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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國策(2)

전국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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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儀爲秦連橫, 說趙王曰:
“弊邑秦王使臣敢獻書於大王.
大王收率天下以儐秦, 秦兵不敢出函谷關十五年矣.
大王之威, 行於天下山東.
弊邑恐懼懾伏, 繕甲厲兵, 飾車騎, 習馳射, 力田積粟, 守四封之內, 愁居懾處, 不敢動搖, 唯大王有意督過之也.
今秦以大王之力, 西擧巴蜀, 幷漢中, 東收兩周而, 守白馬之津.
秦雖辟遠, 然而心忿悁含怒之日久矣.
有微甲鈍兵, 軍於澠池, 願渡河踰漳, 據番吾, 迎戰邯鄲之下.
願以合戰, 以正殷紂之事.
敬使臣先以聞於左右.
凡大王之所信以爲從者,
恃蘇秦之計. 熒惑諸侯, 以是爲非, 以非爲是, 欲反覆齊國而不能, 自令車裂於齊之市.
夫天下之不可一亦明矣.
今楚與秦爲昆弟之國, 而韓‧魏稱爲東蕃之臣, 齊獻魚鹽之地, 此斷趙之右臂也.
夫斷右臂而求與人鬪, 失其黨而孤居, 求欲無危, 豈可得哉?
今秦發三將軍, 一軍塞午道, 告齊使興師度淸河, 軍於邯鄲之東; 一軍軍於成皐, 敺韓‧魏而軍於河外;
一軍軍於澠池.
約曰: ‘四國爲一以攻趙, 破趙而四分其地.’
是故不敢匿意隱情, 先以聞於左右.
爲大王計, 莫如與秦遇於澠池, 面相見而身相結也.
臣請案兵無攻, 願大王之定計.”
趙王曰:
“先王之時, 奉陽君相, 專權擅勢, 蔽晦先王, 獨制官事. 寡人宮居, 屬於師傅, 不能與國謀.
先王棄羣臣, 寡人年少, 奉祠祭之日淺,
私心固竊疑焉. 以爲一從不事秦, 非國之長利也.
乃且願變心易慮, 剖地謝前過以事秦. 方將約車趨行, 而適聞使者之明詔.”
於是乃以車三百乘.


241. 장의張儀나라를 위하여 연횡連橫조왕趙王에게 유세하다
장의張儀나라를 위하여 연횡설連橫說조왕趙王(무령왕武靈王)에게 유세하였다.
“저희 진왕秦王(혜왕惠王)께서 저로 하여금 대왕의 어사御史에게 글을 올리게 하였습니다.
대왕께서 천하를 인솔하여 진나라에 대항하고 있어서 진나라는 감히 함곡관函谷關을 나서보지 못한 지 이미 15년이나 되었습니다.
대왕의 위세가 천하天下 산동山東에게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에 저희 나라는 그 위세가 두려워 다만 갑병甲兵을 수선하고, 마차를 장식하며, 치사馳射를 연습시키며, 힘써 농사를 지어 식량을 저축하여 사방 국경을 지키고 있을 뿐, 움츠려 두려워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오직 대왕의 책망을 두려워입니다.
지금 진나라는 대왕의 힘에 의지해서 서쪽으로 파촉巴蜀을 치고 한중漢中을 병탄하였으며, 동쪽으로는 양주兩周(동주東周서주西周)를 거두어 들여 구정九鼎을 서쪽으로 옮겨놓고 백마진白馬津을 지키고 있습니다.
진나라는 비록 서쪽 벽지에 치우쳐 있지만 심중에 원한을 품어온 지 이미 오래입니다.
지금 저희 임금께서는 미약한 병력에 둔한 군대이지만 민지澠池에 주둔하여, 하수河水를 건너고 장수漳水를 넘어 파오番吾를 점거한 후, 이 한단邯鄲 아래에서 결전을 벌여보고자 합니다.
갑자일甲子日합전合戰하여 옛날 무왕武王나라 를 벌한 일을 본받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공손히 저를 보내 먼저 대왕의 좌우에게 알리도록 한 것입니다.
무릇 대왕께서 믿으시는 바는 합종合從이라는 것입니다.
소진蘇秦의 계략을 믿어 제후를 혹하게 하여,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 하는 것으로서, 그는 나라를 뒤엎으려다가 이를 이루지 못하자 스스로 제나라 저자에서 거열형車裂刑을 당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천하가 합종하여 하나가 된다는 것은 역시 불가능한 일임이 밝혀졌습니다.
지금 나라와 진나라는 형제의 나라가 되어 있고, 나라‧나라도 또한 동쪽의 속국이라고 칭하고 있으며, 나라는 어염魚塩이 출산되는 토지를 바쳐오고 있으니 바로 귀국 조나라 오른팔이 잘린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른팔을 잃고 남과 싸우고자 하니, 그 을 잃고 외롭게 처하면서 위험이 없기를 바란다면 되겠습니까?
지금 진나라는 이미 세 장군을 보내어 하나는 오도午道를 막고, 제나라에게 고하여 군대를 일으켜 청하淸河를 건너 한단邯鄲의 동쪽에 군사를 주둔시키게 하였으며, 하나는 성고成皐에 주둔시켜 놓고, 한나라‧위나라 군대를 몰아 하외河外에 진을 쳐놓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는 민지澠池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네 나라(진‧제‧한‧위)와 약속하기를 ‘네 나라가 공동으로 조나라를 공격하여 이를 파한 후에 그 국토를 4분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숨기고 있을 수만 없어서 먼저 사람을 보내어 좌우에게 말씀드린 것입니다.
저는 대왕을 위한 계책으로는 민지澠池에서 진나라와 만나 서로 얼굴을 맞대고 몸소 나서서 결맹을 맺느니만 못하다고 여깁니다.
제가 청하여 진병秦兵에게 공격을 잠시 중단하고 있도록 할 테니 대왕께서는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조왕이 말하였다.
선왕先王 때에는 봉양군奉陽君이 재상이 되어 전권을 장악하여, 선왕을 몽폐蒙蔽하고 관사官事를 혼자 처리하면서 과인은 궁에 거하면서 스승에게 맡겨 국정에는 참여할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선왕께서 이미 군신을 버리고 돌아가시어 나이 어린 과인이 제사를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과인은 사사로이 이러한 일이 늘 의심하여 한결같이 합종만 주장하면서 진나라를 섬기지 않는 것은 나라의 장구한 이익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이에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 토지를 떼어 지난날의 과실을 사과하고, 진나라 섬기기를 원하여, 바야흐로 거마를 준비하고 막 행동으로 옮기려던 터에 마침 선생의 밝은 지시를 듣게 되었소.”
그리고는 수레 3백 을 이끌고 민지로 가서 진왕秦王조회朝會하고 하간河間 땅을 할양하여 진나라를 섬기게 되었다.


역주
역주1 : 이 이야기는 《史記》 〈張儀列傳〉에도 실려 있다.
역주2 御史 : 官名, 戰國時代는 史官을 御史라 하였다.
역주3 西遷九鼎 : 이때 아직 九鼎을 秦의 咸陽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史記》 〈周本紀〉에 의하면 周 赧王 59년(B.C.256)에 秦나라가 九鼎을 취하여 咸陽으로 옮긴 것으로 되어 있어 張儀가 죽은 후 50여 년 뒤이다.
역주4 今宣(寡)君 : 鮑彪本에 의하여 원문 ‘宣’을 ‘寡’로 고쳤다.
역주5 甲子之日 : 여기서의 갑자일은 어느 때인지 알 수 없으나 周 武王이 殷의 紂를 벌할 때 武王 11년 2월 甲子日 새벽에 牧野에서 시작한 것을 본받아 쓴 말이다.
역주6 臣切(竊) : 원문 ‘切’을 鮑彪本 및 《史記》 〈張儀列傳〉에 의하여 ‘竊’로 고쳤다.
역주7 入朝澠池 割河間以事秦 : 《史記》에는 이 문장이 없다. 河間은 당시 燕나라 땅(지금의 河北省)이었으며, 다만 趙 武靈王의 아들인 惠文王 20년에 당시 재상이었던 藺相如와 함께 秦 昭襄王과 회담한 일이 있으나 이는 張儀가 連橫을 편 지 30년 후였다.

전국책(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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