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齊나라는 원래 강성姜姓이다. 주周 문왕文王이 태공망太公望 강상姜尙(呂尙, 자아子牙)을 봉하였던 곳으로 춘추시대春秋時代에 가장 먼저 세력을 키웠으며, 환공桓公 때에는 관중管仲을 등용, 춘추오패春秋五霸 중의 첫 패자가 된다. 그 당시 진陳(원래 규성嬀姓)나라 여공厲公 타佗의 아들 완完이 제齊나라로 도망하여(B.C.672) 진성陳姓을 전성田姓으로 바꾸고 제齊 환공桓公을 섬겼다. 그의 후손인 전화田和가 당시 제齊나라 임금 강공康公을 바닷가로 쫓아 버리고(B.C.386) 자립하여 제후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이를 흔히 전씨제田氏齊 혹은 전제田齊라 하는데, 국도國都는 여전히 임치臨淄에 두었다. 그 때문에 《사기史記》에서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는 춘추春秋까지의 제齊나라 역사를, 〈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田完의 시호諡號가 경중敬仲이었음)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의 역사를 구분하여 기록한 것이다. 이렇게 전국시대를 맞이한 제齊나라는 전국칠웅戰國七雄 중 동쪽 대국으로 해변의 어염魚鹽과 철鐵 등을 생산하여 산업을 발전시켜 지금의 산동반도山東半島를 포함한 중원中原 동쪽의 강국으로 군림하다가 1백 59년 만에 진시황秦始皇의 천하통일 때 종말을 고한다.(B.C.221)
춘추春秋 초기에 이미 제齊나라는 경제권을 장악하고 이웃 소국을 겸병, 급속히 발전하여 패자가 되었고, 그 세력은 춘추 말기까지 이어 오면서 관자管子(管仲)와 안자晏子(晏嬰)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전국시대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전씨제田氏齊가 된 후에도 더욱 발전을 거듭하여 서쪽 진秦나라와 대등한 세력으로 동제東帝‧서제西帝를 칭할 정도로 강국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학술과 사상에 있어서도 노魯나라 공자孔子에 이어 전국시대에 맹자孟子가 제齊나라에서 나와 왕도정치王道政治를 부르짖고 유학儒學의 부흥을 꾀하는 등, 소위 공맹지학孔孟之學의 발원지로 자리 잡아 한대漢代 유학儒學 건국이념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포표鮑彪는 그 강역疆域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제齊나라는 동쪽으로는 치천菑川‧동래東萊‧낭야瑯邪‧고밀高密‧교동膠東이며, 남쪽으로는 태산泰山‧성양城陽, 그리고 북쪽으로는 천승千乘‧청하淸河 이남과 발해渤海의 고악高樂‧고성高城‧중합重合‧신양信陽이었으며, 서쪽으로는 제남濟南‧평원平原을 영유領有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