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전욱顓頊의 후예이다. 백예柏翳 때 순舜으로부터 영嬴이라는 성姓을 얻었으나 주대周代에는 완전히 야만족 취급을 받아오다가, 그 후 비렴蜚廉‧여방女防을 거쳐 비자非子에 이르렀을 때 주실周室의 효왕孝王이 그에게 말을 길러 바치도록 하였다. 비자非子가 견위汧渭(지금의 섬서성陝西省 농현隴縣 및 미현郿縣) 근처에서 말을 길러 크게 번식시키자 주왕은 이를 보고 그에게 땅을 부용附庸으로 주고, 진秦을 읍으로 삼아 준다. 그로부터 차차 진秦은 강해지고 장공莊公을 거쳐 양공襄公에 이르렀을 때 마침 주실에서는 포사褒姒의 일로 유왕幽王이 견융犬戎의 침입을 받아 죽게 된다. 이때 양공은 이를 막아 주고 주실을 일으켜 준 공로를 인정받아 드디어 백작伯爵이 되고 기산岐山 서쪽을 얻게 된다. 그 후 도읍도 덕공德公 때 옹雍(陝西省 봉상현鳳翔縣), 헌공獻公 때 역양櫟陽(陝西省 임동현臨潼縣)을 거쳐, 드디어 효공孝公 때 함양咸陽으로 옮겨 완전 국가 체제를 갖추고 열강제후列强諸侯의 반열에 올라 춘추의 각축전에 참여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문공文公‧영공寧公‧출공出公‧무공武公‧덕공德公‧성공成公을 거쳐 목공繆公(穆公)에 이르렀을 때 백리해百里奚를 등용, 춘추오패春秋五霸 중에 최후를 장식한다. 춘추시대에서 전국으로 전환되는 와중에서도 지리적 조건, 즉 함곡관函谷關 및 효산崤山 때문에 중원中原 세력 변동에 영향을 덜 받은 데다가 경제적 풍요로 오히려 정세를 역이용하여 상앙商鞅‧장의張儀‧범저范雎‧이사李斯‧여불위呂不韋 같은 인물을 적극 등용, 완전 법치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후, 끝내 중국을 통일하게 된다. 한편 그 세력 범위에 대해서 포표鮑彪의 주註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진秦의 영토는 소진蘇秦‧장의張儀의 말에 따르면 밖으로는 홍농弘農의 고관故關 서쪽으로부터 경조京兆, 부풍扶風, 풍익馮翊, 북지北地, 상군上郡, 서하西河, 안정安定, 천수天水, 농서隴西 모두였으며 남으로는 파巴‧촉蜀과 광한廣漢, 건위犍爲, 무도武都이며 서쪽으로는 금성金城, 무위武威, 장액張掖, 주천酒泉, 돈황燉煌이며 다시 서남으로는 장가牂牁, 성휴城雟, 익주益州가 모두 진나라의 영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