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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國策(1)

전국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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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책(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或爲六國說曰:
“土廣不足以爲安, 人衆不足以爲强.
若土廣者安, 人衆者强, 則之後將存.
昔者, 趙氏亦嘗强矣.
曰趙强何若? 擧左, 擧右案魏,
厭案萬乘之國二, 千乘之也.
, , 芻牧薪采莫敢闚東門.
當是時, 衛危於累卵,
天下之士相從謀曰:吾將還其委質, 而朝於邯鄲之君乎!
於是天下有稱伐邯鄲者, 莫不令朝行.
, 稱夏王, 朝爲天子, 天下皆從.
聞之, 擧兵伐魏, 壤地兩分, 國家大危.
身抱質執璧, 請爲臣, 天下乃釋梁.
威王聞之, 寢不寐, 食不飽, 帥天下百姓, 以與遇於泗水之上, 而大敗申縛.
趙人聞之至, 燕人聞之至.
格道不通, 絶.
齊戰不勝, 謀則不得, 使釋劍掫, ,
西說趙, 北說燕, 內喩其百姓, 而天下乃.
於是夫積薄而爲厚, 聚少而爲多,
以同言郢威王於側之間.
臣豈以郢威王爲政衰謀亂以至於此哉?
郢爲强, 臨天下諸侯, 故天下樂伐之也!”


어떤 이가 육국六國을 위해 진왕秦王에게 말하다
어떤 사람이 육국六國을 위해 진왕秦王(始皇)에게 유세하였다.
“땅이 넓다고 안전하게 여기기에는 부족하며, 인구가 많다고 강하게 여기기에도 부족합니다.
만약 땅이 넓으면 안전하고 사람이 많으면 곧 강한 것이라면, 의 후손들이 지금까지 왕 노릇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옛날 나라도 아주 강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조나라가 얼마나 강했느냐 하면 왼쪽으로는 나라를 억제하고 오른쪽으로는 나라를 억제하였습니다.
이렇게 두 만승지국萬乘之國과 한 천승지국千乘之國나라까지 눌렀습니다.
게다가 나라가 강평剛平을 점거하여 거기에 을 쌓자 나라는 동쪽의 들판이 없어져 나무나 목초를 하면서 감히 자신들의 동문東門을 엿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나라는 정말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하였었습니다.
이에 천하의 모사謨士들이 서로 모여서 의논하기를 ‘우리들이 이제 선물을 가지고 저 조나라 한단邯鄲의 임금에게 조회朝會하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당시 천하에서 나라 한단邯鄲을 쳐야 한다고 일컬었던 자들 중에서 누구 하나 조나라의 명령을 들으러 가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나라가 나라 한단邯鄲을 정벌하고 물러와서 봉택逢澤에서 제후들과 회맹會盟하였습니다.
이때 나라 왕이 하거夏車를 타고 하왕夏王이라 칭하며 천자天子를 조회하러 가자 천하가 모두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자 위왕威王이 이를 듣고 군대를 일으켜 나라를 쳐서 국토를 반으로 나누어 국가가 크게 위태로웠습니다.
이에 양왕梁王(魏惠王)은 몸소 예물禮物을 가지고 진후陳侯(齊王)의 신하가 되겠다고 빌고 나서야 천하가 (魏)나라를 풀어 주었습니다.
위왕威王이 이 소식을 들은 후, 침식寢食을 제대로 못하다가 마침내 천하의 백성을 이끌고 나라 신박申縛과 맞붙어 사수泗水 가에서 신박申縛의 군대를 대패시켰습니다.
그러자 나라가 이를 듣고 군대를 지상枝桑으로 보냈고, 나라 역시 군대를 격도格道로 진격시켰습니다.
격도가 통하지 않자 평제平際 역시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제나라가 싸움에서 패하여 이기지 못하고 계획도 성공하지 못하자 진모陳毛로 하여금 칼을 풀고 남면南面하는 존엄을 버리고 초나라에 용서를 빌도록 하였습니다.
서쪽으로는 조나라를 달래고 북쪽으로 연나라를 설득한 다음, 국내에서 백성을 위무慰撫하자 천하가 그제야 나라를 풀어 주었습니다.
무릇 얇은 것도 쌓이면 두터워지고, 적은 것도 모이면 많아지는 법입니다.
지금 천하가 창가에 모여 앉으면 똑같이 위왕威王공벌攻伐해야 한다는 상의를 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는 어찌 초나라 위왕威王의 정사가 부패해서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라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초나라가 강대해져서 온 천하 제후에게 군림할까 두려워, 다른 제후들이 즐겨 초나라를 치자고 하는 것입니다.”


역주
역주1 102. 或爲六國說秦王 : 이 장의 내용에 대해 B.C.220년쯤에 秦 始皇에게 한 말이라는 주장과, 그보다 훨씬 전인 B.C.333년 秦 惠王에게 한 말일 것이라는 등의 설이 있다.
역주2 원주] 秦王 : 秦 始皇으로 이때 이미 始皇帝가 되어 있었다.
역주3 桀‧紂 : 桀은 夏나라의 마지막 임금, 紂는 殷나라의 마지막 임금으로 모두 폭군으로 알려진 인물.
역주4 案齊 : 案은 抑止의 뜻. 趙나라 敬侯 2년에 齊나라를 敗退시킨 일을 말한다.
역주5 國(由) : 國은 由의 誤字로 보인다. 由는 猶와 통함.
역주6 : 周初 殷의 후예로 남았던 나라. 서울은 商丘. 戰國時代에 이르러 B.C.286년 齊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역주7 剛平 : 衛나라 땅. 지금의 하남성 淸豊縣에 있었는데, 趙 敬侯 4년에 이곳에 성을 쌓아 邑을 만들었다.
역주8 衛無東野 : 당시 衛나라의 도읍은 지금의 하남성 濮陽인 帝丘였고, 趙나라에게 빼앗긴 剛平이 제구 동쪽 변두리이기 때문에 한 말임.
역주9 魏伐邯鄲 : 魏 惠王 17년에 趙나라 수도 邯鄲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趙나라가 剛平에 城을 쌓은 것과 위나라가 한단을 공격한 것은 20년이나 동떨어지니, 착오가 있는 듯하다.
역주10 逢澤之遇 : 봉택은 지금의 河南省 開封縣 남쪽. 魏 惠王 27년 이곳에서 諸侯들이 會合하였다.
역주11 夏車 : 夏는 일반적으로 中國이나 中原을 지칭하는 말이므로 중국의 수레를 뜻하며 夏王은 中國王이란 의미.
역주12 齊 太公 : 田氏 齊의 첫 임금인 田和, 즉 齊 莊公의 아들. 그러나 이 또한 시기적으로 맞지 않으므로 齊 威王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역주13 梁王 : 魏 惠王. 魏나라의 수도가 大梁이어서 魏나라를 흔히 梁으로 불렀다.
역주14 陳侯 : 齊 威王을 가리킨다. 戰國時代의 齊나라는 陳氏가 呂氏를 찬탈하여 田氏로 바꾼 것이다. 초기에는 이를 王이라 칭하지 아니하고 侯로 불렀다.
역주15 : 楚 威王. 楚나라의 도읍이 郢이었기 때문에 일컬은 말이다. 초 위왕 7년에 齊나라를 공격해 패배시켰다.
역주16 申縛 : 齊나라 장수. 申縳으로도 쓴다. 111장 참조.
역주17 枝桑 : 地名. 어디인지 자세하지 않다.
역주18 格道 : 地名. 어디인지 자세하지 않다.
역주19 平際 : 地名. 平陸의 잘못이 아닌가 싶다. 平陸은 제나라 邑으로 지금의 산동성 汶上縣.
역주20 : 王念孫은 則의 誤字라 하였다.
역주21 陳毛 : 齊나라 사람. 姓으로 보아 齊나라 田氏의 公族으로 여겨진다.
역주22 委南聽罪 : 임금의 존엄을 버리고 죄 주기를 청함. 南은 南面.
역주23 齊釋(釋齊) : 齊釋은 釋齊의 誤.
역주24 紂(牖) : 高誘는 紂를 牖로 보아 “사람들이 창가에 모여서 이를 화제로 삼다.”의 뜻으로 풀었으므로 이를 따라 번역하였다.

전국책(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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