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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國策(1)

전국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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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책(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張儀爲秦破從連橫, 說楚王曰:
“秦地半天下, 兵敵四國, 被山帶河, 四塞以爲固.
之士百餘萬, 車千乘, 騎萬疋, 粟如丘山. 法令旣明, 士卒安難樂死.
主嚴以明, 將知以武.
雖無出兵甲, 席卷之險, 折天下之脊, 天下後服者先亡.
且夫爲從者, 無以異於驅群羊而攻猛虎也. 夫虎之與羊, 不格明矣.
今大王不與猛虎而與群羊, 竊以爲大王之計過矣.
凡天下强國, 非秦而楚, 非楚而秦.
兩國敵侔交爭, 其勢不兩立.
而大王不與秦, 秦下甲兵, 據宜陽, 韓之上地不通; 下, 取, 韓必入臣於秦.
韓入臣, 魏則從風而動.
秦攻楚之西, 韓‧魏攻其北, 社稷豈得無危哉?
且夫約從者, 聚群弱而攻至强也.
夫以弱攻强, 不料敵而輕戰, 國貧而驟擧兵, 此危亡之術也.
臣聞之, 兵不如者, 勿與挑戰; 粟不如者, 勿與持久.
夫從人者, 飾辯虛辭, 高主之節行, 言其利而不言其害,
卒有楚禍, 無及爲已,
是故願大王之熟計之也.
秦西有巴蜀, 方船積粟, 起於, 循江而下, 至郢三千餘里.
舫船載卒, 一舫載五十人, 與三月之糧, 下水而浮, 一日行三百餘里;
里數雖多, 不費馬汗之勞, 不至十日而距;
扞關驚, 則, 盡城守矣, 黔中‧巫郡非王之有已.
秦擧甲出之武關, 南面而攻, 則北地絶.
秦兵之攻楚也, 危難在三月之內; 而楚恃諸侯之救, 在半歲之外, 此其勢不相及也.
夫恃弱國之救, 而忘强秦之禍, 此臣之所以爲大王之患也.
且大王而亡之, 陳卒盡矣;
有偏守新城而居民苦矣.
臣聞之, 攻大者易危, 而民弊者怨於上.
夫守易危之功, 而逆强秦之心, 臣竊爲大王危之.
且夫秦之所以不出甲於函谷關十五年以攻諸侯者, 陰謀有呑天下之心也.
楚嘗與秦構難, 戰於漢中. 楚人不勝,
死者七十餘人, 遂亡漢中.
楚王大怒, 興師襲秦, 戰於藍田, 又卻. 此所謂兩虎相搏者也.
夫秦‧楚相弊, 而韓‧魏以全制其後, 計無過於此者矣,
是故願大王熟計之也.
秦下兵攻衛陽晉, 必開扃天下之匈,
大王悉起兵以攻宋, 不至數月而宋可擧. 擧宋而東指, 則十二諸侯, 盡王之有已.
凡天下所信約從親堅者蘇秦, 封爲而相燕,
共分其地. 乃佯有罪,
出走入齊, 齊王因受而相之.
居二年而覺, 齊王大怒, .
夫以一詐僞反覆之蘇秦, 而欲經營天下, 混一諸侯, 其不可成也亦明矣.
今秦之與楚也, 接境壤界, 固形親之國也.
大王誠能聽臣, 臣請秦太子入質於楚, 楚太子入質於秦, 請以秦女爲大王箕箒之妾, 効萬家之都, 以爲,
長爲昆弟之國, 終身無相攻擊. 臣以爲計無便於此者.
故敝邑秦王, 使使臣獻書大王之從車下風 須以決事.”
楚王曰:
“楚國僻陋, 託東海之上. 寡人年幼, 不習國家之長計.
今上客幸敎以明制, 寡人聞之, 敬以國從.”
乃遣使車百乘, 獻於秦王.


장의張儀나라를 위해 초왕楚王에게 합종合從을 깨고 연횡連橫할 것을 유세하다
장의張儀나라를 위하여 종친從親(合從)을 하고 연횡連橫해야 한다고 초왕楚王(懷王)에게 유세하였다.
나라는 천하 토지의 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병력은 사방 국가를 대항할 수 있고, 산은 자연 요새를 이루고 있으며, 강은 띠처럼 둘러 있어, 사경四境험요險要하며 견고합니다.
용맹한 군사는 1백만이 넘고, 병거兵車는 1천 량, 기마騎馬는 1만 필에다가 군량은 산처럼 쌓여 있으며, 법령은 엄하여 사졸들은 위난危難을 겁내지 않고 죽기를 즐거움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임금은 하여 명찰明察하며, 장수는 지혜롭고 용무勇武이 넘칩니다.
그래서 비록 출병을 하지 않고도, 상산常山험요險要를 석권하여 천하의 등뼈를 꺾어버려 천하 제후로 하여금 나중에 귀복歸服할수록 먼저 망하게 합니다.
또 대저 합종合從이란 마치 양떼를 몰아 맹호를 공격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무릇 범에게 있어서 양은 적수가 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께서는 맹호와 함께 하지 않고 양의 편을 드시니, 제 생각에 대왕의 계획은 잘못이라고 여깁니다.
무릇 천하의 강국은 나라 아니면 곧 나라요, 초나라가 아니면 곧 진나라입니다.
양국의 세력은 서로 비슷하여 서로 싸우면 그 형세상 끝내 양립兩立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진나라와 연합하지 않으니, 나라는 곧 발병發兵하여 의양宜陽을 점거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나라의 상지上地불통不通되고, 하동河東으로 내려와 성고成皐를 취하면 나라는 틀림없이 나라에 입조入朝해 올 것입니다.
한나라가 입조入朝해 오면 나라는 바람을 따르듯 움직이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진나라가 초나라의 서쪽을 치고 한나라‧위나라는 초나라의 북쪽을 치게 된다면, 초나라 사직社稷에 어찌 위험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무릇 합종이란 약한 무리를 모아 지극히 강한 자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무릇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를 공격하면서 적의 힘을 헤아리지도 않고 경솔히 개전開戰하며, 국가가 빈곤한 데도 갑자기 병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술책입니다.
저는 듣건대 병력이 그만 못하면 더불어 도전하지 말고, 양식이 그만 못하거든 지구전持久戰을 벌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합종을 주장하는 자들은 꾸며낸 거짓말로 임금의 절조節操품행品行을 찬양하되 이익만 말하고 그 손해되는 일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진나라가 나라를 공격하는 화환禍患을 당하게 되지만 때는 늦고 맙니다.
이런 까닭으로 대왕께서는 숙고熟考하시기 바랍니다.
진나라는 서쪽에 이 있어 배에 곡식을 싣고 문산汶山을 출발하여, 강을 따라 내려오면 까지는 3천 리가 됩니다.
배에 군사를 실으면 한 배에 50인과 3개월 분의 식량을 싣고 물을 타고 내려와 하루 3백 리씩 갑니다.
거리는 멀지만 말이 땀을 흘리는 수고를 덜 수 있고, 미처 열흘이 되기 전에 한관扞關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한관이 경동驚動하면 경릉竟陵 동쪽은 모두 힘을 다해 성을 지켜야 할 것인데, 그러는 사이 검중黔中무군巫郡은 왕의 땅이 아니게 됩니다.
진나라가 군대를 내어 무관武關을 넘어 남쪽으로 향해 공격하면 북쪽 영토가 끊어집니다.
나라 군사가 초나라를 공격하는 위난危難은 3개월 내에 결판나고 마는데, 초나라가 제후의 구원을 믿으려면 반년 이상이 걸려서 미치지 못할 형세입니다.
무릇 약한 나라의 구원을 믿고 강한 나라의 를 망각하고 있으니, 이 때문에 제가 대왕을 위해 걱정하는 바입니다.
또 대왕께서 일찍이 나라와 오전삼승五戰三勝하여 오나라를 멸망시켰으나 결국 진중陣中의 병졸은 다 잃고 말았습니다.
신성新城을 치우치게 지키느라고 그곳 백성들만 고생을 하였습니다.
제가 듣건대 강대국을 공격하게 되면 쉽게 위험에 빠지게 되고, 백성이 피폐하게 되면 윗사람을 원망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쉽게 무너질 을 지키느라 강한 진나라의 마음만 거역하고 있으니, 저는 대왕을 위해 위험하다고 여기는 바입니다.
하물며 진나라가 15년 동안이나 함곡관函谷關 너머로 출병하여 제후諸侯를 공격하지 않은 것은, 천하를 병탄하려는 음모를 꾸미느라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초나라가 일찍이 진나라와 사이가 벌어져 한중漢中에서 일전一戰을 벌였으나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통후通侯집규執珪 등 고관으로서 죽은 자가 70여 명이나 되어 끝내 한중을 잃고 말았습니다.
초왕楚王께서 더욱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하여 남전藍田에서 싸웠지만 역시 퇴각당하고 말았으니, 이러한 경우를 일러 양호상박兩虎相搏이라 합니다.
무릇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피폐해지면 나라와 나라는 온전하여 그 뒤를 공략할 것이니, 계책 중에 이보다 더 큰 과실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진나라가 군대를 일으켜 나라의 양진陽晉을 치면 틀림없이 문을 열듯 천하의 가슴을 열어버리는 것이 됩니다.
이때를 이용하여 대왕께서는 군대를 다 내어 나라를 치면 몇 달 걸리지 않고 송나라를 점령할 수 있으며, 다시 송나라를 몰아 동쪽으로 향하면 사수泗水 부근의 12 제후는 모두 왕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무릇 천하가 믿었던 바의 합종을 견고히 했던 자는 소진蘇秦인데, 그는 무안군武安君해지고 나라의 상국相國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연왕燕王음모陰謀하여 나라를 삼킨 후, 그 제나라의 영토를 나누어 갖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를 지은 것처럼 꾸며 제나라로 들어가자 제왕齊王은 그를 받아들여 재상으로 삼았습니다.
2년이 지난 후 이런 사실이 발각되자 제왕齊王은 크게 노하여 소진을 잡아 시중市中에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무릇 이토록 간사하게 사기꾼 짓을 반복反覆하는 소진의 정책을 써서 천하를 경영하고 제후를 통일하려고 하니, 성공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진나라와 초나라는 국경이 서로 해 있어 본래 형세상 친한 나라입니다.
대왕께서 능히 저의 의견을 들어주신다면 저는 청컨대 진나라 태자를 초나라에 인질로 들이고, 초나라 태자 역시 진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장차 진왕秦王의 딸을 대왕의 시중을 드는 으로 들이도록 청하겠으며, 일만 호구의 대도大都를 바쳐 대왕의 탕목읍湯沐邑으로 삼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영원히 형제지국兄弟之國이 되어 종신토록 서로 공격하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니, 제 생각에 이보다 더 편리한 계획은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므로 저희 진왕秦王(惠文王)께서 저를 사신으로 삼아 보내 국서國書를 대왕께 바치고 수종隨從을 들며 대왕의 결정을 기다리도록 한 것입니다.”
초왕(懷王)이 말하였다.
“우리 초나라는 벽루僻陋하여 동해東海 가에 의지하고 있으며, 또 과인은 나이가 어려 국가를 위해 장구한 계책도 익히지 못하고 있는 터입니다.
지금 상객上客께서 다행히 진왕秦王의 명령을 가르쳐 주시니, 과인은 이를 듣고 공경히 나라를 바쳐 따르겠습니다.”
이에 초왕은 사신을 파견하여 수레 1백 승에 계해지서鷄駭之犀야광지벽夜光之璧진왕秦王에게 바쳤다.


역주
역주1 187. 張儀爲秦破從連橫說楚王 : 이 사건은 《史記》 〈張儀列傳〉과 대략 같다. 시기는 B.C.311년. 214장 참고. 張儀는 蘇秦이 먼저 득세하자 빛을 보지 못하다가 마침 楚나라 사신으로 와서 돌연 蘇秦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楚 懷王에게 이 連橫說을 펴기 시작하였다.
역주2 虎賁 : 호랑이처럼 奔走逐獸한다는 뜻으로 勇士를 가리킨다.
역주3 常山 : 즉 恒山. 漢나라 때 文帝의 이름을 諱하여 常山으로 고쳐 불렀다. 그 후 다시 恒山으로 불렀다. 지금의 하북성 曲陽縣 서북쪽에 있는데 太行山과 연접해 있다.
역주4 河東 : 지금의 山西省 서남쪽의 黃河 동쪽의 韓地.
역주5 成皐 : 지금의 河南省 氾水縣으로 군사 요지.
역주6 汶山 : 岷山. 四川省 松潘縣 岷江 가의 산.
역주7 扞關 : 楚나라의 關名. 四川省 奉節縣 동쪽 赤甲山.
역주8 從竟陵已東 : 竟陵은 지금의 湖北省 天門縣 서북. 《史記》에는 從境以東이라 하였다.
역주9 嘗與吳人五戰三勝 : 吳나라는 춘추시대에 이미 越나라 勾踐에게 망하였으니, 무슨 사건인지 분명치 않다.
역주10 通侯‧執珪 : 둘 모두 楚나라의 爵名. 통후는 원래 徹侯라 하였으나 漢 武帝의 이름을 諱하여 通侯라 하였다.
역주11 泗上 : 泗水 가장자리. 사수는 산동성 서남쪽을 거쳐 강소성 북부로 흐르는 강.
역주12 武安君 : 蘇秦이 六國合從을 맺고 趙나라에 돌아오자 肅侯가 武安君에 봉해 주었다. 武安은 趙나라 읍으로 지금의 河南省 涉縣 동북.
역주13 陰與燕王謀破齊 : 蘇秦은 燕나라에서 易王의 어머니인 文夫人과 사통하였다. 이에 그 禍가 두려워 易王과 모의해서 죄에 쫓겨 齊나라로 망명하는 것처럼 꾸며 齊나라를 칠 계획을 세웠다.
역주14 車裂蘇秦於市 : 《史記》 〈蘇秦列傳〉에 의하면, 소진이 齊 宣王이 죽고 湣王이 즉위하자 宣王을 厚葬하고 화려한 宮室과 苑囿를 설치해 孝道를 밝히라고 권하였는데, 이는 燕나라를 위해 제나라의 재정을 파탄시키려는 술책이었다. 그후 소진과 권세를 다투던 제나라 대부가 자객을 시켜 소진을 찔러 소진이 죽기에 이르렀다. 그는 죽으면서 민왕에게, 자신이 죽거든 연나라를 위해 제나라를 어지럽혔다는 죄목을 씌워 자기를 저자에서 車裂刑에 처하면 범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을 하고 숨진다. 제 민왕이 그대로 했더니 범인이 나타나므로 죽였다.
역주15 湯沐之邑 : 周代에 제후가 天子에게 朝見할 때 머물면서 沐浴齋戒할 수 있도록 하사한 封地.
역주16 鷄駭之犀‧夜光之璧 : 鷄駭犀는 무소 뼈의 하나로 붉은 결이 있어 거기에 쌀을 담아 닭장에 넣어 두면 닭들이 쪼아 먹으려다가 놀라 도망간다고 한다. 駭鷄犀라고도 한다. 夜光璧은 구슬 이름으로 옛날 西域에서 많이 산출되었다.

전국책(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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