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戰國策(1)

전국책(1)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전국책(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59. 蘇秦說齊閔王
“臣聞用兵而喜先天下者憂, 約結而喜主怨者孤.
夫後起者藉也, 而遠怨者時也.
是以聖人從事, 必藉於權而務興於時.
夫權藉者, 萬物之率也; 而時勢者, 百事之長也.
故無權籍, 倍時勢, 而能事成者寡矣.
今雖, 非得人力, 則不能割劌矣;
堅箭利金, 不得弦機之利, 則不能遠殺矣.
矢非不銛, 而劍非不利也, 何則?
權藉不在焉.
何以知其然也? 昔者, , , 人不休, 傅(附)衛國,
, 衛八門土而二門墮矣, 此亡國之形也.
衛君跣行, 告遡於魏.
魏王身, 挑趙索戰.
邯鄲之中騖, 河‧山之間亂.
衛得是藉也, 亦收餘甲而北面, 之郭.
衛非强於趙也,
譬之衛矢而魏弦機也, 藉力魏而有之地.
趙氏懼, 楚人救趙而伐魏, 戰於, 出, 軍舍, 馬飮於大河.
趙得是藉也, 亦襲魏之, 燒, 墜.
故剛平之殘也, 中牟之墮也, 黃城之墜也, 棘溝(蒲)之燒也, 此皆非趙‧魏之欲也.
然二國勸行之者, 何也?
衛明於時權之藉也.
今世之爲國者不然矣.
兵弱而好敵强, 國罷而好衆怨, 事敗而好鞠之, 兵弱而憎下人也, 地狹而好敵大, 事敗而好長詐.
行此六者而求伯, 則遠矣.
臣聞善爲國者, 順民之意, 而料兵之能, 然後從於天下.
故約不爲人主怨, 伐不爲人挫强.
如此, 則兵不費, 權不輕, 地可廣, 欲可成也.
昔者, 也, 戰非甚疾也, 分地又非多韓‧魏也,
然而天下獨歸咎於齊者, 何也?
以其爲韓‧魏主怨也.
且天下徧用兵矣, , 秦‧楚戰韓‧魏不休, 而宋‧越專用其兵.
此十國者, 皆以相敵爲意, 而獨擧心於齊者, 何也?
約而好主怨, 伐而好挫强也.
且夫强大之禍, 常以王人爲意也; 夫弱小之殃, 常以謀人爲利也.
是以大國危, 小國滅也.
大國之計, 莫若後起而重伐不義.
夫後起之藉與多而兵勁, 則以衆强適罷寡也, .
事不塞天下之心, 則利必附矣.
大國行此, 則名號不攘而至, 伯王不爲而立矣.
小國之情, 莫如而寡信諸侯.
僅靜, 則四鄰不反; 寡信諸侯, 則天下不賣.
外不賣, 內不反, 則朽腐而不用, 幣帛矯蠹而不服矣. 小國道此, 則不祠而福矣, 不貸而足矣.
故曰:祖仁者王, 立義者伯, 用兵窮者亡.
何以知其然也? 昔吳王以强大爲天下先,
, 身從諸侯之君, 而卒身死國亡, 爲天下戮者, 何也?
此夫差平居而謀王, 强大而喜先天下之禍也.
昔者, 好謀, 好詐,
莒恃越而滅, 蔡恃晉而亡, 此皆內長詐, 外信諸侯之殃也.
由此觀之, 則强弱大小之禍, 可見於前事矣.
語曰:‘之衰也, 駑馬先之; 之倦也, 女子勝之.’ 夫駑馬‧女子, 筋骨力勁, 非賢於騏驥‧孟賁也. 何則?
後起之藉也.
今天下之相與也不並滅, 有而案兵而後起, 寄怨而誅不直, 微用兵而寄於義, 則亡天下可跼足而須也.
明於諸侯之故, 察於地形之理者, 不約親, 不相質而固; 不趨而疾, 衆事而不反, 交割而不相憎, 俱彊而加以親.
何則?
形同憂而兵趨利也. 何以知其然也?
昔者, 齊‧燕戰於之曲, 燕不勝, 十萬之衆盡. 數縣,
取其牛馬.
夫胡之與齊非素親也, 而用兵又非約質而謀燕也,
然而甚於相趨者, 何也?
何則形同憂而兵趨利也.
由此觀之, 約於同形則利長, 後起則諸侯可趨役也.
故明主察相, 誠欲以伯王也爲志, 則戰攻非所先.
戰者, 國之殘也, 而都縣之費也.
殘費已先, 而能從諸侯者寡矣.
彼戰者之爲殘也, 士聞戰則輸私財而富軍市, 輸飮食而待死士, 令而炊之, 殺牛而觴士, 則是之道也.
中人禱祝, 君翳釀, 通都小縣置社, 有市之邑莫不止事而奉王, 則此虛中之計也.
夫戰之明日, 尸死扶傷, 雖若有功也, 軍出費, 中哭泣, 則傷主心矣.
死者破家而葬, 夷傷者空財而共藥, 完者內酺而華樂, 故其費與死傷者鈞.
故民之所費也, 十年之田而不償也.
軍之所出, 矛戟折, 鐶弦絶, 傷弩, 破車, 罷馬, 亡矢之大半.
甲兵之具, 官之所私出也, 士大夫之所匿, 廝養士之所竊, 十年之田而不償也.
天下有此再費者, 而能從諸侯寡矣.
攻城之費, 百姓理襜蔽, 擧衝櫓, 家雜總, 身窟穴, 中罷於刀金. 而士困於土功, 將不釋甲, 期數而能拔城者爲亟耳.
上倦於敎, 士斷於兵,
故三下城而能勝敵者寡矣.
故曰:彼戰攻者, 非所先也.
何以知其然也? 昔, 殺其君, 滅其國, 又西圍, 呑兼二國, 而憂一主, 此用兵之盛也.
然而智伯卒身死國亡, 爲天下笑者, 何謂也?
兵先戰攻, 而滅二子患也.
, 中山悉起而迎燕‧趙, 南戰於, 敗趙氏; 北戰於中山, 克燕軍, 殺其將.
夫中山, 千乘之國也, 而敵萬乘之國二, 再戰, 此用兵之上節也.
然而國遂亡, 君臣於齊者, 何也?
不嗇於戰攻之患也.
由此觀之, 則戰攻之敗, 可見於前事.
今世之所謂善用兵者, 終戰比勝, 而守不可拔, 天下稱爲善, 一國得而保之, 則非國之利也.
臣聞戰大勝者, 其士多死而兵益弱; 守而不可拔者, 其百姓罷而城郭露.
夫士死於外, 民殘於內, 而城郭露於境, 則非王之樂也.
今夫鵠的非咎罪於人也, 便弓引弩而射之, 中者則善, 不中則愧,
少長貴賤, 則同心於貫之者, 何也?
惡其示人以難也.
今窮戰比勝, 而守必不拔, 則是非徒示人以難也, 又且害人者也,
然則天下仇之必矣.
夫罷士露國, 而多與天下爲仇, 則明君不居也; 素用强兵而弱之, 則察相不事.
彼明君察相者, 則不動而諸侯從, 辭讓而重賂至矣.
故明君之攻戰也, 甲兵不出於軍而敵國勝, 衝櫓不施而邊城降, 士民不知而王業至矣.
彼明君之從事也, 用財少, 曠日遠而爲利長者.
故曰:兵後起則諸侯可趨役也.
臣之所聞, 攻戰之道非師者,
雖有百萬之軍, 比之堂上; 雖有闔閭‧之將, 禽之戶內; 千丈之城, 拔之尊俎之間; 百尺之衝, 折之衽席之上.
故鐘鼓竽瑟之音不絶, 地可廣而欲可成; 和樂倡優侏儒之笑不, 諸侯可同日而致也.
故名配天地不爲尊, 利制海內不爲厚.
故夫善爲王業者, 在勞天下而自佚, 亂天下而自安,
諸侯無成謀, 則其國無宿憂也.
何以知其然? 在我, 勞亂在天下, 則王之道也.
銳兵來則拒之, 患至則趨之, 使諸侯無成謀, 則其國無宿憂矣.
何以知其然矣? 昔者, 魏王擁土千里, 帶甲三十六萬, 其强而拔邯鄲, 西圍, 又從十二諸侯朝, 以西謀秦.
恐之, 寢不安席, 食不甘味,
令於境內, 盡堞中爲戰具, 爲守備, 爲死士置將, 以待魏氏.
謀於秦王曰:‘夫魏氏其功大, 而令行於天下, 有十二諸侯而朝天子,
其與必衆. 故以一秦而敵大魏, 恐不如.
王何不使臣見魏王,
則臣請必北魏矣?’ 秦王許諾.
衛鞅見魏王曰:
‘大王之功大矣, 令行於天下矣.
今大王之所從十二諸侯, 非宋‧衛也, 則鄒‧魯‧陳‧蔡, 此固大王之所以鞭箠使也, 不足以王天下.
大王不若北取燕, 東伐齊, 則趙必從矣; 西取秦, 南伐楚, 則韓必從矣.
大王有伐齊‧楚心, 而從天下之志, 則王業見矣.
大王不如先行王服,
然後圖齊‧楚.’ 魏王說於衛鞅之言也, 故身廣公宮, 制丹衣, , 從七星之旟.
此天子之位也, 而魏王處之.
於是齊‧楚怒, 諸侯奔齊, , 覆其十萬之軍.
魏王大恐, 跣行按兵於國, 而東次於齊, 然後天下乃舍之.
當是時, 秦王垂拱受之外, 而不以德魏王.
故曰衛鞅之始與秦王計也, 謀約不下席, 言於尊俎之間, 謀成於堂上, 而魏將以禽於齊矣;
衝櫓未施, 而西河之外入於秦矣.
此臣之所謂比之堂上, 禽將戶內, 拔城於尊俎之間, 折衝席上者也.”


소진蘇秦 민왕閔王에게 유세하다
소진蘇秦 민왕閔王에게 유세하였다.
“저는 듣건대, 전쟁을 하면서 천하 사람보다 앞장서기를 좋아하는 자는 근심하게 되고 맹약을 맺어 〈적국을 공격하면서〉 원망의 대상인 맹주가 되기를 좋아하는 자는 고립된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남보다 뒤에 일어나는 자는 자뢰藉賴할 곳이 있게 되고, 원망을 멀리하면 시기時機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일을 벌일 때면 반드시 그 에 의지하고 시기에 맞추어 일을 시작하기에 힘썼던 것입니다.
무릇 권자權藉는 만물의 통수統帥요, 시세時勢는 만사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러므로 권자權藉가 없고 시세時勢를 배반하고서 능히 일을 성사시킨 자는 드뭅니다.
지금 비록 간장干將이나 막야莫邪 같은 보검이 있다 해도 사람의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벨 수 없습니다.
또 아무리 견고한 화살과 예리한 살촉이 있다 하더라도 활시위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먼 데 것을 쏘아 죽일 수 없습니다.
화살이 결코 예리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칼 또한 날카롭지 않은 것이 아니건만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권자權藉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것을 아느냐 하면 옛날 나라가 나라를 습격할 때 전거戰車는 공격을 중지하지 않고 사람들은 쉬지 않아 나라를 포위했습니다.
조나라가 강평剛平에 성을 쌓자, 나라는 8개의 성문을 흙으로 막았지만 2개가 허물어지고 말아서 망할 형세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위군衛君은 맨발로 나라에 가서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이에 위왕魏王은 몸소 갑옷을 입고 칼을 갈아서 차고 나라에 도전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나라의 수도 한단邯鄲 사람들이 놀라 허둥대고, 하수河水태항산太行山사이가 혼란하게 되었습니다.
나라는 이처럼 의지할 바[藉]를 얻어 역시 나머지 군사를 수습하여 북쪽으로 조나라를 쳐서 강평剛平 땅을 휩쓸고 중모中牟의 성곽까지도 함락시켰습니다.
이는 나라가 나라보다 강해서가 아닙니다.
나라를 화살에 비유한다면 나라는 바로 활시위와 같아 나라의 힘을 빌어 하동河東의 땅을 차지한 것입니다.
나라가 두려워하자 이번에는 나라가 나라를 구하려고, 나라를 쳐서 주서州西에서 싸웠는데 양문梁門을 나와 임중林中에 주둔하여 말에게 대하大河의 물을 먹였습니다.
나라는 이러한 의지할 바를 얻어 역시 나라의 하북河北을 치고는 극포棘蒲를 불사르고 황성黃城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러므로 강평剛平이 함락되고, 중모中牟가 무너지고, 황성黃城이 함락되고, 극포棘浦가 불탄 것은 모두 나라나 나라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두 나라가 힘들여 이렇게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나라가 에 의지하는데 밝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시대에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군대가 약한데도 강한 자 대적하기를 좋아하고, 나라가 지쳐 있는데도 대중의 원망 사기를 좋아하고, 일이 어긋났는데도 끝까지 해보기를 좋아하고, 군대가 미약한데도 아랫사람에게 증오를 살 일을 하고, 국토가 좁은 데도 큰 나라와 대항하고, 일이 실패했는데도 사술詐術장기長技로 여기기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섯 가지를 행하면서 패자霸者되기를 바라는 것은 요원한 일입니다.
저는 듣건대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자는 백성의 뜻을 따르고, 군대의 능력을 잘 헤아린 연후에 천하의 형세를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맹약을 맺되 인주人主가 원망을 사지 않도록 노력하고, 남을 정벌하되 남 대신 강적을 꺾지 않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병력을 소비하지 않고, 국권國權도 경시당하지 않은 채 땅을 넓힐 수 있고 욕망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옛날 나라가 나라‧나라와 더불어 나라와 나라를 칠 때에 싸움을 그리 격렬하게 한 것도 아니고, 땅을 나누는 것도 결코 나라나 나라보다 더 얻은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천하가 유독 나라에게만 허물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그것은 바로 나라나 나라 대신 원망을 샀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천하가 두루 전쟁을 하여 나라와 나라가 싸울 때 나라는 중산국中山國을 병탄하였고, 나라와 나라가 나라‧나라와 쉬지 않고 싸울 때 나라와 나라는 일심으로 용병에 전념하였습니다.
이 열 나라는 모두 서로 적대시하는 뜻을 두었는데, 유독 나라만 주의注意하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그것은 맹약을 맺을 때 남에게 원망을 살 우두머리가 되고, 정벌하면서는 남을 위해 강적强敵 꺾기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강국이 화를 입는 것은 항상 칭왕稱王하려는 뜻 때문이요, 약소국이 재앙을 입는 것은 항상 남을 모해謀害하는 것을 자기의 이익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대국은 위험해지고, 소국은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대국의 모계謀計로는, 나중에 일어나서 불의한 자를 신중히 치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무릇 나중에 일어나서 남에게 힘을 빌리게 되면 동맹국이 많아지고 힘이 강하게 되니, 강한 많은 군사로 지치고 적은 숫자를 대적하게 되어 군사의 위엄이 설 것입니다.
일을 도모함에 천하의 마음을 막지 않으면 이로움이 반드시 뒤따를 것입니다.
대국大國이 이런 일을 실행한다면 명성은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이를 것이요, 패왕伯王은 하고자 하지 않아도 이룩될 것입니다.
한편 소국小國정황情況은 말과 행동을 삼가고 다른 제후들을 적게 믿느니만 못합니다.
말과 행동을 삼가면 사린四鄰이 배반하지 않을 것이요, 다른 제후들을 적게 믿으면 천하에 이용당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밖으로 이용당하지 아니하고 안으로 배반이 없으면 쌓아둔 재화가 썩도록 부유해지고, 쌓인 옷감이 좀이 슬도록 다 입을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이며, 소국小國이 이를 행한다면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복을 받게 되며, 꾸지 않더라도 유족裕足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을 숭상하는 자는 왕자王者가 되고, 를 세운 자는 패도霸道를 이루며, 여력을 남기지 않고 전쟁한 자는 망하게 됩니다.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느냐 하면 옛날 오왕吳王 부차夫差는 강대하기로는 천하에 제일 앞섰습니다.
나라의 강습强襲하였으며, 월왕越王 구천勾踐회계산會稽山으로 몰았으며 제후들을 복종시키는 군주가 되었지만, 마침내는 몸은 죽고 나라가 망하여 천하의 도륙을 당하였으니, 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이는 부차가 평소 왕 노릇하기를 도모하고 강대하여 천하에 를 일으키는 데 앞장서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옛날 나라와 나라 등 소국은 모책謀策을 좋아하였고, 사술詐術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나라를 믿다가 망하였고, 나라는 나라를 믿다가 망하였으니, 이는 모두 안으로 사술詐術장기長技로 삼고, 밖으로 제후를 믿은 때문에 생긴 재앙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강약대소强弱大小에 따라 각각 당하는 는 지난날의 일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속담에 ‘기기騏驥 같은 준마가 노쇠하니 노마駑馬가 앞지르고, 맹분孟賁 같은 역사力士가 지치니 아녀자가 이긴다’라는 말이 있는데, 노마나 여자는 근골筋骨이나 힘이 기기騏驥맹분孟賁보다 낫지 않건만 왜 그렇게 됩니까?
뒤늦게 일어나 의지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천하에 서로 힘이 비슷한 사이 끼리는 상대방을 멸망시켜 겸병하지 못하고 군사를 끌어안고 때를 기다리다가 후에 일어나서, 원한 살 일은 다른 사람에게 전가轉嫁시키고 정직하지 못한 자를 주벌誅罰하고, 용병用兵하는 진정眞情을 숨기고 정의正義를 위한다고 가탁한다면 천하 제후를 멸망시키기란 발꿈치를 들고 서서 기다려도 됩니다.
또 제후들의 일에 밝고 각국 지형지리地形地理 형세에 밝으면, 조약을 맺어 친하지 않고 서로 인질人質을 교환하지 않아도 국가가 공고鞏固하게 되고, 재촉하지 않아도 빨리 진행되며, 여러 일을 도모하되 반대가 없고, 서로 땅을 나눠 갖되 미움을 사지 않으며, 서로 강해지면서도 친교는 더욱 두터워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형세상 근심이 같고, 전쟁에 같은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런 줄 아느냐 하면 지난날 나라와 나라가 환산桓山의 구석에서 일전을 벌였을 때, 나라는 이기지도 못하면서 10만 명의 군사가 섬멸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호인胡人이 이 기회를 틈타 연나라의 누번樓煩 등 수 개의 을 습격해서 우마牛馬를 노략질해 갔습니다.
무릇 나라는 평소 무슨 친교가 있었던 사이도 아니었고, 용병도 맹약을 체결하거나 인질을 교환하면서 연나라를 치자고 약속한 바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서로 협조하여 함께 공격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형세상 우려하는 바가 같고 전쟁의 이익이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같은 형세를 가진 나라와 맹약을 맺으면 이익이 장원長遠하고, 뒤에 일어나면 제후들을 부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주明主현상賢相으로서 진실로 패업霸業을 이룩할 뜻이 있다면 전쟁을 남보다 먼저 서두르지는 않습니다.
전쟁이란 나라를 잔폐시키고 도읍이나 의 재용을 소모하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잔폐해지고 소모하고서도 능히 제후를 복종시킨 자는 적습니다.
전쟁의 잔폐殘廢는, 군사들이 전쟁 소식을 들으면 사재私財를 옮겨 군시軍市에 보태고, 음식을 날라 사사死士를 대접하고, 수레의 끌채를 부수어 병사들의 밥을 지어야 하며, 소를 잡아 병사를 먹여야 하니 이 모두는 군대를 약하게 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게다가 해당 나라 안의 백성은 출정하는 장사將士를 위해 기도하고, 임금은 전사자戰死者를 위해 제사를 지내고 시체를 묻어주고, 큰 도시나 작은 현까지 모두 사제社祭를 지내며, 시장이나 촌읍村邑은 모두 영업을 정지하고 을 위해 봉사해야 하니, 이는 국내를 허약하게 하는 계책입니다.
무릇 전쟁 다음날에는 죽은 시체를 묻어주고 부상자를 부축해야 하니, 비록 이 군대가 전공을 세웠다 할지라도 이 전쟁에 쓴 비용이며 백성의 울부짖는 소리가 군주의 마음을 상하게 할 뿐입니다.
죽은 자의 집안은 가산을 탕진해 가면서 장례를 치르고, 부상자의 집에서는 재산을 털어 약값을 써야 하며, 온전히 살아난 자의 집안은 국내에서 잔치를 벌이고 사치奢侈 환락歡樂하므로 그 비용이 사상자死傷者와 맞먹습니다.
그래서 백성이 쓴 비용이 10년 농사를 지어도 다 갚을 수 없습니다.
군대가 출전하면 창이 부러지고, 활이 끊어지며, 가 부러지고, 수레가 부서지며, 말은 지치고 화살의 반은 없어지고 맙니다.
갑병甲兵전구戰具는 관가나 사가私家에서 나오는데 사대부士大夫들이 숨기고 장작을 패고 말을 기르는 사람들이 훔쳐가서 이것도 10년 농사로도 보충하기에 부족합니다.
천하에 이러한 두 가지 비용을 쓰고도 능히 제후를 복종시킨 자는 없습니다.
을 공격하는 비용, 백성들이 첨폐襜蔽를 수리하고 충로衝櫓를 만를 만드느라 온 가족은 대오隊伍에 편입되고 자신은 토굴에서 생활하며, 민중은 병기兵器를 만드느라 피곤해 하며, 병사들은 토목공사土木工事를 하느라 곤고困苦해 하며, 장수는 갑옷을 벗지 못하고 시간을 정해 놓고 성을 함락하려고 급히 서두릅니다.
윗사람은 교련에 지치고 병사들은 병기에 팔다리가 잘립니다.
그 때문에 세 개의 이상을 함락시키고도 적을 이겨낸 자는 매우 적습니다.
그러므로 공격은 먼저 나서서 저지를 일이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옛날 지백智伯 범씨范氏중항씨中行氏를 공격하여 그 임금을 죽이고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다시 서쪽으로 진격해 진양晉陽까지 포위해 이국二國을 병탄하고, 나머지 한 임금(趙 양자襄子)을 근심하게 했으니, 이는 성대한 용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백은 마침내 몸은 죽고 나라는 망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 것은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먼저 용병하여 공격해 두 나라를 멸망시킨 였습니다.
또 지난날 중산국中山國은 나라의 군대 전부를 동원해서 나라와 나라를 맞아 남쪽 장자長子 땅에서는 나라를 패배시키고 북쪽으로 중산에서 싸워 나라를 패배시켜 그 장수를 죽였습니다.
무릇 중산국은 겨우 1천 승의 작은 나라이면서 두 개의 만승국인 연나라와 조나라와 두 번이나 대적하여 두 번 모두 이겼으니 이는 상등의 용병이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나라는 망하고 그 임금은 제나라의 신하가 되었으니 왜입니까?
그것은 전쟁 일으키는 것을 조심하지 않아 초래한 화환禍患입니다.
이로써 보건대 전공戰攻하여 망한 예는 전사前事에 수두룩합니다.
지금 세상에 이른바 용병에 능하다고 하는 자는 싸움이 끝나기 전에 연전연승하고, 수성守城하면 견고하여 함락당하지 않는 것을 천하가 잘한다고 일컬으나 한 나라는 보전하더라도 나라에 이로운 것은 아닙니다.
저는 듣건대 싸움에 크게 이기는 자는 군사가 많이 죽어서 병력은 그만큼 약해지는 것이요, 수성하여 함락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백성이 그만큼 피폐해지고 성곽은 허물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무릇 병사는 밖에서 죽고, 백성은 안에서 잔폐殘弊해지며, 변경의 성곽이 허물어지는 것은 왕의 즐거움이 아닐 것입니다.
대저 과녁은 사람에게 죄를 진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문득 화살을 당겨 쏘고는, 맞힌 자는 좋아하고 맞히지 못한 자는 부끄러워합니다.
이렇게 노소老少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누구나 모두 같은 마음으로 과녁을 맞추려고 애쓰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과녁이 자기를〉 맞추기 어려움을 보여주어서 〈사람들에게〉 미움받기 때문입니다.
지금 끝까지 싸워 연달아 이기기만 하고, 지킬 때면 빼앗기지 않는 이것은 비단 남에게 어렵다는 것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또한 남을 해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천하가 모두 원수로 여기게 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대저 군사를 피폐하게 하고 나라를 파괴하여 가면서 천하를 상대로 많은 원수가 되게 한다면, 현명한 임금은 그러한 일을 하려 들지 않을 것이며, 본래의 강하던 병력을 약화시키는 일이라면 현상賢相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 현명한 임금과 현명한 재상이라면 오병五兵을 쓰지 않고도 제후가 복종해 오도록 하며, 사양辭讓하면서도 중한 재물이 들어오게 합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임금의 공전攻戰에는 갑병甲兵출군出軍하지 않고도 적국을 이기며, 충로衝櫓를 쓰지 않더라도 변성邊城을 항복시킬 수 있어 사민士民이 모르는 사이에 왕업王業이 이루어집니다.
또 그런 현명한 임금의 일 처리는 재물을 적게 들여 시간이 걸리는 것 같지만 그 이익은 장원長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을 나중에 일으키면 제후가 스스로 달려와 그들을 부릴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공전攻戰의 방법은 꼭 군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상대가 백만 대군일지라도 묘당廟堂에서 이를 패배敗北시킬 수 있고, 비록 합려闔閭오기吳起 같은 장수가 있다 하더라도 방안에서 사로잡을 수 있으며, 천 길 높이의 일지라도 연회宴會하는 자리에서 함락시킬 수 있고, 1백 척 높이의 충거衝車라도 앉은 잠자리에서 이를 꺾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고鐘鼓우슬竽瑟의 음악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땅을 넓힐 수 있고 욕망을 성취시킬 수 있으며, 배우‧광대의 무용과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평화 속에서도 제후들을 한꺼번에 오게 하여 복종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지와 짝할 만한 명성名聲도 존귀한 것이 아니며, 해내海內를 제압할 만한 라 할지라도 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무릇 왕업王業을 잘 이루는 자는, 천하는 수고롭게 하고 자신은 편안하게 하며, 천하사람은 어지럽게 하고 자신은 편안하게 함에 달려 있습니다.
제후들의 모책을 성공하지 못하게 하면 자신에게는 장구한 근심이 없게 됩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느냐 하면 편안하고 다스려짐은 나에게 있고, 천하는 수고롭고 어지럽게 하는 것이 바로 왕도를 성취하는 방법입니다.
날랜 적군이 오면 막고, 화환禍患이 닥치면 이를 남에게 옮겨서 제후들의 도모圖謀하는 바가 성공하지 못하게 하면 나라에 장구한 근심이 없게 됩니다.
이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옛날 위왕魏王(惠王)은 국토가 1천 리요, 대갑帶甲이 36만이어서, 그 강함을 믿고 한단邯鄲을 공략하고 서쪽으로는 정양定陽을 포위하고는 다시 12 제후를 복종시키고 나라의 천자天子조회朝會하였으며, 서쪽으로 나라를 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되자 진왕秦王(孝公) 이를 두려워해서 잠자리가 편치 못하고 음식 맛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급히 국내에 영을 내려 성첩城堞에 방어할 전구戰具를 갖추게 하고 변경을 수비하게 하였으며 결사대를 조직하고 장수를 두어 위나라의 침공에 대비하였습니다.
이때 위앙衛鞅진왕秦王에게 모책을 바쳐 이르기를 ‘무릇 나라는 공이 커서 천하를 호령하여 12나라의 제후를 이끌고 천자를 조회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무리가 많아서 우리 나라 일국이 큰 나라를 당해내기는 어렵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왕께서는 어찌 저를 위왕魏王에게 사신으로 보내지 않으십니까?
제가 반드시 나라를 실패失敗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진왕秦王이 허락하였습니다.
위앙衛鞅위왕魏王을 만나 말하였습니다.
‘대왕의 은 정말 대단하시어 호령이 천하天下에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대왕을 따르는 12제후들은 나라나 나라가 아니면 등 소국들 뿐으로 이들은 본래 대왕께서 채찍을 써서 복종시켜 그들을 데리고 천하에 왕 노릇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대왕께서는 북으로 나라를 취하고, 동으로 나라를 쳐부수면 나라가 틀림없이 복종해 올 것이요, 서쪽으로 나라를 취하고, 남쪽으로 나라를 토벌하시면 나라가 틀림없이 복종해 올 것이니 이렇게 하시는 것만 못합니다.
대왕께서 제나라‧초나라를 토벌할 마음과 천하를 복종시킬 뜻만 가지신다면 왕업王業은 저절로 실현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먼저 제왕帝王복식服飾을 정하느니만 못합니다.
그렇게 한 후에 나라‧나라를 도모하십시오’라고 하니, 위왕魏王위앙衛鞅의 말에 기뻐하며 몸소 나서서 궁전을 넓혀 수리하고 붉은 색 의상을 만들었으며, 기둥에 구유九斿를 세우고 칠성지여七星之旟를 달았습니다.
이는 바로 천자의 자리에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인데 위왕이 이렇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나라와 나라는 노하였고, 제후들은 모두 나라로 달려가 편을 들었으며, 나라는 나라를 쳐서 그 태자를 죽이고 10만 대군을 엎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위왕魏王은 크게 겁을 먹고 맨발로 달려가 국내의 군사 행동을 정지시키고 동쪽으로 나라로 달려가 주둔하여 강화講和를 청하니 그제야 천하가 그를 놓아주었습니다.
그 당시에 진왕秦王은 팔짱을 낀 채 서하西河 밖의 땅을 받으면서도 위왕魏王에게 감사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위앙衛鞅이 처음에 진왕秦王과 계획을 짤 때에 자리에서 내려오지도 않고, 연석宴席에서 담론談論하듯 하여 묘당廟堂에서 이루어진 계획에 의해 나라 장수를 나라가 사로잡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충로衝櫓를 쓰지 않고, 서하西河 밖의 땅을 나라에 들어오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방금 말씀드린 ‘묘당에서 패배시킬 수 있으며[比之堂上]’, ‘적장을 방안에서 사로잡을 수 있으며[禽將戶內]’, ‘천 길 높이의 일지라도 존조尊俎를 차리는 사이에 뽑아 버릴 수 있고[拔城於尊俎之間]’, ‘앉은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적을 꺾어 버릴 수 있다[折衝席上]’라고 한 것입니다.”


역주
역주1 蘇秦說齊閔王 : 原註에 “어떤 本에는 蘇秦 두 글자가 없다.”라고 하였고, 글 내용으로 보아도 蘇秦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史記》 〈蘇秦列傳〉에도 이 글이 실려 있지 않다. 閔王은 즉 湣王.
역주2 干將‧莫邪 : 名劍 이름. 《吳越春秋》에 “干將은 吳人이며, 莫邪는 그의 妻이다. 간장이 칼을 만드는데 막야가 머리털과 손톱을 잘라 爐에 넣어 담금질을 해서 칼을 완성해 陽을 干將, 陰을 莫邪라 하였다.”라고 했다.
역주3 趙氏襲衛 : 周 安王 19년(B.C.383)에 趙나라가 衛나라를 습격한 사건. 이듬해 齊나라와 魏나라가 衛나라 愼公 頹를 도와 趙나라를 공격하였다.
역주4 車〈不〉舍 : 金正煒의 《戰國策補釋》에 의하여 不을 보충하여 번역했다.
역주5 傅(附)衛國 城割(剛)平 : 王念孫의 《讀書雜志》에는 傅衛國이 附衛國으로, 城割平이 城剛平으로 되어 있어 이를 따랐다.
역주6 원주] 被甲底劍 : 어떤 本에는 底가 砥로 되어 있다.
역주7 殘剛平 墮中牟 : 剛平은 衛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남성 淸風縣 경내인데, 趙 敬侯가 城을 쌓았으며 敬侯 5년 齊나라와 魏나라가 趙나라를 침공하여 강평을 취하였다. 中牟는 趙나라 邑으로 지금의 河北省 邢臺와 邯鄲 사이.
역주8 河東 : 황하 以東 지역. 지금의 河南省 濬縣‧滑縣의 以東 지역.
역주9 州西 : 지금의 河南省 沁陽縣 동쪽의 武德城 故址. 혹은 ‘州의 서쪽 지역’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역주10 梁門 : 大梁의 성문. 大梁은 魏나라의 도읍. 지금의 河南省 開封市.
역주11 林中 : 지금의 河南省 新鄭縣 동쪽의 林鄕城.
역주12 河北 : 河內라고도 하며 河南省 황하 이북의 魏나라 땅.
역주13 棘溝(蒲) : 《史記》 〈趙世家〉에는 棘蒲로 되어 있어, 이를 따랐다 . 지금의 河北省 趙縣.
역주14 黃城 : 山東省 冠縣 남쪽. 혹은 지금의 河南省 黃縣 서쪽이라 한다.
역주15 齊之與韓‧魏伐秦‧楚 : 周 赧王 16년(B.C.299)에 齊나라 孟嘗君이 秦나라로부터 돌아온 뒤 韓나라‧魏나라와 연합해서 秦나라를 공격한 다음 다시 楚나라를 친 사건.
역주16 齊‧燕戰 而趙氏兼中山 : 《史記》〈燕召公世家〉에 의하면 易王 즉위 초에 齊 宣王이 燕나라를 치고, 燕王 噲 때 내란이 일어나자 齊 湣王이 孟子의 말을 듣고 연나라를 친 것으로 되어 있다. 中山은 나라 이름. 《史記》〈六國年表〉에 의하면 趙 惠文王 4년에 趙나라가 齊나라 및 燕나라와 함께 중산국을 멸망시켰다.
역주17 원주] 事(是) : 劉敞本에는 事가 是로 되어 있어 이를 따랐다.
역주18 兵必立也 : 金正煒의 《戰國策補釋》에는 名必立也로 되어 있다.
역주19 僅(謹)靜 : 僅은 謹의 誤字. 이하도 같다.
역주20 擯禍 : 鮑彪本에는 稸積으로 되어 있는데, 蓄積과 같다.
역주21 [見] : 衍文인 듯하다.
역주22 夫差 : 春秋時代 吳王. 闔閭의 아들.
역주23 强襲郢 : 원주에 “曾鞏本에는 强자가 없다.”고 하였다. 吳王 闔閭가 9년에 楚나라의 수도 郢을 침범하자 楚 昭王이 도망하였는데, 秦나라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 사건인데, 夫差의 일로 잘못 기록된 듯하다. 103장 참조.
역주24 棲越 : 吳王 夫差 2년 句踐을 크게 패배시킨 후 會稽山에 살게 한 일.
역주25 萊‧莒 : 두 곳 모두 小國 이름. 萊는 萊夷, 春秋時代 子爵으로 齊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山東省 掖縣. 莒도 子爵으로 春秋時代 楚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山東省 莒縣.
역주26 陳‧蔡 : 모두 周 이후의 작은 제후국. 陳나라는 宛丘(河南省 淮陽縣), 蔡나라는 上蔡(河南省 上蔡縣)에 도읍하였다. 뒤에 모두 楚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역주27 騏驥 : 駿馬, 良馬를 일컫는 말로 賢才를 비유하기도 함.
역주28 孟賁 : 戰國時代의 力士. 《史記》 〈秦本紀〉에는 孟說로 되어 있다.
역주29 : 地名. 확실치 않으나 鮑彪는 齊나라와 魯나라 사이의 桓山으로 비정하였는데, 역문에서는 우선 이를 따랐다.
역주30 胡人襲燕樓煩 : 胡人은 춘추 때는 狄‧山戎 등으로 불리었으며, 전국 이후에는 胡, 혹은 匈奴로 불렸다. 樓煩은 춘추시대 北狄의 소국. 전국시대에 들어 趙나라 武靈王에게 망하였는데, 이 당시에는 燕나라의 땅이었다. 지금의 산서성 서북쪽의 寧武‧保德‧嵐風縣 등지.
역주31 원주] 折轅 : 集賢院本에는 折轅으로 되어 있고, 曾鞏本에는 析骸로 되어 있다.
역주32 路君(軍) : 黃丕烈의 《戰國策札記》에는 路軍, 즉 군사를 지치게 하는 일로 되어 있다.
역주33 智伯瑤攻范‧中行氏 : 智伯은 춘추시대 晉나라 六卿의 한 사람으로 姓은 荀, 이름이 瑤. B.C.458년 韓나라와 趙 ‧魏나라 군사를 이끌고 范氏와 中行氏를 攻滅하고 그 땅을 나누어 차지했다. 〈秦策〉 096장 秦昭王謂左右 註를 참고할 것.
역주34 晉陽 : 地名. 지금의 산서성 太原市 지역. 智伯이 范氏와 中行氏의 땅을 나누어 가진 후, 다시 韓‧魏‧趙나라에 땅을 요구하여 趙나라가 이에 응하지 않자 지백은 다시 韓나라와 魏나라 군사를 이끌고 趙나라를 공격했다. 이때 趙 襄子는 이 晉陽으로 후퇴해 성을 지켜 승리했다.
역주35 日(昔)者 : 日은 昔의 誤字.
역주36 長子 : 地名. 趙나라 땅으로 지금의 산서성 長子縣.
역주37 北(比)勝 : 원주에 “北는 혹 比로 된 本도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의거하여 比勝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比勝은 매번 이긴다는 뜻
역주38 五兵 : 五種의 병기. 《荀子》 〈儒效〉 註에 의하면 五兵은 矛, 戟, 鉞, 楯, 弓矢이다.
역주39 吳起 : 전국시대 衛나라 병법가. 용병에 능하였으며 처음에 魯將이 되어 齊나라를 破하였다. 뒤에 魏將이 되어 西河를 지켰으며 다시 楚나라로 도망해, 相이 되었으나 楚나라가 강해지자 귀족들에게 미움을 받아 주살당하였다. 《史記》 〈孫子吳起列傳〉 참조.
역주40 之(乏) : 鮑彪本에 의거해 乏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역주41 佚治 : 편안한 다스림. 원주에 “어떤 本에는 佚이 없다.”라고 하였다.
역주42 〈恃〉 : 鮑彪本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43 定陽 : 陝西省 洛川縣 북쪽.
역주44 天子 : 여기서 天子는 周 顯王을 가리킨다.
역주45 秦王 : 秦 孝公을 가리키는데, 당시에 秦나라는 王이란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역주46 竟(境) : 吳師道의 《補正》에 의거해 境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역주47 衛鞅 : 商鞅을 가리킨다. 《史記》 〈商君列傳〉 참조.
역주48 柱建九斿 : 王念孫은 柱를 旌의 誤字라 하였다. 斿는 旌旗의 장식.
역주49 齊人伐魏 殺其太子 : 周 顯王 28년(B.C.341)의 일로 魏나라가 韓나라를 치자 齊나라는 孫臏을 帥로, 田忌와 田嬰을 將으로 삼아 魏나라를 공격, 馬陵에서 魏將 龐涓을 죽이고 太子 申을 사로잡았는데, 태자는 자결해 버리고 말았다.
역주50 西河 : 지금의 陝西省 華陰縣일대. 魏나라가 馬陵에서 韓‧齊나라에게 대패한 다음해에 秦 孝公이 다시 衛鞅을 장수로 魏나라를 공격하자 서하를 떼어 주고 강화하고, 魏 惠王은 이 때문에 秦나라를 피하여 大梁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를 인해 이때부터 魏나라를 梁나라라고도 불렀다.

전국책(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