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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國策(1)

전국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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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攻齊,
齊威王使將而應之.
與秦交和而舍,
使者數相往來, , 以雜秦軍.
候者言章子以齊入秦,
威王不應.
頃之間, 候者復言章子以齊兵降秦, 威王不應.
而此者三. 有司請曰:
“言章子之敗者, 異人而同辭.
王何不發將而擊之?”
王曰:
“此不叛寡人明矣, 曷爲擊之!”
頃間, 言齊兵大勝, 秦軍大敗,
於是秦王拜而謝於齊.
左右曰:
“何以知之?”
曰:
“章子之母啓得罪其父, 其父殺之而埋馬棧之下.
吾使者章子將也, 勉之曰:夫子之强, 全兵而還, 必更葬將軍之母. 對曰:臣非不能更葬先妾也.
臣之母啓得罪臣之父. 臣之父未敎而死.
夫不得父之敎而更葬母, 是欺死父也.
故不敢.
夫爲人子而不欺死父, 豈爲人臣欺生君哉?”


나라가 나라의 길을 빌려 나라를 공격하다
나라가 나라와 나라의 길을 빌어 나라를 공격해 왔다.
위왕威王장자章子(匡章)를 장군으로 삼아 응전應戰하게 하였다.
광장은 나라 군사와 대치對峙하여 군사를 주둔하였다.
양쪽의 사자使者가 자주 왕래하고 있을 때, 장자章子는 자기 편의 군기軍旗를 진나라 군대처럼 바꾸고 몰래 진나라 군대와 뒤섞이게 하였다.
이때 정탐하던 사람이 장자章子나라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에 투항하려 한다고 알려왔다.
제 위왕은 그 말에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정탐꾼이 또 광장이 제나라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에 투항하였다고 말했으나 위왕은 반응이 없었다.
똑같은 보고가 세 번이나 들어오자 유사有司가 청하였다.
장자章子가 패하였다는 소식은, 그 보고자는 다르나 말은 모두 같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어찌 군대를 풀어 그를 토벌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장자章子가 과인을 배반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있는데, 어찌 그를 친단 말이오!”
잠시 후, 나라 군사가 대승大勝을 거두고 진나라 군사가 대패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에 진왕秦王은 고개를 숙이고 서번지신西藩之臣이라 칭하며 제나라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좌우 신하가 임금에게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왕이 말하였다.
장자章子의 어머니 가 장자의 아비에게 죄를 짓자, 그 아비가 죽여서, 마구간 밑에 매장하였다.
내가 장자를 장군으로 삼아 보내면서 면려하기를 ‘선생의 함으로써 군대를 온전히 하여 돌아오면 장군 어머니의 시신을 다시 장례葬禮하게 하겠소’라고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제가 어머니의 시신을 다시 장례할 줄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제 어머니 가 저의 부친께 죄를 얻은 후, 저의 부친께서 어떻게 하라는 유언遺言 없이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의 유언이 없는데도 어머니를 개장改葬하는 것은 이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속이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감히 옮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사람의 아들로 돌아가신 아버지도 속이지 않는 자가 어찌 신하가 되어 살아 있는 임금을 속이겠는가?”


역주
역주1 123. 秦假道韓魏以攻齊 : 이 장의 이야기에 나오는 秦王을 高誘 註에는 武王이라 하였으나 齊 威王 23년(B.C.334)에 秦 惠王과의 사이에 벌어졌던 일이다.
역주2 假道韓‧魏 : 齊나라와 秦나라 사이의 땅이 韓‧魏이므로 길을 빌렸다고 표현한 것이다. 원주에 “秦나라로부터 齊나라에 가려면 길이 韓‧魏를 거쳐야 한다. 그 때문에 이를 빌렸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3 章子 : 齊나라 사람 匡章. 166‧450장 참조. 《孟子》 〈離婁 下〉에 관련된 내용이 있다.
역주4 章子爲變其徽章 : 깃발. 匡章이 깃발을 바꾸어 진나라로 하여금 我軍으로 알게 하고자 한 것이다.
역주5 西藩之臣 : 秦나라가 서쪽에 있어 서쪽 藩邦의 신하라 낮추어 말한 것이다.

전국책(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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