틈을 이용하여, 동맹을 맺었으며 이를 해결하면서 姚賈가 공을 세우고 귀국할 때 마침 韓非가 韓나라의 사신으로 秦나라에 들어온다.(B.C.233) 韓非는 이에 韓나라 및 다른 제후들을 위해 姚賈를 축출하려다가 도리어 자신의 죽음을 부른 사건이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는 韓非가 李斯의 참소를 입어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역주2 원주] 四國 : 燕‧趙‧吳‧楚 네 나라이다. 《史記》에는 이 문장이 없다.
역주3 : 재정이 궁핍함.
역주4 姚賈 : 魏나라 大梁의 守門人의 아들로 秦 始皇에게 봉사한 인물. 283‧364장 참조.
역주5 원주] 舞(帶) : 劉敞本에는 帶로 되어 있어 이를 따랐다.
역주6 上卿 : 卿은 天子나라와 諸侯나라 모두에 두었던 관직명. 상‧중‧하 세 등급이 있었다.
역주7 韓非 : 원래 韓나라 公子 중의 하나. 秦나라에서 유세하였다. 《韓非子》는 그의 저술로 法家思想의 총결산이다. 《史記》 〈老莊申韓列傳〉 참조. 鮑彪의 註에 “韓나라의 여러 公子 중 한 사람이다. 秦王이 그의 글을 보고는 만나 보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했다. 韓나라를 공격하자 한나라가 그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니, 秦王이 기뻐하였다.”라고 하였다.
역주8 원주] 知之 : 어떤 本에는 知가 短으로 되어 있다.
역주9 曾參 : 孝誠으로 널리 알려진 공자의 제자 曾子. 曾參殺人의 고사를 남겼다. 064장 참조.
역주10 子胥 : 楚나라 출신으로 춘추 말기 吳王 夫差의 충신으로 太宰 嚭의 참소를 받아 부차가 내려준 劍으로 자살하였다. 《史記》 〈伍子胥列傳〉 및 057장 참조.
역주11 太公望 : 姜太公 呂尙. 원주에 “太公이 老婦에게 쫓겨났다.”라고 하였다.
역주12 : 뒤에 呂尙이 齊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史記》 〈齊太公世家〉 참조.
역주13 朝歌 : 殷나라의 도시. 지금의 河北省 淇縣의 북쪽. 원주에 “太公이 朝歌에서 고기를 팔 때 고기에서 냄새가 나도록 팔리지 않았다. 그래서 廢屠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14 子良 : 未詳.
역주15 棘津之讎不庸 : 棘津은 姜太公 呂尙의 출생지. 《史記》에는 동해 가[東海之濱] 출신이라 하였다. 원주에 “棘津에서 낚시를 할 때에 고기가 미끼를 물지 않았으며 머슴으로 팔리고자 하여도 스스로 팔리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원문 棘津之讎不庸에서의 讎는 售와 같다.
역주16 管仲 : 춘추시대 齊 桓公을 도와 齊나라를 霸者로 만든 인물. 《史記》 〈管晏列傳〉 참조.
역주17 鄙人之賈人 : 鄙人을 高誘는 지명으로 보았으나 人을 衍文으로 보는 설도 있다. 鄙는 변두리.
역주18 南陽之弊幽 : 남양은 지금의 山東省 鄒縣. 처음 魯나라 땅이었으나 뒤에 齊나라 영토가 되었다. 弊幽는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은거함을 뜻한다.
역주19 免囚 : 赦免 받은 죄수. 管仲이 섬기던 公子 糾가 동생 小白(齊 桓公)과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다가 죽을 때 따라 죽지 않고 魯나라에게 묶인 채 齊나라로 돌아와 鮑叔의 추천으로 목숨을 건지고 환공의 신하가 되었기 때문에 한 말.
역주20 百里奚 : 춘추시대 虞나라의 大夫. 五羔(羖)大夫. 虞나라가 晉나라에게 망하자 포로가 되었다가 晉나라 공주가 秦 穆公에게 시집갈 때 몸종으로 따라갔다. 이에 부끄러움을 느낀 百里奚는 楚나라로 도망했는데, 뒤에 秦 穆公이 그를 어질게 보고 羊皮 다섯 장 값으로 사 재상을 삼아 五羔大夫라 불렸다.
역주21 : 春秋時代 國名. 지금의 山西省 平陸에 있던 작은 나라.
역주22 秦 穆公 : 春秋五霸 중의 하나.(재위 B.C.659~B.C.621)
역주23 西戎 : 중국 서북부의 이민족.
역주24 文公用中山盜 : 文公은 晉 文公으로 이름은 重耳. 春秋五霸 중의 하나.(재위 B.C.636~B.C.628) 中山은 춘추시대 나라 이름인데 그 盜賊을 이용했다 함은 未詳.
역주25 城濮 : 魏나라 읍으로(지금 山東省 濮縣 남쪽) 晉 文公이 楚 成王을 크게 패배시킨 곳.(B.C.632) 이 곳 싸움은 춘추시대 가장 치열했던 전쟁으로 알려지고 있다.
역주26 卞隨‧務光‧申屠狄 : 湯과 紂 때의 處士들. 《說苑》‧《新序》‧《韓詩外傳》 등에 이들의 기록이 자세히 실려 있다. 卞隨는 《莊子》 〈讓王〉에 나오는 인물로 湯임금이 천하를 양위하려 했으나 받지 않았다. 務光은 《莊子》 〈讓王〉에는 暓光으로 표기되어 있다. 卞隨가 왕위를 받지 않자 탕임금이 무광에게 양위하려 하니, 무광은 非義, 非仁, 非廉한 일이라며 돌을 지고 물에 빠져 죽었다. 申屠狄은 《莊子》 〈外物〉에 나오는 사람으로 殷나라 때 인물.
역주27 원주] 乃可 : 劉敞本에는 可자가 없다.
역주28 誅韓非 : 《史記》에는 韓非子가 李斯와 姚賈의 참소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李斯와 韓非는 모두 荀子의 제자였으나 李斯는 韓非의 능력을 질투하여 결국 그를 참살하도록 일을 꾸며 죽이고 말았다.

전국책(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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