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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國策(2)

전국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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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책(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秦攻趙, 爲謂秦王曰:
“臣聞明王之於其民也, 博論而技藝之, 是故官無乏事而力不困;
於其言也, 多聽而時用之, 是故事無敗業而惡不章.
臣願王察臣之所謁, 而效之於一時之用也.
臣聞懷重寶者, 不以夜行; 任大功者, 不以輕敵.
是以賢者任重而行恭, 知者功大而辭順.
故民不惡其尊, 而世不妬其業.
臣聞之: 百倍之國者, 民不樂後也; 功業高世者, 人主不再行也;
力盡之民, 仁者不用也;
求得而反靜, 之制也; 功大而息民, 用兵之道也.
今用兵終身不休, 力盡不罷,
必於其己邑, 趙僅存哉!
然而四輪之國也,
今雖得邯鄲, 非國之長利也.
意者, 地廣而不耕, 民羸而不休, 又嚴之以刑罰, 則雖從而不止矣.
語曰: ‘戰勝而國危者, 物不斷也. 功大而權輕者, 地不入也.’
故過任之事, 父不得於子; 無已之求, 君不得於臣.
故微之爲著者强, 察乎息民之爲用者伯, 明乎輕之爲重者王.”
秦王曰:
“寡人案兵息民, 則天下必爲從, 將以逆秦.”
蘇子曰:
“臣有以知天下之不能爲從以逆秦也.
臣以爲大過也. 豈獨田單‧如耳爲大過哉?
天下之主亦盡過矣!
夫慮收亡齊‧罷楚‧敝魏與不可知之趙, 欲以窮秦折韓, 臣以爲至愚也.
夫齊威‧宣, 世之賢主也,
德博而地廣, 國富而, 將武而兵强.
宣王用之, 後, 以, , , 十年攘地, 秦人遠迹不服,
而齊爲.
夫齊兵之所以破, 韓‧魏之所以僅存者, 何也?
是則伐楚攻秦, 而後受其殃也.
今富非有齊威‧宣之餘也, 精兵非有, 而將非有田單‧之慮也.
收破齊‧罷楚‧弊魏‧不可知之趙, 欲以窮秦折韓, 臣以爲至誤.
臣以從一不可成也.
客有難者, 今臣有患於世.
此臣之所患也.
昔者, 秦人下兵攻, 服其人, 從之.
趙奢‧鮑佞將, 楚有四人起而從之. 臨懷而不救, 秦人去而不從.
不識三國之憎秦而愛懷邪?
忘其憎懷而愛秦邪?
夫攻而不救, 去而不從,
是以三國之兵困, 而之能也.
故裂地以.
田單將齊之良, 以兵橫行於中十四年, 終身不敢設兵以攻秦折韓也, 而馳於封內,
不識從之一成惡存也.”
於是秦王解兵不出於境,
諸侯休, 天下安, 二十九年不相攻.


240. 나라가 나라를 공격하다
나라가 나라를 공격하니, 소자蘇子가 조나라를 위하여 진왕秦王(소왕昭王)에게 유세하였다.
“제가 듣건대 현명한 임금은 그 백성을 대함에 있어서 널리 의론議論을 듣고, 기예技藝를 인정하기 때문에 관리로서는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없으며, 그 능력이 부족됨을 느끼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그 진언進言에 대해서는 많이 듣고, 때를 놓치지 않고 이를 실행하기 때문에 일마다 그르침이 없으며, 드날리지 못함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신은 왕께서 제가 말씀드리는 바를 잘 살피셔서 한 때의 쓰임으로 삼아 주시기를 원합니다.
저는 듣건대, 좋은 보물을 가진 자는 밤에 다니지 아니하며, 큰 임무를 맡아 공을 세우려는 자는 적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어진 이는 그 임무가 중할수록 행동은 겸손하게 하고, 지혜로운 자는 공이 클수록 언사가 화순和順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백성이 높은 지리에 있는 자를 미워하지 않게 되고, 세상이 공업功業을 이룬 자를 질투하지 않게 됩니다.
제가 듣기로 땅이 1백 배 큰 나라는 백성의 즐거움을 뒤로 돌리지 않는다 하였으며, 공업이 세상에 높은 자는 임금이 그에게 두 번 똑같은 공을 세우라고 요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힘이 다한 백성을 어진 임금은 더 이상 부리지 않고 쉬게 합니다.
얻을 것은 얻은 다음에는 돌아서서 조용히 있는 것이 바로 성왕聖王의 다스림이요, 공이 커지고 나서는 백성을 쉬게 해 주는 것이 용병用兵의 도리입니다.
그런데 지금 〈귀국은〉 싸움에 나가서는 종신토록 쉬지 못하고, 힘이 다 되었는데도 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나라를 노여워하여 기필코 자신의 고을로 만들겠다고 하시니, 조나라로서도 겨우 그 명맥만 유지하고 있겠습니까.
조나라는 사방에 모두 자기를 도와 줄 수레의 네 바퀴와 같은 우방국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통팔달四通八達의 나라여서 지금 비록 한단邯鄲을 얻는다고 해도 이는 장구한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하건대 땅이 너무 넓어 농사도 짓지 못하고 백성은 피곤하여 쉬지도 못하는데, 다시 형벌로써 엄하게 한다면 비록 겉으로는 따른다 해도 그 마음속의 불만을 그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속담에 ‘싸움에 이기고도 나라가 위태로운 것은 전쟁 물자의 소비를 끊임없이 하였기 때문이요, 공이 크고도 권세가 가벼워지는 것은 땅을 점령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지나치게 과중한 일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요구하지 못하는 법이며, 끝없는 요구는 임금이 신하에게 강요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미미한 것을 보고 그것이 곧 크게 드러날 일임을 아는 자는 강자强者가 될 수 있으며, 백성을 쉬게 하는 것이 곧 그를 쓰는 것임을 아는 자는 패자霸者가 될 수 있으며, 가벼운 것이 곧 중요한 것임을 아는 자는 왕자王者가 될 수 있습니다.”
진왕秦王이 말하였다.
“과인이 전쟁을 그치고 백성을 쉬게 하면, 천하가 틀림없이 합종合從하여 장차 우리 진나라에 반역할 것이오.”
소자蘇子가 말하였다.
“저는 천하 제후들이 합종을 맺어 진나라에 반역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저는 전단田單여이如耳는 크게 과실을 저지르고 있다고 여깁니다만 어찌 전단‧여이만이 큰 잘못을 저지른다고 하겠습니까?
천하의 제후 임금들 역시 모두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릇 제후들이 서로 나라를 깨뜨리고, 나라를 피폐하게 하며, 나라와 그 존망存亡이 어찌될 줄 모르는 나라를 피폐시키면서 진나라를 곤궁困窮하게 하고 나라를 꺾으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지극히 어리석은 짓입니다.
무릇 제나라의 위왕威王선왕宣王은 대대로 어진 임금이었습니다.
을 널리 펴고 땅을 넓혀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풍족하며 장수들은 무용武勇이 있고 병사들은 강하였습니다.
선왕宣王이 이를 이용하여 뒤로 한나라를 깨뜨리고 나라를 위협하였으며, 남으로 초나라를 정벌하고 서쪽으로는 진나라를 공격하여 진나라는 효산殽山 요새에서 제나라 병사들에게 곤액을 당하여 10년 동안이나 땅을 빼앗긴 채 진나라 사람들은 멀리 피하여 나라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도리어 제나라는 나라가 텅 비어 극도로 피폐해지고 말았습니다.
제나라 병력이 이렇게 깨어지고 한나라‧위나라가 겨우 보존되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이는 바로 제나라가 초나라‧진나라를 친 이후에 그 전쟁의 재앙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산동 여러 나라들이〉 부강富强을 강구하지만 나라 위왕威王선왕宣王만한 가 없으며 정병을 강구하고 있지만 한나라와 위나라를 핍박했던 제나라만한 군대가 없으며 장수들도 전단田單이나 사마양저司馬穰苴만큼 사려가 깊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잔파殘破한 제나라, 피폐한 초나라와 위나라, 존망存亡을 알 수 없는 조나라가 연합하여 진나라를 궁지에 몰아넣고, 한나라를 꺾으려고 하니 이는 제 생각으로 지극히 잘못된 것이라 여깁니다.
저는 저들의 합종은 성공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들 중에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자들이 있으니, 지금 저는 그들이 세상의 근심거리라 여깁니다.
그중 형명가刑名家들은 모두 ‘백마비마白馬非馬’라고 떠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백마白馬가 실제 말이 아니어야 백마론이 있을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걱정하는 바입니다.
옛날 진나라가 군대를 내려보내어 위나라 땅을 공격하여 그 사람들을 복종시키자 삼국三國이 합종을 맺었습니다.
그때 조나라 장수 조사趙奢, 제나라 장수 포녕鮑佞, 그리고 나라의 장수 네 명이 일어나서 합종을 맺고 회 땅으로 달려왔지만 구원하지 않았으며, 진나라 군사가 퇴각하자 그 합종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삼국이 진나라를 미워하고 회 땅을 사랑해서였을까요?
아니면 회 땅을 미워하고 진나라를 사랑해서였을까요?
적국의 공격을 받는데도 구원救援하지 않고, 적군이 퇴각하자 합종合從이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세 나라 군대가 곤란을 겪었는데, 조사趙奢포녕鮑佞나라를 당하지 못할 것을 안 것은 그들의 능력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땅을 떼어 주고 제나라에 해 주게 된 것입니다.
전단田單은 제나라의 뛰어난 군대를 이끌고 14년 간이나 제멋대로 나라 안에서 횡행橫行하였지만, 끝내 종신토록 감히 군대를 설치하여 진나라에 덤비거나 한나라를 꺾지 못하였고, 자신의 봉지封地 안에서만 날뛰었지요.
이렇게 보면 그들의 합종 맹약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에 진왕은 군사를 풀고 국경 밖으로 진출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 제후들은 휴식을 취하게 되었으며, 천하는 안정되어 29년 동안 서로 공격하는 일이 없었다.


역주
역주1 秦攻趙 : B.C.282년의 일
역주2 蘇子 : 三蘇(蘇秦, 蘇代, 蘇厲) 중에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역주3 聖主(王) : 원문 ‘主’를 鮑彪本에 의하여 ‘王’으로 고쳤다.
역주4 趙怒(怒趙) : 鮑彪本과 吳師道 說에 의하여 ‘怒趙’로 고쳤다. 秦나라가 趙나라에 대해 노한다는 뜻.
역주5 田單 : 齊나라 公族 田氏의 후예로 평민이었으나, 燕나라에게 72개 성을 빼앗기자 卽墨과 莒에서 反間計를 써서 樂毅(燕將)을 騎劫으로 바꾸게 하고, 火牛攻法으로 수복한 인물. 뒤에 安平君에 봉해졌다. 《史記》 〈田單列傳〉 및 074‧160‧162-165‧240‧246‧275‧466장 등 참조.
역주6 如耳 : 韓나라 신하, 또는 魏나라 신하라고도 한다. 096장 참조.
역주7 用民(民用) : 鮑彪本에 ‘民用’으로 되어 있으며 앞뒤 문장으로 보아 고쳐 번역하였다.
역주8 富(逼)破韓威魏 : 南梁之難을 말한다. 원문 ‘富’는 吳師道의 《補正》에 의하여 ‘逼’으로 고쳤다. 117장 참조.
역주9 南伐楚 : 垂沙之戰을 말한다. B.C.301년. 199‧215장 참조.
역주10 西攻秦 : 函谷關 전투. B.C.297~296년.
역주11 〈秦〉爲齊兵困於殽塞之上 : 鮑彪本에 의하여 ‘秦’을 보충하였다. 232장 참조.
역주12 虛戾 : 虛厲와 같은 말. 집에 사람이 살지 않는 것을 ‘虛’라 하니, 鬼神의 後가 없는 것을 ‘厲’라 한다 하였다. 《莊子》 〈人間世〉
역주13 富(逼)韓勁魏之庫(軍)也 : 吳會祺의 《補注》에 의하여 원문 ‘庫’를 ‘軍’으로 고쳤다.
역주14 司馬 : 司馬穰苴. 성은 田氏. 이름은 穰苴. 齊나라의 뛰어난 병법가. 160장 참조. 《史記》 〈司馬穰苴列傳〉 참조.
역주15 刑名家 : 戰國時代 諸子百家 중의 名家. 대표적인 인물로는 鄧析子‧尹文子‧公孫龍子‧惠施 등이 있으며, 그 중에 公孫龍子에 의해 학문을 이루었다.
역주16 白馬非馬 : 《史記》 〈孟荀列傳〉에는 “趙亦有公孫龍爲堅白同異之辨”이라 하여 公孫龍의 趙나라 사람이라고 하였다. 지금 《公孫龍子》 6편이 남아 있으나 일부는 후인의 依托으로 보고 있다. 그 중 〈白馬論〉에는 “馬者, 所以形名也. 白者, 所以色名也. 命色者, 非命形也. 故曰白馬非馬”라 하였다. 蘇子는 이들의 학설을 궤변으로 본 것이다.
역주17 已(亡)如白馬實馬 乃使有白馬之爲也 : 원문 ‘已如’를 金正煒는 ‘亡如’로 보았고, ‘白馬之爲也’는 ‘白馬之謂也’로 보았다. 따라서 “백마가 실제로 말이 아니어야 白馬之謂라는 이론이 있게 된다.”로 풀이하였다.
역주18 : 魏地. 지금의 河南省 武涉縣 서남.
역주19 三國 : 齊‧楚‧趙.
역주20 趙奢‧鮑接(佞) : 趙奢는 趙나라 장수이며, 鮑佞은 齊나라 장수. 원문 ‘接’은 ‘佞’의 誤字.
역주21 敗(封)於齊 : 원문 ‘敗’는 ‘封’의 誤字로 여겨진다. 즉 田單이 齊나라에서 受封한 것을 말한다.

전국책(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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